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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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줄 모르고 쉼 없이 터져나오는 이야기의 연속, 영화와 같이 연상되는 생생한 이미지 묘사, 판소리처럼 착착 감기는 맛이 일품인 만연체 문장들, 이 소설의 특징을 몇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작가 천명관은 이 작품 하나로 한국소설계에 분명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이 작품은 요즘의 현대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거대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더 이상 거대 서사를 요구하지 않고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표현하거나, 상징성이 짙은 장치들을 새로이 재배치하거나,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어떠한 고도의 상징성이나 자잘한 일상의 요소도 부각되지 않는다. 각 인물들은 내면의 심리에 얽매이지 않고 욕망을 외부에 적극적으로 투사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갖는다. 금복에서부터 춘희까지 이대에 걸쳐 진행되는 장대한 이야기는 화자의 거친 입담과 함께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농담처럼 진행된다. 판소리꾼의 걸출한 '입담과 구라'가 인물의 행동과 성격을 결정하면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식이다.

 

물론 이 소설이 전통적인 거대 서사와 똑같은 구조라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는 역사적 현실성,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한국 근대사의 어떤 지점을 관통하는 듯 보이지만 이들의 행동 동기나 반경에서 역사는 단지 '배경' 역할에 머무를 뿐이다. 때로는 역사적 현실성과는 무관하게 작가 특유의 취향이 묻어나는 이국적 장면들이 불쑥 등장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시대가 제약하는 어떤 전통적인 역할에 고정되지 않고 거침 없이 자신의 일대기와 사랑을 그려나간다. 이런 요소들은 이 소설이 기존의 거대 서사의 제약을 훌쩍 뛰어넘어 판타지나 무협지, SF 소설에 훨씬 가깝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장점이 단지 허구를 마음껏 조리하는 '이야기'에 그친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각 인물들은 분명 시대적인 대표성을 갖고 있으며, 이들의 행동은 사회구조의 현실적인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대인 금복과 탈근대인 춘희가 보여주는 대표성은 이 소설에서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소설의 주제의식까지 드러낸다. 그야말로 가장 역동적인 활극을 보여주는 근대인 금복은 하나의 성격만을 지닌 인물로서 제한되지 않고 여러 근대인들의 초상을 집약하고 압축해놓은 듯한 행동을 펼쳐 보인다. 반대로 탈근대인 춘희는 말을 못하는 벙어리이지만 동물 점보와 소통할 줄 알며 어떠한 근대성의 유산도 물려받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혼자서 체제 바깥의 삶을 유지해나가려 한다. 두 인물은 서로 어떠한 대립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 소설은 애써 춘희의 삶에 낭만적인 외피를 덧붙이며 이야기를 마무리하지만, 금복에서 춘희로의 이행은 사실상 근대성의 극복이 아닌 근대성 외부로의 탈피에 불과하다.

 

춘희의 비극적인 삶은 근대성 '탈피'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몸소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작가는 그것을 마치 '대안적 삶'처럼 묘사한다 할지라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허구적 거대 서사는 분명 그렇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결말로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근대성,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 현실로서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거리들을 안겨다 준다. 결국 춘희는 답이 아닌 또 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남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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