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체제 만들기
백낙청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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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해소를 위한, ‘거울’ 바라보기

-<거울의 법칙>에 비춰 본 <2013년 체제 만들기>-

 

 “통일? 그런 거 꼭 해야 하나? 통일하면 세금 늘어난다잖아.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데....”

 주위의 20대들에게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이처럼 부정적인 반응이 다수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통일 후의 있을 경제적 곤란을 그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통일 후에 있을 문제는 경제적 곤란 뿐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국가의 정치를 어떻게 이끌어갈 지도 문제이다. 오랜 세월 동안 떨어져 있던 민족의 화합을 이루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20대들이 다른 문제들은 생각하지 못한 채 경제적 이유만 들어 통일을 반대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그들 자체가 경제적인 곤란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왜 20대들은 항상 경제적 불만을 토로하는가? 엄기호 씨의 <이게 사는 건가>라는 글에서 일면이나마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글에서 ‘대학은 상대적 빈곤을 절감하는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라며 대학교 내 부르주아 식당이나 스타벅스 커피를 예를 들어 여유로운 대학생과 고학생의 신분이 갈라진다고 서술했다. 20대들이 꿈을 꾸고 열정을 길러야 할 공간에서조차 그들을 한숨짓게 만드는 것, 바로 양극화가 20대와 통일을 이간질한 주범이다.

 

 노구치 요시노리 저의 <거울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감동시킨 이 이야기는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하다. 평범한 주부인 에이코의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왕따를 당한다. 그녀는 이웃집 부인으로부터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아들과 대화를 하여 풀어보려 하지만 아들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이 갈등의 원인은 겉으로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곳에 있었다. 에이코 자신이 아버지와 벽을 쌓고 있었고 남편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기에 아들과의 단절이 생긴 것이다. 결국 에이코가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과 앙금을 털자 마법처럼 아들과의 갈등도 해소된다. 저자는 이 짧은 글을 통해 “모든 현실은 우리 마음 속을 비추는 거울”이란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마음속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계속 그런 일들만 연이어 일어난다.”라는 것도.

 

 우리는 왜 가난한가? 심화되는 양극화현상으로 그 체감 빈곤 지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단순히 복지의 부족으로 여기거나 모든 책임을 재벌에게만 떠넘기려 한다. 하지만 <2013년 체제 만들기>는 거울의 법칙처럼 그 원인을 내부 깊숙한데서 찾으려고 한다. 바로 87년 체제가 넘지 못한 ‘분단’이라는 우리나라의 상처와 한계가 양극화란 안 좋은 일을 불러온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면서 ‘민주화’로 상징되었던 87년 체제는 그 빛을 잃고 말았다. 표현의 자유는 억압당하고, 국민의 의견도 듣지 않은 법안들이 통과되었다. 이 책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수구 세력의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 국민의 작은 바람-그저 남한만 잘 살면 된다-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단 체제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라는 기득권층의 무기가 있음에도 국민들은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분단 체제 하에서는 기득권에 반발하는 세력을 “빨갱이”로 낙인찍으며 그들의 발언을 저지할 수 있다. ‘내부의 단결을 위해서는 외부의 적을 만들라.’라는 전략을 기득권이 잘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에 비판을 가하다가도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지면 북쪽을 경계하며 기득권에 대한 반발을 접는다. 분단 체제 하에서는 언제 외부에서의 침략이 올지 모르다는 걱정에 비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 백낙청은 이런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2013년 체제로 가기 위한 전략을 내놓았다. 그 첫째는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하는 것이다. 그 기세를 말미암아 대선에서도 박근혜 이외의 인물이 당선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여당을 몰아내기 위해서가 아닌, 수구 세력을 약화하고 통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후, 악화된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인 남북 연합을 추진해야 한다. 모두가 남북 연합을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북 연합은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시동이 걸린 상태였지만 이명박 정부 때에 이르러 모든 것이 포맷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비핵,개방3000’은 포용이 아닌, 남한 측에서의 북한에 대한 일방적 요구였다. 자신들의 체제를 보장받지 못하는 북한 쪽에서는 당연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김대중, 노무현 정책이 이뤄왔던 포용 정책 1.0은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는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포용 정책 2.0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시민참여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한다. 정부는 자신의 기득권이 통일로 위협받을 것을 알기에 통일을 이루는데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민간 기업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남북 연합을 만드는데 있어 나서야 하는 것이다. 남한에서만의 민주화에 만족하는 것이 아닌, 북측도 포함한 민주화에 힘써야 하며 그것이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분단 체제를 비추는 양극화의 해소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결국 양극화로 고통 받는 우리는 통일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통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거울의 법칙>에서의 에이코가 아들과의 갈등이 자신과 아버지의 갈등을 비추는 거울임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제일 첫 걸음인 남북연합이라는 막중한 일을 해낼 수 있을만한 정당에게 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덮고서도 생각해 볼 문제는 남아있다. 일단 국내에서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 연대가 결렬이 되었다. 여당과 야권의 1대 1구도로 맞서려던 계획이 실패했는데 어떻게 야권이 이를 타개할 지가 주목된다. 또한, 국외의 문제로는 중국의 북한 포로 송환 문제이다. 지금 단 한 명의 정치인만이 북한 포로 송환 반대를 위해 싸우고 있다. 북한이 비민주적인 행태를 저지르는 것을 눈감는 것은 결국 남북연합을 저 멀리 떼어놓는 행위인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남한 측의 도발에 북한 측에서 우리 정부를 비방하는 대규모의 군사와 민간인 행진이 있었는데, 이에 무작정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왜 이런 방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라고 한 번 더 생각해보는 태도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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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 2012-03-22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013년 홍익민주주의,홍익경제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함께 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http://cafe.naver.com/hongiksystem/120

