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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ㅣ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욕망이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속담도 있지 않나. 바닥 떼울 생각은 않고 그저 목 마르다 불평하며 더 많은 물을 공수해 올 생각 뿐이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람이라 할 지라도 누구나 욕망이란 독의 깨진 바닥을 가지지 않은 이 없다. 생김새가 본래 그렇게 못난 것이지 누굴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가끔씩 두꺼비처럼 오지랖 넓은 흉칙한 놈이 등짝을 빌려주기도 한다. 콩쥐가 아주 잘 빌려쓰지 않았던가. 감사와 눈이 맞아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단다. 하지만 우리가 두꺼비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느 날 찾아와 "네 욕망의 독을 실컷 채워보렴."라고 말하며 기꺼이 등짝을 헌신하는 두꺼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설령 만났다 한들 우리는 언젠가 두꺼비에게 이별을 고해야 하고 또 다른 두꺼비를 찾기 위한 고난의 여정(?)은 또 시작 될 듯하다. 아.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욕망의 탈을 뒤집어 쓴 사랑이고 돈이며 그 추악한 이면을 좇아 속물 행세를 하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인간의 본래 모습은 깨진 독의 밑바닥과 같다. 인간이 곧 욕망 자체인 것이다. 레오폴드 폰 자허마조흐는 이를 직시하라 전한다. 그가 당시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쓰고도 불명예를 뒤집어 쓰게 된 것은 바로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깨진 밑바닥의 못난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두꺼비든 비너스든.
제베린은 밤낮으로 비너스의 사랑을 구걸한다. 묵묵부답인 그것 앞에서 그는 언제나 사랑의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다. 돌로 된 여인은 본래 상냥하지도 다정하지도 연민이 가득하지도 않다는 점을 간과한 탓이다. 제베린과, 그리고 우리 모두가 찾는 두꺼비는 상냥 다정하며 연민이 가득하다. 궁상맞은 얼골로 (정말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애걸복걸하면 뭐든지 들어줄 심산이다. 운이 좋게도, 때마침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한 미망인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야 반다 폰 두나예프. 두두둥. 피그말리온을 롤 모델 삼았다 싶을 정도로 제베린은 끈질긴 설득과 구걸을 무기삼아 반다라는 살아 움직이는 여신을 탄생시켰다. 역시 인간은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줄 아는 의지의 산물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당신은 순교자의 눈을 가졌어요."
자. 제베린은 적격의 두꺼비를 갖게 되었다. 라기 보다는 두꺼비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 했다. 깨진 밑바닥과 등짝의 사이즈가 제대로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다는 잠자고 있던 내면의 권위와 잔인함을 동시에 끄집어낼 줄 알게 되었고, 이를 적절히 요리할 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쾌락을 맛 보았으며, 이 또한 실컷 누렸으며...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순교자의 눈을 가진 제베린을 추억하면서. 순교자의 눈이라... 이 보다 더 반다스러운 표현은 없다. 사디즘 종결자, 그녀의 이름은 반다.
'그 요법은 잔인했지만 효과는 만점이었어.'
제베린은 친구에게 이야기 한다. 남녀 관계란 망치 아니면 모루인 것을. 이를 알면서도 자신이 모루가 되길 자처했으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고. 또 이후의 삶에선 예전의 장밋빛 환상은 사라지고 없다고 덧붙인다. 정말 제베린은 그 모두를 후회한 걸까. 그렇다면 반다의 편지를 받았을 때 야릇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겠지. 또 효과가 만점이었다고, 다시 건강해졌다고 '감히' 고백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베린은 이 모두를 한 장의 그림 속에 추억하길 원한다. 어차피 가득 채워지지 못할 욕망이란 걸 알면서도. 그리고 언젠가는 또 다른 반다를(두꺼비를) 조우할지도 모른다는 행운을 '기대'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 인생에서 두꺼비를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이것이 우리가 제베린에게 혐오나 힐난 (혹은 동정)이 아닌, 부러움의 시선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자허마조흐翁을 기리며.
레오폴드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두고 변태가 맞다, 아니다를 운운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우리는 모두 변태적 욕망을 꽁꽁 숨겨놓고 있지 않은가. 혹시 은밀한 시간,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채찍질을 권유하고 있지는 않은지. 언젠가 만날 천생연분을 위해 그대 옷장 속 커다란 모피를 오랜 시간 숨겨놓고 있지는 않은지. 자,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아주 실컷 채찍질을 참고 맞아 준 레오폴드 폰 자허마조흐님에게 크으은 박수를,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