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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ㅣ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평점 :


"세상에는 자연적인 서열이 있다네. 그리고 그 서열을 뒤집으려는 자들은 좋게 끝나지 않아. 이 운동은 절대 성공 못해. 너네가 그들과 함께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 가족 모두를 기피할거야. 그렇게 침 맞고 폭행당하며 왕따로 살던가 최악의 경우에는 맞아 죽던가 십자가에 못 박힐 거야. 뭘 위해 그러는데? 뭘 얻으려고? 자네가 뭘 하든 무한한 바다 속의 물방울 하나보다 못한 일이 될 거야."
"...바다는 수많은 물방울들의 집합 아닌가요?"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중에서

“파울 클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의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바라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339쪽.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작년 초에 개봉할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대작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작품이기도 했다. 장황한 스토리와 알쏭달쏭한 교차편집, 경전을 읽는 듯한 메시지의 남발은 대중들에게 그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화법은 아니었다. 평론가들도 말끔하지 못한 이 영화의 플롯에 실망하며 점수를 짜게 줬다. 그러나 화법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인간의 역사와 진보에 대한 하나의 진실을 전달해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만하다.
이 영화는 불교의 카르마(karma), 즉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시공간이 다른 여섯 개의 에피소드를 퍼즐 조각과 같이 엮은 것이라고 소개되곤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단순히 환생과 업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윤회사상에서는 인간 세상의 어떤 구조에 대한 설명 없이 순전히 개인들의 선행과 악행에 따른 환생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 사상에는 구조적 모순에 의해 덧씌워진 운명의 굴레에 대해 개인이 저항할만한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종으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내 전생의 업보에 의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한 개별적 업보의 사상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세상의 어떤 구조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환생에도 일종의 계보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윤회사상과는 다른 면이 있다. 그 구조란 바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인간을 착취하거나 멸시하는 태도이며, 그 계보란 바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역사이다. 전혀 다른 이야기인 듯한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엮이기 위한 환생의 고리는 바로 이 구조와 계보의 역사에서부터 비롯된다.

-배우들에게 온갖 '분장쇼'를 시키면서까지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구조적으로 얽혀진 계급적 계보의 역사이다.
(이미지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page=1&st=nickname&sword=2850724&nid=2850724)
그러한 점에서 나는 이 영화를 역사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주창한 바 있는 '혁명적 메시아주의'의 관점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역사적 유물론을 '신학'과 결부시켜 기획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종교를 혐오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사이비 철학일 뿐이었다. 또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란 끊임없이 진보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서부터 탄생한 사민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의 타협을 통해서 역사의 진보를 맞이할 수 있노라고 설파하였다. 그들은 폭력적인 혁명을 통한 체제전복은 이제 더이상 효력이 없으며, 오직 체제와의 양보와 타협을 통해서만 세상은 조금씩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있어서 그러한 진보는 역사의 '가상'일 뿐이었다. 벤야민은 역사가 단선적으로 조금씩 발전할 수 있다는 기존의 가상들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이 직면한 현대의 위기 상황을 깨우치게 하려 했다. 그는 '계급 없는 사회'란 역사의 진보가 도달해야 할 최종의 목적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진보의 '중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356쪽.
그는 이 '비상 브레이크'를 거는 행동을 파괴적인 '메시아적 행동'이라고 일컫는다. 이 메시아적 행동은 노동자계급이 불현듯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어떤 거대한 환상으로 일축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메시아란 단순히 노동자계급이 사회를 구원하는 '주체'로서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로서 울려퍼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기존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공유하고 있던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 아닌, 진보의 가상에 짓눌려왔던 억압받던 자들 스스로의 목소리, 그들의 메시아적인 힘을 기대하고 있다.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는 값싸게 처리해버릴 수 없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332쪽.

영화는 과거에서부터 미래로 연결되는 메시아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각 시대별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피착취자들(위의 도표에서 '레지스탕스'로 묶인 인물들)은 서로 어떠한 혈연적인 관련도, 시공간적인 동질성도 없지만, 온갖 불의한 상황과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연대라는 끈을 놓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더 나은 세상을 고대하며 힘겨운 '운동'의 길로 나서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 운동이 어떤 가시적인 성과로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운동의 물줄기는 언제나 보이지 않게 역사를 관통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구가 거의 멸망에 다다른 시대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메시아적인 희망('손미-451'이라는 인물로 집약되는)으로 자리잡는다. 레닌은 이와 같은 운동의 물줄기와 메시아적인 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힘있는 문장으로 표현한 바 있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십중팔구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 V.I. Lenin
나는 레닌의 이 말만큼 영화의 주제의식을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도 없다고 생각한다.
P.S 배우 톰 행크스는 각 에피소드에서 선한 역할과 악한 역할을 번갈아가며 고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마지막 지구 멸망의 시대에서 착취세력의 편에 설 것인가, 피착취세력의 편에 설 것인가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그는 손미로 대표되던 메시아적 희망을 스스로가 착취세력의 목을 따버림으로서 새로이 구현한다. 종교적 신화로 자리잡은 손미의 '계시'가 아닌 스스로의 '결단'에 따른 이 행동이야말로 오히려 손미가 가장 원했던 '체제전복'을 위한 진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