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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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줄 모르고 쉼 없이 터져나오는 이야기의 연속, 영화와 같이 연상되는 생생한 이미지 묘사, 판소리처럼 착착 감기는 맛이 일품인 만연체 문장들, 이 소설의 특징을 몇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작가 천명관은 이 작품 하나로 한국소설계에 분명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이 작품은 요즘의 현대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거대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더 이상 거대 서사를 요구하지 않고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표현하거나, 상징성이 짙은 장치들을 새로이 재배치하거나,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어떠한 고도의 상징성이나 자잘한 일상의 요소도 부각되지 않는다. 각 인물들은 내면의 심리에 얽매이지 않고 욕망을 외부에 적극적으로 투사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갖는다. 금복에서부터 춘희까지 이대에 걸쳐 진행되는 장대한 이야기는 화자의 거친 입담과 함께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농담처럼 진행된다. 판소리꾼의 걸출한 '입담과 구라'가 인물의 행동과 성격을 결정하면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식이다.

 

물론 이 소설이 전통적인 거대 서사와 똑같은 구조라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는 역사적 현실성,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한국 근대사의 어떤 지점을 관통하는 듯 보이지만 이들의 행동 동기나 반경에서 역사는 단지 '배경' 역할에 머무를 뿐이다. 때로는 역사적 현실성과는 무관하게 작가 특유의 취향이 묻어나는 이국적 장면들이 불쑥 등장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시대가 제약하는 어떤 전통적인 역할에 고정되지 않고 거침 없이 자신의 일대기와 사랑을 그려나간다. 이런 요소들은 이 소설이 기존의 거대 서사의 제약을 훌쩍 뛰어넘어 판타지나 무협지, SF 소설에 훨씬 가깝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장점이 단지 허구를 마음껏 조리하는 '이야기'에 그친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각 인물들은 분명 시대적인 대표성을 갖고 있으며, 이들의 행동은 사회구조의 현실적인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대인 금복과 탈근대인 춘희가 보여주는 대표성은 이 소설에서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소설의 주제의식까지 드러낸다. 그야말로 가장 역동적인 활극을 보여주는 근대인 금복은 하나의 성격만을 지닌 인물로서 제한되지 않고 여러 근대인들의 초상을 집약하고 압축해놓은 듯한 행동을 펼쳐 보인다. 반대로 탈근대인 춘희는 말을 못하는 벙어리이지만 동물 점보와 소통할 줄 알며 어떠한 근대성의 유산도 물려받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혼자서 체제 바깥의 삶을 유지해나가려 한다. 두 인물은 서로 어떠한 대립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 소설은 애써 춘희의 삶에 낭만적인 외피를 덧붙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하지만, 금복에서 춘희로의 이행은 사실상 근대성의 극복이 아닌 근대성 외부로의 탈피에 불과하다.

 

춘희의 비극적인 삶은 근대성 '탈피'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몸소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작가는 그것을 마치 '대안적 삶'처럼 묘사한다 할지라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허구적 거대 서사는 분명 그렇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결말로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근대성,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 현실로서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거리들을 안겨다 준다. 결국 춘희는 답이 아닌 또 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남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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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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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이라고 규정하는 유시민 씨가 나름의 입장에서 정리하여 바라본 한국현대사 이야기. 이 책은 정치에 직접 몸을 담궜던 자유주의 지식인으로서 그의 입장과 체험이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는 역사서이다. 

 

한국현대사를 1차적으로는 시대적인 특성에 따라 분류하고, 2차적으로는 경제사 및 정치사·사회문화사를 분류하여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상당히 교과서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개인적인 체험사 및 미시사와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한 거시사를 잘 버무려 서술한 것도 이 책의 돋보이는 점이다. 동시에 이 책은 역사 해석을 둘러싼 여러 정파적 논쟁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역사가 자신의 관점을 바로 세우고, 또 독자들에게 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자 한다. 이런 점들은 훌륭한 역사서가 갖는 분명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저자의 자유주의적 정치 성향이 갖는 역사서술의 한계 또한 지적하고 싶다. 그는 독재정권 시절에 정치적인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시대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는 훌륭했지만, 자신이 지지하던 세력이 집권했던 시절에 대해서는 보다 올바르고 공정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거나 회피하고 있다.