http://cafe.naver.com/hongiksystem/126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disc, 일반판)
데이비드 핀처 감독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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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가 아닌, 버튼의 시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리뷰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하기도 전에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그들의 하소연은 한결같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으면 했을텐데.’ 모든 사람은 어려지길 희망한다. 사람들의 그 염원이 모여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람들의 희망을 약간 배반한다. 으레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불로불사의 주인공이 아닌, 죽을 때까지 어려지는 독특한 주인공이다. 그에게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적용된다. 그렇기에 그 역시 인간이다.

 

 

 이 영화는 나이 든 데이지와 그의 딸 캐롤린의 대화와 벤자민 버튼의 삶, 이렇게 두 내용이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시적 내용이었다면 지루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액자식 구성은 데이지와 캐롤린, 그리고 벤자민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며 이 셋이 무슨 관계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내부 액자인 벤자민의 삶은 순차적 구성으로 진행되며 내부 액자의 마지막에는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

 

 영화의 도입부 역시 묘미이다. 내부 액자에 들어가기 전, 1918년 새로 지어진 기차역에 걸린 거꾸로 가는 시계 이야기가 나온다.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제시하여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100%의 허구보다 99%의 허구와 1%의 진실이 섞였을 때 힘을 갖게 되듯이. 어쩌면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 시계 이야기는 사실 벤자민 커튼의 삶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미스터 케토의 거꾸로 가는 시계는 그 당시 1차 세계대전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강한 염원이었다. 사실 쓸모도 없는 시계가 오랜 시간 걸려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염원과 애정 때문이었다. 그 시계가 인간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벤자민이 태어났다. 그것이 비록 친부인 토마스에게 버림받은 그지만 이름은 벤자민(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자)이 된 까닭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가 역에서 내려진 뒤 벤자민이 죽는 장면이나 그것이 바닷물에 잠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벤자민과 시계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왜 하필 벤자민의 성은 ‘버튼’일까? 그의 부친 토마스가 단추 공장을 했기 때문인데 여기서 ‘단추’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지퍼는 옷을 잠그기 위해서는 아래에서 위로 올릴 수밖에 없다. 옷을 채우기 위해 지퍼를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단추는 아래에서부터든, 위에부터든 채우는 순서에 상관없이 옷을 잠글 수 있다. 전자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면 후자는 벤자민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럼에도 지퍼와 단추의 역할은 비슷하다. 바로 옷을 잠근다는 것이다. 이처럼 벤자민이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지막이 오는 그날까지 살아간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육체의 불완전성이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벤자민의 첫 사랑 엘리자베스 에봇은 열 아홉 살 때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너려 했지만 궂은 날씨에 겁을 먹고 포기한다. 죽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육제 때문이었다. 데이지는 노화와 다리 부상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인 춤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건강할 뿐 아니라 젊어지는 육체를 지닌 벤자민의 삶은 완벽할까? 영화의 후반 부분에 데이지와 벤자민의 이런 대사가 있다.

