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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disc, 일반판)
데이비드 핀처 감독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지퍼가 아닌, 버튼의 시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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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하기도 전에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그들의 하소연은 한결같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으면 했을텐데.’ 모든 사람은 어려지길 희망한다. 사람들의 그 염원이 모여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람들의 희망을 약간 배반한다. 으레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불로불사의 주인공이 아닌, 죽을 때까지 어려지는 독특한 주인공이다. 그에게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적용된다. 그렇기에 그 역시 인간이다.
이 영화는 나이 든 데이지와 그의 딸 캐롤린의 대화와 벤자민 버튼의 삶, 이렇게 두 내용이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시적 내용이었다면 지루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액자식 구성은 데이지와 캐롤린, 그리고 벤자민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며 이 셋이 무슨 관계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내부 액자인 벤자민의 삶은 순차적 구성으로 진행되며 내부 액자의 마지막에는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
영화의 도입부 역시 묘미이다. 내부 액자에 들어가기 전, 1918년 새로 지어진 기차역에 걸린 거꾸로 가는 시계 이야기가 나온다.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제시하여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100%의 허구보다 99%의 허구와 1%의 진실이 섞였을 때 힘을 갖게 되듯이. 어쩌면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 시계 이야기는 사실 벤자민 커튼의 삶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미스터 케토의 거꾸로 가는 시계는 그 당시 1차 세계대전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강한 염원이었다. 사실 쓸모도 없는 시계가 오랜 시간 걸려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염원과 애정 때문이었다. 그 시계가 인간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벤자민이 태어났다. 그것이 비록 친부인 토마스에게 버림받은 그지만 이름은 벤자민(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자)이 된 까닭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가 역에서 내려진 뒤 벤자민이 죽는 장면이나 그것이 바닷물에 잠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벤자민과 시계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왜 하필 벤자민의 성은 ‘버튼’일까? 그의 부친 토마스가 단추 공장을 했기 때문인데 여기서 ‘단추’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지퍼는 옷을 잠그기 위해서는 아래에서 위로 올릴 수밖에 없다. 옷을 채우기 위해 지퍼를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단추는 아래에서부터든, 위에부터든 채우는 순서에 상관없이 옷을 잠글 수 있다. 전자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면 후자는 벤자민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럼에도 지퍼와 단추의 역할은 비슷하다. 바로 옷을 잠근다는 것이다. 이처럼 벤자민이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지막이 오는 그날까지 살아간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육체의 불완전성이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벤자민의 첫 사랑 엘리자베스 에봇은 열 아홉 살 때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너려 했지만 궂은 날씨에 겁을 먹고 포기한다. 죽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육제 때문이었다. 데이지는 노화와 다리 부상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인 춤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건강할 뿐 아니라 젊어지는 육체를 지닌 벤자민의 삶은 완벽할까? 영화의 후반 부분에 데이지와 벤자민의 이런 대사가 있다.
데이지 : 자기는 내가 늙고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사랑할 거야?
벤자민 : 자긴 내가 여드름투성이어도 사랑할 거야? 침대에 오줌을 싸도? 내가 계단 밑을 무서워해도?
벤자민 역시 사람이기에 불완전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데이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나이 들면 갓난아기라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 그뿐 아니라 데이지와 딸 캐롤린에게 든든한 가장이 될 수도 없어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에봇은 열 아홉 살에 포기했던 영국 해협 횡단을 여든의 나이에 결국 해낸다. 데이지는 다시 춤을 출 수는 없게 되었지만 발레 교사로 생을 이어가며 벤자민 역시 가족의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항상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영화 중반의 마이크 선장의 대사처럼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친 개 마냥 미쳐버릴 수도 있고 운명을 탓하며 욕을 퍼부을 수도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아 다가오면 가게 놔둬야만 해.’ 이것이 모든 이의 삶이다. 데이지와 벤자민이 삶의 미련을 내려두고 눈을 감는 것처럼.
죽은 후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이 질문에 대한 키워드는 바로 ‘벌새’이다. 이 영화에서 벌새는 바다 중간에서 혹은 폭풍우를 뚫고 등장한다. 벌새가 살지 않는 지역에 나타나는 점으로 봐서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 답은 술집에서의 마이크 선장의 대사에서 볼 수 있다. 날개 치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담아내면 무한대를 상징하는 8자 모양이라는 대사에서 볼 수 있듯 벌새는 영원을 상징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벤자민의 삶인 거꾸로 가는 시계가 바닷물에 잠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바다 역시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누군가는 어려진다는 점에서 벤자민의 삶을 부러워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삶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런 의견 차이에 따라 벤자민의 삶은 축복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인생을 살든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것은 똑같다. 삶 속에서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 역시도. 벤자민에게 인생은 축복도, 저주도 아닌 그저 삶일 뿐이다. 삶이 고통스럽고, 뭔가를 시작하기에 나이가 많은 것같이 생각하는 우리에게 영화는 이렇게 말해준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그것 역시 삶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