 

그가 특히 불공정한 태도를 보여주는 챕터는 '제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부분이다. 그는 '독재정권은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민주정권은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존의 통념에 대해 실증적 증거(경제성장률 궤적)를 바탕으로 반박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가난한 한국경제를 이륙·성장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113p)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경제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는 식으로 역사를 정리하는데, 이는 대중들이 민주정권 시절에 체감했던 구조적 경제위기의 심각성, 즉 경제적 양극화 및 노동의 비정규직화를 애써 부정하려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정권은 사실상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산업정책을 포기하고 IMF 이후 도입된 저성장 국면의 금융화 정책만 추진했기 때문에, 순전히 표면적인 경제성장률만을 중심으로 민주정권을 변호하려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모순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민주정권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세계경제의 '대세'로 받아들이면서 김대중 정권의 IMF 탈출을 옹호하는 방식의 서술도 공정하지 못하다. IMF 이후 김대중 정권이 도입한 정리해고, 민영화, 세계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은 한국경제의 대외종속적인 성격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국민경제의 자율성을 침해시키고 국가의 재분배 및 사회복지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등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물론 저자가 민주정권 시기에 발생한 여러 경제적 문제들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의 결과들을 묘사하는 데만 그치고 있지, 이러한 위기들을 불러온 원인에 대해서는 애써 함구하고 있다. 즉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지금껏 펼쳤던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대중에게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지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보다 발본적인 평가가 시급한 요즘, 나는 현대사를 서술하는 관점에 있어서도 기존의 '독재정권VS민주화정권'의 대립적인 시각 또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시민 씨는 지금까지의 역사전쟁에는 두 가지 부류의 분명한 주체가 있었다면서, 하나는 5.16과 산업화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다른 하나는 4.19와 5.18과 민주화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나눈다. 하지만 나는 정치적인 민주화를 달성한 이후 시대에는 보다 급진적으로 사회운동·노동운동을 펼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들은 단순히 정치적인 민주화에 그치지 않고 경제적인 민주화를 달성하는 데에도 목소리를 높인다. 또한 이들은 개발독재정권과 민주정권, 보수정권 등 어느 시기에도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노동운동을 새로이 복원시키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하는 데 관심을 둔다. 보수정권과 민주정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기존의 양당 중심의 정치구조를 깨고, 노동대중의 빈곤한 삶을 보다 획기적으로 전환시켜줄 새로운 진보적 정치세력. 나는 이들의 시각에서 쓰인 한국현대사도 많이 출간되어서, 한국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보다 생산적이고 활발한 논쟁이 많이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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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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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 책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쫓아 노예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문명사회를 비판하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단순히 관념적인 읊조림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숲 속에서 어떤 생활을 펼쳐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실천적인 설득력까지 갖춘다. 대표적으로 1장 '숲 생활의 경제학' 부분에서 저자는 인간이 문명의 혜택을 얻지 않고서도 기본적인 의식주의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자신이 숲 속에서 개척한 '야생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그는 하루에 한 끼 정도만 배불리 먹어도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공장에서 몇백시간을 노동하여 겨우 집 살 돈을 마련하는 문명인들의 삶을 비판하며 차라리 자연의 재료를 가지고 자신이 직접 집을 지어볼 것을 권유한다. 그는 인간이 우매한 시각에 갖혀서 문명의 습속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며, 삶과 사물을 꿰뚫어볼 수 있는 자연주의의 통찰력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가 실천적으로 제시하는 자연주의적 삶의 모범은 결국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삶에 대한 예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문명이 건설되는 과정은 굉장히 파괴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에게 '물신'에 대한 욕망을 재구조화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자연주의자들은 기존의 인습과 제도를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헛된 욕망을 부추기며 환경을 제멋대로 헤치는 문명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며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지금도 이른바 채식주의자들이나 생태주의자들은 이와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도 등지에서는 이미 많은 햏자(!)들이 이러한 자연주의적 삶을 소로우보다도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다. 거의 초인에 가까운 고행과 수행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들 자연주의자들의 문명에 대한 비판은 몇 가지 점에서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이들이 겨냥하는 '문명'이라는 대상에 대한 보다 엄격한 개념정의가 필요하다. 이들은 사실상 문명을 '물질적 풍요'라고 협소하게 정의하고서 그 자체에 대한 '거부'를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은 고도의 분업화 과정과 기술발전을 통한 노동생산성의 증가 및 노동시간의 감소와, 이로부터 비롯된 물질적 풍요가 인류에게 선사한 일정한 진보적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문명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사고가 부족하다. 단지 팍팍한 문명사회에 대한 개별적인 '탈출구''자연'이라는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의 이러한 사고는 대안적인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저자 소로우 또한 개별적으로나 자연주의적 삶을 실천하고 있을 따름이지, 공동체나 사회를 어떻게 새롭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개인적인 '고독'을 찬양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경제학적인 말로 '노동생산물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그가 '국가'라는 기구가 갖는 사회적 재분배의 기능은 외면한 채 '납세거부운동''시민불복종 운동'을 전개한 것도, 바로 '사회'를 사고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국가의 재분배 기능을 인정하지 않고 '납세거부운동'을 펼치는 자들은 대부분 금융자산가들 및 부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계급'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저자 소로우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은 줄곧 늘어놓지만 정작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노동자들이 힘겹게 노동시간을 투여해서 겨우 번 돈으로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체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지적하지 않은 채, 그들이 물질적 욕망의 안일한 포로가 되었다고 설교나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프레임 뒤에 숨어서 정작 계급적인 체제가 만들어낸 불합리한 모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비판방식은 오늘날에도 여러 진보매체들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이야기하는 방식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같은 자연주의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이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사회를 구상하지 않고 '체제 외부로의 탈출'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307212131165&code=990100

