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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ㅣ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정민 교수님께서 꼭 읽어 보라고 했던 소설이 여러 권 있었다.
사실 내 취향은 '감염 경로'였지만 (나는 바이러스와 병에 대한 책을 즐겨 읽으므로.. 그래서 '살인 단백질 이야기'도 즐겨 읽었다.) 그 책은 구할 수 없었고 덕분에 '사양'을 택하게 되었다. 사실 이 제목이 뭘 뜻하는 걸까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기우는 태양이었다. 제목부터가 딱 일본 소설의 느낌이었다.
정민 교수님께서 이 소설은 일본의 특징적 정서인 '모노노 아와레'가 잘 느껴지는 소설이라고 하셨다. (모노노 아와레는 시들어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동경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한'과는 구분되는 성질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 못했다. 하지만 사양을 보다 보니 그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먼저, 가즈코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황족의 후예인 어머니는 무척이나 병약한 미망인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가즈코가 바라보는 어머니는 가녀리면서도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에 반해 육체 노동을 하면서 건강해지는 자신은 못생기고 천하다고 여긴다. 이것을 보면서 바로 옆 나라인데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심리적 간격이 꽤 크다는 것을 절감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서는 '한'이다. '한'과 '모노노 아와레'는 슬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둘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노노 아와레'는 단순히 동경으로 끝날 뿐이지만 '한'은 삶의 뿌리가 되고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이 작품에서 가즈코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우에하라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모노노 아와레'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그저 '모노노 아와레'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이 작품이 유명해지지는 않았으리라. 소설 전반에는 '모노노 아와레'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내용 진행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나오지의 귀환으로 그 정서는 조금씩 옅어진다. 가즈코는 나오지의 일기를 보며 나오지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우에하라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사랑과 혁명이야말로 삶의 이유이다'라고 노래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에하라의 아이를 잉태하고자 한다. 이런 가즈코의 적극적 자세는 동생 나오지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가즈코가 자신의 족쇄와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려 하면서 우에하라와 사랑을 나누는데 비해 나오지는 결국 핏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따돌림을 당한다고 느끼며 그 괴로움에 마약에 빠지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사실 나오지야말로 작가 오사무의 분신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죽고 마니까 사실 오사무 역시 어떤 패배의식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양'은 패전 이후 격동하는 일본 시대 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시대 젊은이들의 혼란.. 그런데 읽다보니 왜 무라카미 류의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둘 다 격동하는 시대의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