데이지 : 자기는 내가 늙고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사랑할 거야?

벤자민 : 자긴 내가 여드름투성이어도 사랑할 거야? 침대에 오줌을 싸도? 내가 계단 밑을 무서워해도?

벤자민 역시 사람이기에 불완전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데이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나이 들면 갓난아기라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 그뿐 아니라 데이지와 딸 캐롤린에게 든든한 가장이 될 수도 없어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에봇은 열 아홉 살에 포기했던 영국 해협 횡단을 여든의 나이에 결국 해낸다. 데이지는 다시 춤을 출 수는 없게 되었지만 발레 교사로 생을 이어가며 벤자민 역시 가족의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항상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영화 중반의 마이크 선장의 대사처럼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친 개 마냥 미쳐버릴 수도 있고 운명을 탓하며 욕을 퍼부을 수도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아 다가오면 가게 놔둬야만 해.’ 이것이 모든 이의 삶이다. 데이지와 벤자민이 삶의 미련을 내려두고 눈을 감는 것처럼.

 

 죽은 후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이 질문에 대한 키워드는 바로 ‘벌새’이다. 이 영화에서 벌새는 바다 중간에서 혹은 폭풍우를 뚫고 등장한다. 벌새가 살지 않는 지역에 나타나는 점으로 봐서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 답은 술집에서의 마이크 선장의 대사에서 볼 수 있다. 날개 치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담아내면 무한대를 상징하는 8자 모양이라는 대사에서 볼 수 있듯 벌새는 영원을 상징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벤자민의 삶인 거꾸로 가는 시계가 바닷물에 잠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바다 역시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누군가는 어려진다는 점에서 벤자민의 삶을 부러워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삶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런 의견 차이에 따라 벤자민의 삶은 축복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인생을 살든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것은 똑같다. 삶 속에서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 역시도. 벤자민에게 인생은 축복도, 저주도 아닌 그저 삶일 뿐이다. 삶이 고통스럽고, 뭔가를 시작하기에 나이가 많은 것같이 생각하는 우리에게 영화는 이렇게 말해준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그것 역시 삶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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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변 세계문학의 숲 1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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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은 라쇼몽이란 책 안에 들어있는 단편 중 하나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은 왠지 먼 옛날 일본에 있었던 민담을 재현한 듯한 기분이 든다. 대다수의 단편들이 그가 살았던 시대가 아닌 옛날에 배경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쇼몽'이나 '용' 같은 다른 단편들도 많았으나 '지옥변'이란 소설이 가장 인상이 깊었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소설인 '광염 소나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제 3인칭 서술자가 독자인 우리들에게 직접 들려주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아마 이 서술자는 이 소설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오토노사마의 하인 중 하나로 추측되는데 그래서인지 그 주관적인 생각이 소설의 일부가 되어 우리는 진실을 알아내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오토노사마가 요시히데의 딸을 사모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서술자는 이를 단호히 부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왜 하필 요시히데의 딸을 비참하게 죽게 했느냐는 점에서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 대한 복수'이다 라는 소문도 억지라고 주장하는데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의 오토노사마에 대한 충성심이 그의 눈을 멀게 했는지는 독자의 추측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충성심이 강한 서술자의 주인인 '오토노사마'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괴짜 화가인 '요시히데'와 오토노사마의 밑에서 일했던 요시히데의 딸과 원숭이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빙빙 돌다가 드디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옥변'은 괴짜 화가 '요시히데'가 그린 지옥을 나타낸 최고의 그림이다. 서술자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치 그것의 중심인 듯한 불에 타는 마차에 타고 있는 여인 그림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옥변'의 주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요시히데는 지옥변이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형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 많은 제자들을 괴로움에 겪게 한다. 나는 이것까지는 요시히데의 리얼리즘을 높게 생각했고 우리나라의 진경 산수화를 추구했던 이들과 맞먹지 않을까까지 생각했었다. 그리고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추악한 것을 담아내는 것이란 광기어린 그의 예술에 대한 시선까지도 멋있게 여겼다. (사실 나도 예술은 광기의 표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불에 타는 마차와 여인을 그리기 위해 남의 죽음을 요구한데서 시작된다. 이에 오토노사마는 요시히데의 딸을 불에 타는 마차에 태워 보냄으로서 응답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묘사가 걸작이다. 이 장면에 대한 묘사는 처참하면서도 화려하다. 비극적인 장면인데 화려하다니.. 어찌보면 아이러니하지만 마차에 타고 있던 요시히데의 딸의 모습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불에 타는 마차에서조차 아름답게 묘사되어 독자인 나조차 숨막히게 했으니.. 그 정경에 처음에는 울부짖던 요시히데조차도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느라 바쁠 정도였다. 그 비정한 부정 아래 그림은 완성되었고 그를 욕하던 사람들조차 그림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요시히데는 결국 다음 날 자살하고 말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소설 '광염 소나타'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인공의 광기와 소설 자체를 태울 듯한 불길 때문이기도 했고 주제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비록 광염 소나타는 음악에 관한 것이지만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나에게 묻는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인간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 교수가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의대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단다.

