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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평점 :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 책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쫓아 노예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문명사회를 비판하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단순히 관념적인 읊조림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숲 속에서 어떤 생활을 펼쳐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실천적인 설득력까지 갖춘다. 대표적으로 1장 '숲 생활의 경제학' 부분에서 저자는 인간이 문명의 혜택을 얻지 않고서도 기본적인 의식주의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자신이 숲 속에서 개척한 '야생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그는 하루에 한 끼 정도만 배불리 먹어도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공장에서 몇백시간을 노동하여 겨우 집 살 돈을 마련하는 문명인들의 삶을 비판하며 차라리 자연의 재료를 가지고 자신이 직접 집을 지어볼 것을 권유한다. 그는 인간이 우매한 시각에 갖혀서 문명의 습속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며, 삶과 사물을 꿰뚫어볼 수 있는 자연주의의 통찰력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가 실천적으로 제시하는 자연주의적 삶의 모범은 결국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삶에 대한 예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문명이 건설되는 과정은 굉장히 파괴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에게 '물신'에 대한 욕망을 재구조화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자연주의자들은 기존의 인습과 제도를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헛된 욕망을 부추기며 환경을 제멋대로 헤치는 문명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며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지금도 이른바 채식주의자들이나 생태주의자들은 이와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도 등지에서는 이미 많은 햏자(!)들이 이러한 자연주의적 삶을 소로우보다도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다. 거의 초인에 가까운 고행과 수행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들 자연주의자들의 문명에 대한 비판은 몇 가지 점에서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이들이 겨냥하는 '문명'이라는 대상에 대한 보다 엄격한 개념정의가 필요하다. 이들은 사실상 문명을 '물질적 풍요'라고 협소하게 정의하고서 그 자체에 대한 '거부'를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은 고도의 분업화 과정과 기술발전을 통한 노동생산성의 증가 및 노동시간의 감소와, 이로부터 비롯된 물질적 풍요가 인류에게 선사한 일정한 진보적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문명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사고가 부족하다. 단지 팍팍한 문명사회에 대한 개별적인 '탈출구'로 '자연'이라는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의 이러한 사고는 대안적인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저자 소로우 또한 개별적으로나 자연주의적 삶을 실천하고 있을 따름이지, 공동체나 사회를 어떻게 새롭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개인적인 '고독'을 찬양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경제학적인 말로 '노동생산물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그가 '국가'라는 기구가 갖는 사회적 재분배의 기능은 외면한 채 '납세거부운동' 및 '시민불복종 운동'을 전개한 것도, 바로 '사회'를 사고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국가의 재분배 기능을 인정하지 않고 '납세거부운동'을 펼치는 자들은 대부분 금융자산가들 및 부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계급'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저자 소로우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은 줄곧 늘어놓지만 정작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노동자들이 힘겹게 노동시간을 투여해서 겨우 번 돈으로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체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지적하지 않은 채, 그들이 물질적 욕망의 안일한 포로가 되었다고 설교나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프레임 뒤에 숨어서 정작 계급적인 체제가 만들어낸 불합리한 모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비판방식은 오늘날에도 여러 진보매체들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이야기하는 방식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같은 자연주의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이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사회를 구상하지 않고 '체제 외부로의 탈출'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307212131165&code=990100
-얼마 전 논란을 일으킨 강신주 선생의 경향신문 칼럼. 그는 자본주의 문명의 상징인 냉장고를 내다버리는 것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실천이라고 강변한다. 강신주의 논리도 자연주의자들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주장에 대한 네티즌들의 실소 및 풍자가 인터넷에서 무수히 이어진 적이 있다.
마르크스는 생태계와 문명사회 간의 '신진대사의 교류'라는 개념을 통하여, 문명사회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주목하였다. 그는 단순히 문명사회에 반대하여 자연주의적 삶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계급적 체제가 어떻게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균열시키고 파괴하는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사적 자본에 의해 독점적으로 소유·관리되는 생태계의 자원들을 인류의 생존을 위한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공동소유로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자, 여러분께서는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문명을 아래로부터 '변혁'하는 삶을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