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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썹, 혹은 잃어버린 잠을 찾는 방법 - 도서부 친구들 이야기 ㅣ 꿈꾸는돌 37
최상희 지음 / 돌베개 / 2023년 9월
평점 :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시기가 딱 그런 것 같다. 몸도 마음도 어른이 다 되었다고 스스로 자신하지만 사실은 아직 멀은.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일생일대의 과업을 코 앞에 두고 어른이 되었다는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공존하면서 사춘기의 갈팡질팡하는 마음도 남아 있고 아직 동심이라 부를 순수함도 있는 그런 시기.
내게도 녹주, 오란, 차미처럼 그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있었다. 반에서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 네 명과 여행을 계획하고, 네 명 중 몇몇이 각각 친했던 아이들을 더 데려와 7명이서 여행을 갔었다.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아이는 한 명, 그 마저도 드문드문 인스타그램에서 안부를 전하는 정도지만.
책을 읽으면서 작은 사연들이 나의 지난 학창시절과 오버랩되는 것이 좋았다.
p21. 서늘한 마루에서 잠들었다 깨니 집 안은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고 나는 혼자였다. 밖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와 소음이 들려오고 나는 어딘가 멀리, 몹시 아름다운 곳에 다녀온 듯하지만 기억 나지 않아 왈칵 서러웠다. - 초등학생 때 나도 그랬다. 서늘한 마루는 아니고 골목 안 1층 집이라 안방에 볕이 드는 시간대가 있는데 따뜻한 햇살이 좋아 잠들었는데 깼을 때 뭔가 서러웠던. 그런 기억. 나만 있을 것 같은 그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위로 받는 것 같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좋았다.
p40. 학원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차미를 우연히 만나기도 해서 건널목에서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 오란이 오면 우리 셋은 신호등 불이 바뀌길 기다리며 이야기하고 다음 신호등에 건너자고 반복하다가, 이야기는 신호등 불이 스무 번 넘게 바뀔 때까지 이어졌다. - 중학교 1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아이가 있었다. 어느 주말 오후 그 친구집에서 수다를 떨며 놀았고 집에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그 친구집에서 우리집으로 오려면 신호등이 있는 2차선 도로를 건너야 했는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둘이 팔짱을 끼고 그 신호등을 스무 번 넘게 왔다갔다하며 이야기 하다, 그러고도 아쉬워 하며 헤어졌던 기억이 있다. 2학년 올라가면서 반이 달라져 소원해져 지금은 이름을 떠올리는 데도 한참이 걸리지만 새삼 떠올라 미소지어 본다.
p75. 하지만 역시 음흉한 꿍꿍이였던 것 같다. 두 사람에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 나는 둘과 더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 친구가 홀수가 되면, 셋이 동시에 친해진 것이 아이라면 더더욱 그 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지금껏 살면서 내게도 그랬던 적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그 때의 기분을 요약해 볼 생각을 못해봤지만 그래, 녹주의 그 마음이었을 것 같다. '더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나의 이런 마음을 너무 잘 읽어준다.
다들 학창 시절에 이런 기억쯤은 하나 둘씩 갖고 있는 걸까? 내가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들, 모습 등을 너무 잘 묘사해서 읽으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써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작가가 쓰는 특유의 기발한 묘사나 지루하지 않은 만연체도 마음에 쏙 들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p106. 연화탕은 오래전 영업을 그만두었고 할머니는 삶의 낙을 하나 잃었다.
p172. 자기 전에 귀여운 고양이 유튜브 동영상을 서너 편쯤은 봐야 하는 것처럼, 멈출 수 없는 습관일 뿐인지도 모른다.
p178. 학기 초에 게시판에 붙여 놓고 잊어버린 그림처럼 전학생은 원래 있었던 듯 조용히 지냈다.
책을 읽으며 이런 표현들이 너무 좋았다. 요란하거나 현란하지 않은 미색 같은 서술, 편안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떠오르는 위트. 조용하면서 따스한 그러면서 너무 밝지도 않은 가을 날의 풍경 같은 묘사. 녹주, 오란, 차미의 에피소드들도 참신하고 재미있었지만 이런 작가의 묘사가 너무 좋아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봄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그 학년도 종업식으로 마무리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들에게 훗난 따뜻한 소중한 경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부디 오래오래 그 추억을 되네이며 함께 성장해 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