 "어떤 아기가 엄마 뱃 속에 있는데 이 아기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며 아기는 유전적으로 간질을 앓고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될 확률도 높습니다. 이 아기를 낳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낙태시키는 것이 좋을까요?"

 많은 학생들이 외쳤다. "낙태해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네, 여러분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약간은 뜬금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 역시 두 소설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는 너무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예술계에서의 판도를 바꿔놓은 베토벤. 나는 그야말로 인간과 예술의 투쟁에서 결국은 예술이 승리한 산 증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을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지옥변'과 '광염 소나타'는 얼핏 보기에 그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둘 다 인간을 죽이면서까지 엄청난 예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변'의 요시히데는 자살하고 '광염소나타'의 백성수는 정신 병원에 갇히고 만다. 이 결말들은 결국 인간을 죽이면서까지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것 아닐까?

 

 지금은 예술과 인간의 대결보다도 과학과 인간의 대결이 더 깊어지고 있다. 똑같은 전제에서 예술을 과학으로 바꾼 대결이 이런저런 이슈화가 되고 있다. '지옥변'에 대한 약간은 횡설수설했던 리뷰를 마치면서 끝으로 '아일랜드'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위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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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하성란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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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속 역겨움>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와 ‘해피트리프렌즈’ 엮어 읽기-

 

 

 유럽에 열지 말라는 방문을 연 자신의 아내들을 죽인 푸른 수염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 금지된 방에 있던 것은 예전에 방문을 열었던 처들의 시신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방이 시신으로 덮이기 전인, 푸른 수염의 첫 아내는 왜 죽음을 당한 걸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하성란의 소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도대체 나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녀는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것이었을까.

 

 

 요새 미디어 매체들은 잔인해질수록 호응을 얻는 추세이다. 너무 노골적으로 야한 미디어에는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리얼하게 묘사된 폭력에는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그 예로 원빈의 출연에 힘입어 엄청난 흥행을 누렸던 <아저씨>가 있다. 이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는 지금 이 글에 있어 중요치 않다. 우리의 목적은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풀기에 앞서 사람들이 왜 고어 물에 열광하는지는 짚고 넘어가보자.

