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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가난한 이들에게 겨울은 빈곤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선뜻 물리적인 의미'로 읽혀지는 흔해빠진 이 문장이란 말이죠. 곰곰히 되씹으면 되씹을수록 자꾸만 궁-해지는' 무언가의 매력(?)이 있습니다.
쌀싸-알한 칼바람에 곧잘 움츠려드는 목덜미, 장갑을 껴도 곧잘 시려오는 손끝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은그-은히전해지는 코끝과 귓볼의 무감각!! 이러니 추위에 벌벌 떨며 길바닥 위에서 휘적휘적 돌아치기 보다는 어떤 일이든 온기 가득한 실내에서 도모하는 편이 훨 안심이기 마련입니다. 그치만 낮은 짧고 밤은 왜 이리 길기만 한지. 다섯시 반 첫 열차 시간을 목표로 술을 아무리 마셔도 밖은 여전히 캄캄. 햇님은 겨울이면 아아주 제대로 게을러 터졌어요. 흐응.
이
러다보니 이 녀자는 자꾸만 갈구하고 갈구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욕망'이라는 놈이 다가와 슬쩍 슬쩍 간을 보기도 하고. 빈 그릇을
들이밀며 속히 채워달라 재촉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불안'이라는 불한당은 '빈 그릇마저 깨트리겠다'는 모진 말로 협박을 서슴지
않습니다. 하아. 어쩌면 좋나요? 빈 그릇을 채울 수 없는 가난한 나는요!!
그러던 중 오늘, 이 녀자는
영등포 구청 근처에서 막돼먹은 공무원과 말다툼을 하고, 데스크에 앉아 스타에 몰두하던 공익근무요원을 '만렙하라'며 실컷 놀려먹은 뒤
쏜살같이 집에 돌아와 곧장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서 저는 데이트를 하고 있더군요.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잡고, 뚜껑 열리는
비이싼 외제차를 렌트했습니다. 한적한 시골 도로를 한창 달리다 핸들을 잡고 앞을 주시하는 멋드러진 그 남자의 자태에 그만 참지
못하고 쪼옥- 볼에 입술 자국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하하!' 하고 그의 호탕한 웃음 뒤에 이어지는 묘한 적막함. 곧
이어서는 제가 -지난 몇년 간 전 남친과의 약속아닌 약속으로 금욕을 지켜왔던 제가- 바라고 바라던 상황이 연출되려는 그 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 혹시 아시겠어요?
조
수석에 앉아있던 저는 눈 깜짝할 사이 제 3자가 되어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봐야만 했다구요. 허공에 부웅 뜬 채로 '어머- 쟤 좀
봐.'라며 실컷 부러워할 수 밖에 없었다구요. 세상에 이런 억울하고 안타까운 경우가 어딨습니까. 꿈에서도 빈 그릇은 여전히
텅텅-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불안'의 집게 손가락 끝에서 위태위태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빙글거리는 저 불한당의 웃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 녀자는 두통에 시달리며 떨리는 열 손끝을 이렇게 자판 위로 올려놓고 신나게 주정을 부리고 있습니다. 식은 라테 반
잔을 앞에 남겨놓고 부엌 선반 깊숙이 숨겨 둔 싸구려 레드 와인 한 모금이 감싸 돌 혓바닥의 즐거움을 미리 상상해보고
있습니다.
에. 그러니까 이로써 겨울은 빈곤의 계절'이라는데 개인성과 명확성을 황급히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땅땅!!) 그치만요. 이렇게 장황하게 주절 주절 늘어놓긴 했어도. 이 계절에는 그저 진심 가득한 (기왕이면 힘
있는) 포옹 하나면 싸악- 녹아내릴 거라는데 소심하게 만원 걸겠습니다.
그리고 뽀끄로프스끼와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의 절정을 나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 뿐입니다….
나는 아이처럼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펑펑 울었다. 스스로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발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를 하고 자기 가슴에 갖다 대며 나를 달래고 위로했다.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_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열린책들), p.6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