-얼마 전 논란을 일으킨 강신주 선생의 경향신문 칼럼. 그는 자본주의 문명의 상징인 냉장고를 내다버리는 것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실천이라고 강변한다. 강신주의 논리도 자연주의자들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주장에 대한 네티즌들의 실소 및 풍자가 인터넷에서 무수히 이어진 적이 있다.

 

마르크스는 생태계와 문명사회 간의 '신진대사의 교류'라는 개념을 통하여, 문명사회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주목하였다. 그는 단순히 문명사회에 반대하여 자연주의적 삶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계급적 체제가 어떻게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균열시키고 파괴하는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사적 자본에 의해 독점적으로 소유·관리되는 생태계의 자원들을 인류의 생존을 위한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공동소유로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자, 여러분께서는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문명을 아래로부터 '변혁'하는 삶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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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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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자연적인 서열이 있다네. 그리고 그 서열을 뒤집으려는 자들은 좋게 끝나지 않아. 이 운동은 절대 성공 못해. 너네가 그들과 함께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 가족 모두를 기피할거야. 그렇게 침 맞고 폭행당하며 왕따로 살던가 최악의 경우에는 맞아 죽던가 십자가에 못 박힐 거야. 뭘 위해 그러는데? 뭘 얻으려고? 자네가 뭘 하든 무한한 바다 속의 물방울 하나보다 못한 일이 될 거야."

"...바다는 수많은 물방울들의 집합 아닌가요?"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중에서

 

“파울 클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의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바라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339쪽.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작년 초에 개봉할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대작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작품이기도 했다. 장황한 스토리와 알쏭달쏭한 교차편집, 경전을 읽는 듯한 메시지의 남발은 대중들에게 그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화법은 아니었다. 평론가들도 말끔하지 못한 이 영화의 플롯에 실망하며 점수를 짜게 줬다. 그러나 화법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인간의 역사와 진보에 대한 하나의 진실을 전달해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만하다.