 

 첫째는 쾌락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왕성한 리비도를 억제하는 것이 역겨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잔인한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 역겨움마저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인다. 아마 내 생각에, 교활한 성 본능이 자신을 억제하려는 감정마저 자신을 위한 감정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폭력 매체나 고어물 시청에 있어서 눈이 생식기의 역할을 대신한다. 앞서 말했지만 고어물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역겨움은 생식기로 향하는 리비도를 막는다. 그렇다면 이 리비도가 소멸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 리비도는 시각으로 후퇴하여 눈을 성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이때부터 잔인한 영상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순간, 컴퓨터 모니터는 영상에서 학대당하는 대상과 보는 대상의 관계를 단절하는 대상이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렇듯이 연민이라는 분별력의 결여가 성적 본성을 이루고 있는 잔인성과 성욕을 연결시켜 준다. 이런 합일로 고어물을 보면서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성적 본능은 가학적 측면과 피학적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어물이나 폭력 매체만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것도 드물 것이다. 비록 모니터가 차단시켜 주는 것 같지만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몰입하는 대상은 다발적이다. 우리는 폭력을 가하는 상대에도, 당하는 상대에도 몰입한다. 피해자의 학대 장면을 보는 행위는 다분히 가학적이지만 그 피해자의 고통 어린 장면에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것은 피학적이다.

 

 둘째는 일종의 허세이다. 야한 포르노를 밥 먹으면서 본다고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드물다.(여기서 공공연한 장소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잔인한 영화를 라면이나 닭다리를 먹으면서 봤다며 자신의 강한 비위를 드러내는 사람은 상당수 존재한다. 이 경우 그들은 은연 중 뿌듯함과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자신에게 있어서 그런 잔인한 장면은 시시한 것이며 그런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라는 듯. 그런데 사실상 이들 중 대다수는 원래 그런 고어물에 끔찍한 공포를 느꼈었을 확률이 높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공포에 시달리던 사람이 몇 번 그런 매체에 맞닥뜨리니 상상보다 실제 영상이 시시했다는 기억이 남아 자기 자신에게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항상 상상은 직접 보여지는 실제보다 공포스럽다. 정성일 씨의 글에도 “모든 이미지는 보여질 때 무력해진다.”라는 문장이 있다. 사람들은 그 무력해진 이미지에 안도감과 시시함을 느끼면서 공포보다 자신이 우월해진 느낌을 즐긴다.

 

 

 그런 고어 물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어떨까? <해피트리프렌즈>라는 미국의 블랙 코미디가 그렇다. 매우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 아기자기한 동화를 꾸며나가다 어느 순간 끔찍한 잔혹 동화로 변한다. 뇌수가 뿜어 나오고 눈알이 도려지는 것은 기본이다. 그 충격을 한 번 맛본 시청자들은 평화로운 장면에서도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하성란의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의 감정도 <해피트리프렌즈>의 시청자들의 감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녀에게 펼쳐진 풍경은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풍경과 햇살이 가득 찬 하얀색 페인트칠이 된 목조 건물이다. 마치 <해피트리프렌즈>의 잔혹한 살인이 일어나기 전의 풍경과 유사하다. 그러나 화자 역시 잔혹물의 전조를 읽듯 자신을 둘러싼 풍경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그런 전조는 여지없이 제 1차 충격을 가한다. <해피트리프렌즈>에서 끔찍한 살육 장면이 펼쳐지고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는 오클랜드에서 제이슨과 챙을 목격한다. 그런 1차 충격 후에 <해피트리프렌즈>의 시청자는 동영상을 잽싸게 꺼버리고 다른 일에 매진하며 그 기억을 잊으려 할 것이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 역시 그 일을 제이슨에게 묻지 않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챙에게 짐을 맡긴다. 이들에게 아무런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가는 것만 같다. 그 와중에 저항도 해 본다. 그러나 잠재된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기에는 너무도 무력하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진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가지다. 충격의 이미지를 상상 속에서 꺼내어 눈앞에서 발가벗기는 것이다. 아름다운 집안 풍경이나 평화로운 동영상 썸네일 속의 역겨운 장면을 눈앞에 끄집어 내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는 “노크도 없이” 열지 말라 주의를 받았던 제이슨의 방문을 밀어젖히고 시청자들 역시 검색창에 해피트리프렌즈를 치고 만다. 그들의 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생각보다 시시한 장면이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는 그 장면을 덤덤히 서술한다. 충격이 배제된 서술이다. <해피트리프렌즈>의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 감정이다. 그들은 무력화된 이미지로 인해 공포보다 우월해졌다는 만족감까지 얻는다. 또한, 앞서 말했던 가학적·피학적 욕망까지도 채울 수 있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에서의 화자 역시 고어물을 보는 사람의 심리와 유사한데, 보는 행위는 제이슨과 그 상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가학적 행위이지만, 남편의 외도-그것도 동성애-를 보는 행위는 그녀에게 상처를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맨 처음의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녀의 잘못은 제이슨의 외도 장면을 봤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아름다움 속의 역겨움을 눈앞으로 끌어 올렸다는 것이다. 현실에 일어나는 공포를 아무런 대책 없이 무력화 시키려 했던 것이 그녀의 잘못이었다. 이렇게 답은 나왔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점검해야만 할 것이다.

