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변 세계문학의 숲 1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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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은 라쇼몽이란 책 안에 들어있는 단편 중 하나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은 왠지 먼 옛날 일본에 있었던 민담을 재현한 듯한 기분이 든다. 대다수의 단편들이 그가 살았던 시대가 아닌 옛날에 배경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쇼몽'이나 '용' 같은 다른 단편들도 많았으나 '지옥변'이란 소설이 가장 인상이 깊었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소설인 '광염 소나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제 3인칭 서술자가 독자인 우리들에게 직접 들려주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아마 이 서술자는 이 소설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오토노사마의 하인 중 하나로 추측되는데 그래서인지 그 주관적인 생각이 소설의 일부가 되어 우리는 진실을 알아내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오토노사마가 요시히데의 딸을 사모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서술자는 이를 단호히 부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왜 하필 요시히데의 딸을 비참하게 죽게 했느냐는 점에서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 대한 복수'이다 라는 소문도 억지라고 주장하는데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의 오토노사마에 대한 충성심이 그의 눈을 멀게 했는지는 독자의 추측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충성심이 강한 서술자의 주인인 '오토노사마'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괴짜 화가인 '요시히데'와 오토노사마의 밑에서 일했던 요시히데의 딸과 원숭이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빙빙 돌다가 드디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옥변'은 괴짜 화가 '요시히데'가 그린 지옥을 나타낸 최고의 그림이다. 서술자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치 그것의 중심인 듯한 불에 타는 마차에 타고 있는 여인 그림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옥변'의 주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요시히데는 지옥변이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형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 많은 제자들을 괴로움에 겪게 한다. 나는 이것까지는 요시히데의 리얼리즘을 높게 생각했고 우리나라의 진경 산수화를 추구했던 이들과 맞먹지 않을까까지 생각했었다. 그리고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추악한 것을 담아내는 것이란 광기어린 그의 예술에 대한 시선까지도 멋있게 여겼다. (사실 나도 예술은 광기의 표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불에 타는 마차와 여인을 그리기 위해 남의 죽음을 요구한데서 시작된다. 이에 오토노사마는 요시히데의 딸을 불에 타는 마차에 태워 보냄으로서 응답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묘사가 걸작이다. 이 장면에 대한 묘사는 처참하면서도 화려하다. 비극적인 장면인데 화려하다니.. 어찌보면 아이러니하지만 마차에 타고 있던 요시히데의 딸의 모습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불에 타는 마차에서조차 아름답게 묘사되어 독자인 나조차 숨막히게 했으니.. 그 정경에 처음에는 울부짖던 요시히데조차도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느라 바쁠 정도였다. 그 비정한 부정 아래 그림은 완성되었고 그를 욕하던 사람들조차 그림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요시히데는 결국 다음 날 자살하고 말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소설 '광염 소나타'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인공의 광기와 소설 자체를 태울 듯한 불길 때문이기도 했고 주제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비록 광염 소나타는 음악에 관한 것이지만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나에게 묻는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인간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 교수가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의대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단다.

 "어떤 아기가 엄마 뱃 속에 있는데 이 아기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며 아기는 유전적으로 간질을 앓고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될 확률도 높습니다. 이 아기를 낳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낙태시키는 것이 좋을까요?"

 많은 학생들이 외쳤다. "낙태해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네, 여러분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약간은 뜬금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 역시 두 소설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는 너무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예술계에서의 판도를 바꿔놓은 베토벤. 나는 그야말로 인간과 예술의 투쟁에서 결국은 예술이 승리한 산 증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을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지옥변'과 '광염 소나타'는 얼핏 보기에 그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둘 다 인간을 죽이면서까지 엄청난 예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변'의 요시히데는 자살하고 '광염소나타'의 백성수는 정신 병원에 갇히고 만다. 이 결말들은 결국 인간을 죽이면서까지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것 아닐까?

 

 지금은 예술과 인간의 대결보다도 과학과 인간의 대결이 더 깊어지고 있다. 똑같은 전제에서 예술을 과학으로 바꾼 대결이 이런저런 이슈화가 되고 있다. '지옥변'에 대한 약간은 횡설수설했던 리뷰를 마치면서 끝으로 '아일랜드'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위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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