 

이 영화는 불교의 카르마(karma), 즉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시공간이 다른 여섯 개의 에피소드를 퍼즐 조각과 같이 엮은 것이라고 소개되곤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단순히 환생과 업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윤회사상에서는 인간 세상의 어떤 구조에 대한 설명 없이 순전히 개인들의 선행과 악행에 따른 환생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 사상에는 구조적 모순에 의해 덧씌워진 운명의 굴레에 대해 개인이 저항할만한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종으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내 전생의 업보에 의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한 개별적 업보의 사상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세상의 어떤 구조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환생에도 일종의 계보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윤회사상과는 다른 면이 있다. 그 구조란 바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인간을 착취하거나 멸시하는 태도이며, 그 계보란 바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역사이다. 전혀 다른 이야기인 듯한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엮이기 위한 환생의 고리는 바로 이 구조와 계보의 역사에서부터 비롯된다.

 

 

-배우들에게 온갖 '분장쇼'를 시키면서까지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구조적으로 얽혀진 계급적 계보의 역사이다.

(이미지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page=1&st=nickname&sword=2850724&nid=2850724)

 

그러한 점에서 나는 이 영화를 역사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주창한 바 있는 '혁명적 메시아주의'의 관점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역사적 유물론을 '신학'과 결부시켜 기획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종교를 혐오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사이비 철학일 뿐이었다. 또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란 끊임없이 진보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서부터 탄생한 사민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의 타협을 통해서 역사의 진보를 맞이할 수 있노라고 설파하였다. 그들은 폭력적인 혁명을 통한 체제전복은 이제 더이상 효력이 없으며, 오직 체제와의 양보와 타협을 통해서만 세상은 조금씩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있어서 그러한 진보는 역사의 '가상'일 뿐이었다. 벤야민은 역사가 단선적으로 조금씩 발전할 수 있다는 기존의 가상들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이 직면한 현대의 위기 상황을 깨우치게 하려 했다. 그는 '계급 없는 사회'란 역사의 진보가 도달해야 할 최종의 목적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진보의 '중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356쪽.

 

그는 이 '비상 브레이크'를 거는 행동을 파괴적인 '메시아적 행동'이라고 일컫는다. 이 메시아적 행동은 노동자계급이 불현듯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어떤 거대한 환상으로 일축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메시아란 단순히 노동자계급이 사회를 구원하는 '주체'로서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로서 울려퍼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기존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공유하고 있던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 아닌, 진보의 가상에 짓눌려왔던 억압받던 자들 스스로의 목소리, 그들의 메시아적인 힘을 기대하고 있다.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는 값싸게 처리해버릴 수 없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332쪽.

 

 

영화는 과거에서부터 미래로 연결되는 메시아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각 시대별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피착취자들(위의 도표에서 '레지스탕스'로 묶인 인물들)은 서로 어떠한 혈연적인 관련도, 시공간적인 동질성도 없지만, 온갖 불의한 상황과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연대라는 끈을 놓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더 나은 세상을 고대하며 힘겨운 '운동'의 길로 나서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 운동이 어떤 가시적인 성과로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운동의 물줄기는 언제나 보이지 않게 역사를 관통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구가 거의 멸망에 다다른 시대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메시아적인 희망('손미-451'이라는 인물로 집약되는)으로 자리잡는다. 레닌은 이와 같은 운동의 물줄기와 메시아적인 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힘있는 문장으로 표현한 바 있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십중팔구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 V.I. Lenin

 

나는 레닌의 이 말만큼 영화의 주제의식을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도 없다고 생각한다.

 

 

