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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 ㅣ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아나이스 닌씨께.
이 여편네야. (다짜고짜) 해도 해도 너무한 이 여자야. 그치만 역시 손에서 쉽사리 내려놓질 못하겠단 말야. 남의 일기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단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 내가 좀 거칠게 써 내려가더라도 부디 이해해 주기 바라. 그대도 만만치 않으니 뭐라 할 말은 없는 거 아니겠어. 이런 독자 쯤 하나, 아니 쌍으로, 심지어 트럭으로 가져와 들이대도 끄떡 없을 거라는 거 이미 알고 있으니 괜히 골골 대지 않았으면 해. 그 골골대는 소리가 사실은 고양이 빗질 할 때 내는 '그 골골'이라는 것 쯤까지도 파악하고 있으니까. (속으로 그대 비웃는 소리마저 들리는 내 입장이 더 난처하다는 것 쯤은 훠어언 하시겠지요.)
그대가 툭하면 잘만 내뱉던 그 표현이 좀처럼 생각나질 않아 그대 일기장을 한참을 찾아 헤맸어. 사실 좀처럼 정리정돈이 되지 못하는 이 같은 여자에겐 갑작스레 떠오른 무엇을 찾기보다 더 난처한 일은 없는 법이지. 지금 자인하고 고소를 금치 못하는 나를 보고 또 다시 골골 댈 그대를 생각하니 더욱 약이 오르더라구.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침대에 누워 이불 아래 손을 비벼 넣고 기지개를 실컷 펴는데 손 마디에 느껴지는 둔탁한 '턱'. 그것도 내 일기장 위에 그대의 책이 '턱'.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닌 내 일기장 위에 그렇게 '턱' 하고 가만히 올라 앉아 있을 게 뭐람. 애초부터 나를 약 올리려고 작정을 했구만. 그렇지? 나는 그리곤 주먹을 쥐고서 그새 뼈마디의 촉감이 달아나버릴까 싶어 다른 손을 들고 가만히 쓸어만 봐. 다음으로, 자연스레 페이지를 열고 몰입을 하지. 이건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난 번 출근길에는 너무 깊이 파고 든 나머지 내릴 역을 지나쳐 지각을 하기도 했어. 그래서 나는 당신을 이렇게나마 흘겨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야.
그러니까 내가 짚고 넘어가고픈 그대의 습관적인 그 말은 "사랑한다" 와 "사랑하지 않는다"였어. 도대체 누굴 사랑하고, 누굴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사실 이 따위 중요치 않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그저 시비를 걸고 싶었을 뿐야. 그런데 도대체 이 못난 감정은 무엇 때문에 비롯된거지?
그건 바로 그대, 아나이스 닌은 여자인 내가 이미 덮어버린, 오랫동안 꺼내 열지 않은 다락방 먼지 켜켜이 쌓인 나무 상자를 함부로 뒤적거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야. 지나치게 꼼꼼한 당신. 뒤죽박죽 섞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곱게 붙여 정리해놓았더군. 하지만 과거의 재구성은 아무래도 과장될 수 밖에 없는 거야. 비약을 불어넣기 마련이고. 또한 망상을 더한 허세까지. 그래서 내가 당신을 '이 여편네'라고 칭송할 수 밖에 없는 거야. 너무 흘겨 보진 말아줘. 그대 덕분에 충분히 밤낮으로, 심지어 꿈 속을 헤메이면서까지 줄곧 괴로워 했어. 생각을 좀 해 봐.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이 한꺼번에 달겨들어 몸을 온통 휘젓고 달아나는데 멀쩡할리가 있겠어. 식스센스마저 자극한 나머지 때론 헛것이 보이기도 해. 아. 이건 너무 잔인한 기록이잖아! 기록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감각적이라 음악, 그림, 영화, 모든 예술적 도구를 총 동원해도 따라잡기 힘들 것 같아. 심지어 그대가 기꺼이 아바타가 되어 준다 해도. 물론 단칼에 거절하겠지만.
그치만 그 가운데 솔직한 고백은 정말 맘에 들었단 말이지. 이 두 줄의 문장만으로 그댈 용서하게 되었단 말이지.
"솔직하고 싶은 심정으로 편지나 일기를 쓰기위해 앉지만, 나는 결국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다. 나는 언뜻 보기에는 진실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준이나 알베르틴보다 더 고약한 거짓말쟁이다." p.65
이렇게 쓰고 거울을 보며 윙크를 날렸을 그대를 떠올려 봐. 차암. 짖궂기도 하셔라.
그리고 오, 앞서 여러 번 강조하려 했지만 마지막 이 한 마디로 끝을 내도록 하지. 일기는 함부로 보여줘서는 안 돼, 아나이스. 프레드도 그랬잖아. 숨을 헐떡이며(라고 그대가 적진 않았지만) "아나이스, 이 일기를 내게 보여줘서는 안 돼요". 그 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떠는 당신 애인의 친구를 주도면밀히 관찰하며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당신의 심장은 몹시 흥분 상태 였을 거야. 오, 내 말이 틀림 없어. 사실 나도 지금은…. 쉬잇. 그댈 닮아가기 전에 여기서 이만 마쳐. 그럼 안녕. 황급한 안녕.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그대의 그림자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