“과연 내가 잘못을 저지르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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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오름 2012-03-09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 소설이로군요. 우연찮게 만나게 된 하성란 작가님의 작품은 잔잔한 필치로 상당히 예리하게 긋고 가는 느낌이 있어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고 그 당시에는 아직 공공연하게 얘기되지 않던 동성애를 소재로 했던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깜씨 2012-03-27 13: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도 하성란 작가님 작품을 수업 듣다가 교수님 추천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예리한데 숨겨진 예리함이 마음에 들었어요. 문장 중간마다 사소한 장치들이 있던 걸 몇 번 읽고 나서 발견하니 전율이 쫙-!
 
사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정민 교수님께서 꼭 읽어 보라고 했던 소설이 여러 권 있었다.

 사실 내 취향은 '감염 경로'였지만 (나는 바이러스와 병에 대한 책을 즐겨 읽으므로.. 그래서 '살인 단백질 이야기'도 즐겨 읽었다.) 그 책은 구할 수 없었고 덕분에 '사양'을 택하게 되었다. 사실 이 제목이 뭘 뜻하는 걸까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기우는 태양이었다. 제목부터가 딱 일본 소설의 느낌이었다.

 

 정민 교수님께서 이 소설은 일본의 특징적 정서인 '모노노 아와레'가 잘 느껴지는 소설이라고 하셨다. (모노노 아와레는 시들어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동경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한'과는 구분되는 성질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 못했다. 하지만 사양을 보다 보니 그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먼저, 가즈코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황족의 후예인 어머니는 무척이나 병약한 미망인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가즈코가 바라보는 어머니는 가녀리면서도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에 반해 육체 노동을 하면서 건강해지는 자신은 못생기고 천하다고 여긴다. 이것을 보면서 바로 옆 나라인데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심리적 간격이 꽤 크다는 것을 절감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서는 '한'이다. '한'과 '모노노 아와레'는 슬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둘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노노 아와레'는 단순히 동경으로 끝날 뿐이지만 '한'은 삶의 뿌리가 되고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이 작품에서 가즈코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우에하라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모노노 아와레'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그저 '모노노 아와레'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이 작품이 유명해지지는 않았으리라. 소설 전반에는 '모노노 아와레'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내용 진행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나오지의 귀환으로 그 정서는 조금씩 옅어진다. 가즈코는 나오지의 일기를 보며 나오지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우에하라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사랑과 혁명이야말로 삶의 이유이다'라고 노래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에하라의 아이를 잉태하고자 한다. 이런 가즈코의 적극적 자세는 동생 나오지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가즈코가 자신의 족쇄와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려 하면서 우에하라와 사랑을 나누는데 비해 나오지는 결국 핏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따돌림을 당한다고 느끼며 그 괴로움에 마약에 빠지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사실 나오지야말로 작가 오사무의 분신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죽고 마니까 사실 오사무 역시 어떤 패배의식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양'은 패전 이후 격동하는 일본 시대 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시대 젊은이들의 혼란.. 그런데 읽다보니 왜 무라카미 류의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둘 다 격동하는 시대의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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