P.S 배우 톰 행크스는 각 에피소드에서 선한 역할과 악한 역할을 번갈아가며 고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마지막 지구 멸망의 시대에서 착취세력의 편에 설 것인가, 피착취세력의 편에 설 것인가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그는 손미로 대표되던 메시아적 희망을 스스로가 착취세력의 목을 따버림으로서 새로이 구현한다. 종교적 신화로 자리잡은 손미의 '계시'가 아닌 스스로의 '결단'에 따른 이 행동이야말로 오히려 손미가 가장 원했던 '체제전복'을 위한 진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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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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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책은 마르크스나 자본론과는 별 상관이 없다. 책이 제시하는 결론은 오히려 '사회적 경제론'에 가깝다. 저자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변혁'하는 모델이 아니라, 자본주의 '바깥'으로 벗어나 소경영자로서 '착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1부에서 자본가들이 노동자의 초과노동을 착취하여 이윤을 축적한다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빵집의 사례를 통해 간단히 설명한다. 이 설명이 딱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저자는 한 가지 중요한 설명을 빼놓는다. 바로 자본의 집적·집중화 현상이다. 이는 다른 말로 자본의 독점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소사업체들끼리의 경쟁을 조장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독점자본이 몸집을 더욱 불려나가며 생산규모를 거대하게 발전시킨다. 독점자본의 구조적 문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 '외부'(사회적 경제론에서는 이른바 '제4섹터'라고 부른다)에서 소사업체로서 윤리적 경영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모델이 될 수 없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본주의 정글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거대한 맹수는 가만히 내버려둔 채 "우리끼리 알아서 잘 버티며 살아보세.."라고 읇조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소상인 중심의 '착한 경제'를 자본론의 몇 가지 구절을 따와서 이렇게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은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모두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지향한 것이다.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그 방법이 잘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생산수단을 가지는 길이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거라고 본다. 그 의미를 잘 표현한 것이 '소상인'이라는 단어다. (…)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185쪽.
​그러나 이는 앞에서도 말했던 자본의 독점화 현상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결론에 다름 아니다. 물건의 생산은 고도로 사회화되면서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고, 따라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의 독점화 현상도 불가피해졌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인식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이다. 따라서 그는 고도로 집중화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자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마르크스의 입장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결론을 맥락과 상관없이 자본론의 한 구절을 뚝 떼내와서 설명하고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소경영의 기초이며, 소경영은 사회적 생산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이다." (『자본론』 1권 7편 24장)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일하는 사람의 개성과 잠재능력이 훈련되는 소상인(소경영)의 가능성은 마르크스도 높이 평가한 것 같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186쪽.​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저 구절은 아직 자본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다. 저 구절 다음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생산수단의 집적과 집중화를 말하고 있으며, 이 발전단계야말로 진정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고 마르크스는 일컫는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이 생산양식(소경영 중심의 경제체제)은 자신을 파괴할 물적 수단을 창출해낸다. (…) 그리하여 이 생산양식은 소멸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실제로 소멸한다. 그것의 소멸,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분산되어 있던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적된 생산수단으로 전화하고, 따라서 다수에 의한 소규모 소유가 소수에 의한 대규모 소유로 전화하여 결국 대다수 민중에게서 토지와 생활수단과 노동용구가 수탈되는 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민중수탈, 바로 그것이 자본의 전사(前史)를 이루게 된다. 거기에는 일련의 폭력적 방법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중에서 획기적인 것만을 간추려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방법으로 훑어보았다.
-『자본 1-2』, 1021쪽.
 
마르크스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가 말하는 소경영·소상공인 중심의 경제체제란 이를테면 산업자본주의 이전의 '매뉴팩쳐 시대'에 다름 아니다. 저자의 입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지극히 낭만적이고 반동적인 비판에 불과하다.
 
물론 저자가 제시하는 '이윤을 착취하지 않는 기업'의 모델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말은 저 '소경영 중심의 경제체제'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인정했다면 그것을 끝까지 밀고나가 독점자본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치달았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도 생산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수한 노동자투쟁에 연대와 지지를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저자는 여전히 '소경영자'로서의 마인드에만 머물러 있어서, 현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자투쟁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썩는 경제', '발효 경제'의 경영철학을 자본주의의 '썩지 않는 경제' '이윤 중심의 경제'와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차라리 저자가 솔직하게 '사회적 경제론'에 입각한 설명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자본주의 비판도 하나의 트렌드가 되다보니, 책의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마르크스'와 '자본론'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책의 콘셉트를 파는 게 큰 유행이 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이 책의 마케터 담당자였다면, 이 책의 콘셉트를 어떻게 정하고 어떤 분야의 시장에 이 책을 소개했을까. 난 아마도 사회적기업˙협동조합 키워드를 살려서 이 책의 콘셉트를 정하고, 마르크스는 곁다리로나 집어넣어서 이 책을 소개했을 거 같다. 그게 콘텐츠 내용에 보다 충실한 마케팅 전략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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