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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 무한경쟁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플로리안 오피츠 지음, 박병화 옮김 / 로도스 / 2012년 3월
평점 :
"오늘날은 속도의 증가만으로 빨라지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동시 활용'과 '시간의 압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점점 더 많은 일을 하면서 가속화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요즘 말로는 '멀티태스킹'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두뇌는 진정한 멀티태스킹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두뇌는 한 번에 한 가지씩 순서대로 처리하게끔 프로그램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알다시피 인간의 두뇌는 뛰어납니다. 그러나 깊은 사고가 필요하고 철저한 분석이 요구되는 일은 시간 압축이나 멀티태스킹으로 처리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집중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멀티태스킹' 외에 가속화를 추구하는 두 번째 마법의 주문은 '유연화'입니다."
(...)
가이슬러 교수는 이렇게 유연하고 완벽하게 멀티태스킹에 맞춰진 사람을 '동시 수행자'라고 불렀다.
p.82, 슬로우, 플로리안 오피츠
과거에 나는 모 분야 전문지 기자였다.
(망할) 빠른 적응력 하나 덕분에 입사한지 오래되지 않아 나는 회사에서 원하는 '유연하고 완벽하게 멀티태스킹에 맞춰진
동시수행자' 반열에 금세 올랐다. 소맥을 촬촬 마는데 기가 막힌
재능을 자랑하던 윗선들은 '이 상태로 얼마나 오래버티는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며 칭찬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들을 입버릇처럼
(술자리에서만) 뱉곤 했다. 거북한 속을 달랠 새도 없이 어미새의 마음으로 새벽같이 나가 기삿거리를 조근 조근 물어 왔으며, 밤
11시가 넘도록 취재원과 이바구를 떨며 손으로 그의 뒷통수를 치는 야마를 뽑아냈고, 그 시간까지 이자카야에서 (사케도 아닌)
소주를 마시며 진상을 부리는 사수가 자리에서 (알아서) 일어날 때까지 인내심을 시험하며 엉덩일 붙이고 앉아있었고,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출근하자마자 어젯 밤의 취재원으로부터 애미애비에게도 못 들어본 상소리를 이쪽 귀에서 저 쪽 귀로 흘려 들으며 또 다시
그의 뒷통수를 깔 그 '한 마디'를 물기 위해 은그은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욕은 또 왜 처먹고 앉아 있냐며 할 일 없이
갈궈대는 팀장 앞에서 그저 네, 네 하고 뒤를 돌아선 부랴부랴 가까운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는데, 그 와중에도 어느 경쟁지의 누가
먼저 썼느니, 마니, 등등 따위의 개소리는 위장 운동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으며, 아무리 들쑤셔도 취재 거리가 나오지 않는 어느 날
오후에는 쓸데 없이 부풀어오르는 자책감으로 몹시도 괴로워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스마트폰이 고장났다. 그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만뒀단 말이다.
다만 그 만세를 병원에 드러 누워서 외쳐야 했다는 사실, 속도와 경쟁에
집착했던 한 때의 미련했던 '동시 수행자'로서 그지같은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사실, 그리고 하르트무트 로자 교수가 말하는
'암세포'의 살아있는 수혜자로서 또 다른 성격의 묘한 자부심을 같는 지금 이 순간이 씁쓸할 뿐.뿐.뿐(뿡!).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그만뒀거든. 내 동기들은 달디 단 시간의 주권을 편집장과
발행인, 그리고 위대하신 스마트폰님게 빼앗긴 채 여전히 썩고 있거든. 오랜만에 전활해서 실컷 놀려줘야 할까보다. 조만간 단골
이자카야엘 데려가 달디 단 사케를…!
우리 사회의 문화와 구조, 제도에는 가속화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연법칙에 따른 한계도, 만족도 모르는 이런 냉혹한 현실에 대해 나는 두려움과 염려를 느낍니다. 나는
이런 현상이 위력을 드러낼 때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는 암세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p.136-137, 슬로우, 플로리안 오피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