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 작은 뜰을 거니는
프레드 베르나르 지음, 배유선 옮김 / 콤마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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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정원이 딸린 집엔 누가 살까? 가 그리 궁금했다. 담 밖에서 보이는 올곧은 소나무들과 담장을 친구 삼아 올라탄 빨간 장미들, 여름이면 문틈 사이로 보인 하얀 수국, 그리고 이름 모름 꽃들이 정원 안에 한가득이었다. 정원 딸린 집을 지날 때마다 느꼈던 감정들이 하루하루 달랐던 것도 사계절 동안 변화무쌍한 정원의 힘이 아니었나 싶다. 가지치기를 끝낸 나무들에게선 왠지 모를 풋풋함이 느껴졌고, 형형색색으로 옷들을 갈아입은 꽃들을 보면서 나도 무척이나 설레었으니깐. 추운 겨울에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나무들을 볼 땐 이유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그 슬픔이 끝나기도 전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을 보면서 나에게 어린 시절 희로애락을 안겨준 그 집 정원에 고마운 마음이다.

 

어느 노부부의 집이었던 200평이 넘는 땅을 일 년 살이를 계획하면서 정원을 싹 다 정리하고 배나무, 호랑버들, 대나무, 개암나무, 딱총나무 등 몇 그루의 나무만 남겨둔 땅에서 생각지도 못한 식물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다. 갑자기 등장한 식물들에 놀란 것도 잠시 작가는 정원 군데군데 새 화초를 심고 씨앗과 새순을 모았다가 다시 뿌리는 방법을 통해 정원을 만들었고, 그 정원이 정글처럼 무성하게 자라나게 되자 현재 정원의 모습을 동화책 작가답게 글과 그림으로 기록을 하게 되고, 그 기록을 모아 책으로 출간한 게 『작은 뜰을 거니는 정원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다.

 

책은 글보다는 그림이 많고 대부분 그가 쓰고 그린 그림들인데, 2018년 2월 봄을 알리는 봄은방울수선화를 시작으로 정원 사계절의 변화를 책에 담았다고 보면 된다. 영어로 프라임 로즈라 부르는 보라색의 ‘무스카리(Muscari)’도 보이고, 정원에서는 ‘노린재‘가 사방팔방을 누비고 다닌다. 건강한 정원에만 보인다는 ‘민들레’와 ‘산파두꺼비’, 모두가 이 나무를 보면 너무 예뻐서 사랑에 빠진다는 일명 ‘데쇼조’의 단풍나무, 7년을 기다려야 꽃을 볼 수 있다는 인내심의 꽃 ‘발칸작약’, 백합처럼 생겼는데 백합은 아니면서 ‘하루의 아름다움’이란 의미를 가진 ‘원추리’, 성욕을 억제하는 마법의 풀이라는데 유충이 갉아먹고, 달팽이가 갉아먹어서 수난을 겪는 ‘흰백합‘,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접시꽃’, 짤랑짤랑 노오란 색으로 정원을 환하게 비추는 ‘은행나무’, 행운의 상징이지만 몇 시간 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성을 가진 ‘유럽은방울꽃’ 등 작가의 정원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꽃들은 물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야생화들의 천국이었다. 여기에 정원의 오지라퍼 ‘노린재’와 나무 타기 선수인 ‘동고비’, 20년 만에 처음으로 정원에 놀러 온 ‘귀뚜라미’, 세상에서 제일 예쁨을 뽐내는 ‘공작나비’, 은빛 날개로 꽃들을 매혹하는 ‘잠자리들’, 정원의 폭군 ‘새매’, 무엇이든 쫌 치는 ‘어치’, 소리는 들리는데 만날 수는 없는 신비의 새 ‘올빼미’, 개암나무에 사는 겁쟁이 ‘청설모’ 등 새와 곤충들도 정원에서 각자의 존재감을 뽐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정원을 가꿀 때 비로소 인생이 시작된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199년에 시작되어 이제 곧 서른 살을 맞는다.(본문 48쪽 中)

 

이렇게나 많은 동식물과 곤충들을 실제 그렸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베르나르의 정원에 놀러온 거 같은 착각에 빠질 만큼 그림도 잘 그렸고, 짤막하게 설명하는 글귀 또한 이 책이 주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겉으로 보기엔 아름답기만 한 정원이었는데 실상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서도 생존을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치열한 삶의 현장은 동식물이 자라는 자연이나 인간이 사는 사회나 별반 다르지 않구나!를 베르나르의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정원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정원을 잘 가꾸고 관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나무 몇 그루만 남겨둔 땅에서 정글 같은 정원이 만들어졌다고 말하지만 7년을 기다린 끝에 발칸작약을 꽃피우고, 오지 않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기 위해 20년을 기다린 베르나르를 보면서 정원 가꾸는 일이란 기다림의 미학이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더불어 그 기다림 속에서 올빼미의 웃음소리를 듣고, 노린재의 종횡무진 활약상을 지켜보면서 나도 그처럼 단풍나무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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