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평전 -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최광진 지음 / 미술문화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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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그 슬픔이 캔버스가 되고, 그 고독이 붓이 되어 마음에 남아있는 한(恨)이 종이에 그려진다면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하다. 화가 천경자의 삶을 보면서 ‘파란만장’이란 단어가 떠올랐고, 한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어했던 한 여자의 기구한 운명을 보면서 잔인하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화가 천경자의 이력은 그 당시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도 월등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그녀가 좋아한 것들을 캔버스에 담을 수 있는, 어찌 보면 화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로서의 삶은 처절하다 못해 비참했다. 두 번의 결혼 생활과 실패에 따른 그녀의 운명은 다름 아닌 그녀가 그린 그림들을 통해 대변되기 시작했고, 자신의 불행과 마음 속에 맺힌 한을 자신의 그림에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일본 유학에 대한 아버지의 반대,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한 여동생의 갑작스런 죽음, 두 번의 결혼생활의 실패를 딪고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화가에 오르기까지 천경자 자신도 무척이나 노력했겠지만 그녀를 지금의 천경자로 만든 건 팔할이 그녀가 처한 환경이었다고 생각한다. 천경자 화가의 그림에 뱀이 자주 등장하는 건 그녀의 죽은 동생이 자신의 마음 속에 꿈틀대면서 살아있다는 생동감의 표현이었고, 머리에 화려한 꽃을 단 여인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녀의 어린시절 고향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돌아다녔던 미친 여인들에게서 받은 영감을 그림에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천경자가 살았던 한반도 최남단 시골의 섬마을은 어린 천경자에겐 화가가 되기 위한 소재거리가 풍부했던 장소이자, 어린 천경자가 감내하기에는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짙은 안개가 자욱한 미지의 섬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그림만이 우리들 곁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그녀가 그린《미인도》의 위작 논란이 한창이다. 살아 생전 그녀도 자신의 그림이 결코 아니라고 했던 것을 지금까지 진위 여부를 밝혀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원본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텐데 원본이 사라졌으니 지금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인도’가 가짜다! 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최광진 선생의 말씀처럼  ‘미인도’의 위작문제가 정말 간단히 끝날 수도 있다. 천경자 자신도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인도’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했으니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이 그림이 진품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던지, 아니면 가짜임을 인정하고 그 그림을 폐기처분하면 끝나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런 결정을 내릴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천경자의 ‘미인도’ 원본이 사라진 마당에(책에서는 1976년에 그린 ‘장미와 여인’을 미인도의 원본으로 추정) 이 문제를 쉽게 결말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기구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한국의 ‘천경자’를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와 견주어 비교하곤 한다. 남자들에게 버림받으면서 느꼈을 고통과 아픔을 그림에 투영시켰고, 특정 계파를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킨 그녀들의 그림에서 공통점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림의 색채나 분위기도 많이 유사하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그림과 천경자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차이점은 바로 현실에 대응하는 자세였다. 프리다 칼로가 현실에 순응하고 체념과 원망을 그림에 표현했다면 천경자는 현실을 넘어 자신의 고독과 슬픔을 초월해서 그림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 슬픔과 한을 아름다움으로 극대화시킨 화가였다. 이것이 천경자 그림의 매력이자 그녀가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한 예술세계였다.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그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생각하고 말지만 그러다 보면 또 다른 허망한 고독감에 또다시 서글퍼지고 말지요.” (책 25쪽 中)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의 그림을 그리워한다. 찬란한 고독과 한의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표현한 화가 천경자! 그녀의 삶이 천경자 평전인《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에 50여 점의 그림과 함께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호기심 많은 어린 천경자가 되어 보기도 했고, 다 커서는 마음이 아픈, 고독하고 한(恨) 많은 천경자가 되어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는 아직 우리들 마음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녀의 그림 또한 우리들 곁에서 우리들의 아픈 영혼을 치유하면서 뱀처럼 꿈틀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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