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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평점 :
우울함을 넘어서 연민의 정까지 느끼게 하는 기형도의 시, 발람함 속에 감춰진 슬픔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신현림의 시, 시골소년의 순수함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는 김용택의 시...짧은 문장 속에서 강렬한 느낌을 주고, 그 느낌을 되새김질하면서 얻은 영감을 곱씹을 수 있다는 게 시가 주는 매력이자 본인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다. 많은 시인의 시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절망의 메시지가 좋고, 마지막에 가서 내 마음을 흔드는 울림이 좋다. ‘즐거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슬픔이나 공허함은 숨긴 채 행복하게 노래하는 삐에로를 보면 시인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의 몸속에선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데 갈 조국은 없고, 말하고 싶은데 그의 말을 들어줄 상대가 없다. 저 바다만 건나면 갈 수 있는 곳을 그는 갈 수 없다. 내 조국을 총과 칼로 짓밟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 고통 또한 그가 짊어지고 가야할 역사이고, 삶이다. 재일조선인의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을 서경식 시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책의 글들엔 이산(離散)의 아픔을 간직한 디아스포라의 슬픔도 있고, 조국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마음도 들어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늬만 조선인이라는 슬픔을 간직하면서 살아온 그를 지탱해준 것은 시와 문학이었다. 시를 통해 저항했고, 시를 통해 그리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그리움이 《시의 힘》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루쉰의 절망에 가득찬 시들 속에는 앞이 보이지 않은 암흑이 우릴 가로막을지라도 그 깜깜한 어둠을 향해 걸어가게끔 만드는 희망이 들어 있고, 정치적인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 갈등 너머에 있는 경험을 통해 시를 쓰고자 하는 열정이 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렇다. 시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희망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의 빛을 찾고, 루쉰의 시에서 감동을 받은 나카노 시게하루처럼 나라마다 정치적으로 얽혀있는 문제들이 시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안중근 의사의 마음을 헤아린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코코아 한 스푼>이라는 시에서 한 테러리스트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말이다.
시란 무엇인가?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중략)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본문 109~110쪽 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역사적 사건의 희생양이 됐다. 그 역사적 진실 속에 많은 것들이 희생됐지만 시詩 만큼은 시대의 폭력에 저항하면서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빛을 안겨준 고마운 존재였고, 지금도 많은 시들이 절망에 빠진 마이너리티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고, 소외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지금의 시대에서 시가 주는 힘은 더 클 것이고, 그 힘은 바로 시대적 상황을 보면서 침묵하지 않는 시인의 손에서 나오는 만큼 많은 시인들의 분발을 바란다. 덧붙여 서경식 시인의 이 책《시의 힘》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의 역할이 되었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