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밴 어린시절
W. 휴 미실다인 지음, 이석규 외 옮김 / 일므디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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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한강의 소설인 <채식주의자>에서의 ‘영혜’였다. 육식을 거부한 채 점점 말라가는 영혜의 모습 뒤로 어린 시절 영혜에게 가해졌던 아비의 폭력이 오버랩됐다. 사랑 없는 결혼을 통해 주체성을 상실한 영혜의 삶 또한 채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결국엔 현실의 모순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해가는 영혜의 모습이 더해져서 이 책에 더 많은 감정이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사건 또한 평생 갈 거라 생각한다. 좋은 기억이면 추억으로 남겠지만 안 좋은 기억이나 공포심은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평생 자아을 괴롭힐 것이고 그 중심에《몸에 밴 어린 시절》이 있는 것이다.


《몸에 밴 어린 시절》은 현재의 내 모습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의 과정을 찾아가는 책이다. 그 찾아가는 과정 중의 거의 대부분을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경험에 할애한다. 지금의 내 모습, 결혼생활, 성격, 습관,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가치관, 식습관 등을 나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서 “어렸을 때 이러이러했기에 지금 이런 모습이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현재의 모습과 어린 시절의 인과관계에 대해 풀어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서 범죄자가 저지른 행위와 피해자가 입은 결과 간에 인과 관계가 있어야 범죄가 성립하듯이 이 책에서도 지금의 이런 행동이나 결과는 어린 시절의 이러한 원인 때문에 만들어진 하나의 결과물인 셈인 것이다. 책에서는 내재과거아(內在過去兒)’란 다소 어려운 용어를 통해 지금 우리들이 처한 상황이나 모습을 설명한다. 우리들이 거쳐 온 어린 시절 하나만으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재단하고 평가한다는 거 자체가 약간은 억지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묘하게 빠지게 되고, 그 몰입 속에서 어느새 책의 내용을 수긍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몸에 밴 어린 시절》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결혼 생활에는 네 사람이 필요하다(7장)’고 말한 대목이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사랑해서 하는 거지만 상대방 모두 각자의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기에 결혼 생활은 두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 서로에게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남자와 여자의 어린 시절도 품어야 하기에 결혼에는 네 명의 별개의 사람들이 포함된다는 게 약간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두 명도 힘든데 네 명을 품으라니,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말에 일견 수긍이 갔다. 배우자의 어린 시절 경험했던 기억이나 사건들을 외면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게 된다면 그 관계는 머지않아 삐걱거리게 될 것이고, 결혼생활은 늪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어린 시절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결혼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툼이나 난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 생활은 정말 녹록지 않은 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결혼 생활의 만족과 성공은 네 사람, 즉 어른 두 사람과 그 두 어른의 내재과거아가 저마다 나머지 세 사람을 존중하는 가운데 잘 적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87쪽 中)


책의 말미에 가서는 우리가 처한 갈등이나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도 함께 제시한다. 나 자신에게 새로운 부모 역할을 맡기라는 것이다. 새로운 부모 역할을 통해 내 어린 시절 겪었던 부모의 병적인 태도를 버리고, 내재과거아에게 도움을 주는 부모 역할을 해보라고 권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감정들을 확인하고(책에서는 내재과거아의 감정 확인이라고 한다.), 그 알아차린 어린 시절의 감정들을 어른이 된 지금의 감정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릴 적 감정들과 지금의 감정을 분리해서 구별할 수 있다면 어른이 돼서 세운 목적이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쉽게 얘기하자면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싸움에 나가 질 수 없다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란 말에서 ‘지피지기’를 ‘우리들의 어린 시절(내재과거아)’로 바꾸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겪었던 감정들을 확인하고 보듬어줄 수 있다면 어른이 돼서 발생하는 고민과 불행을 좀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배우고,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란다. 그만큼 커나가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존재는 정서적, 교육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부모들은 너무나도 지나친 태도가 문제다. 아이들을 지나치게 과잉보호하고, 지나치게 방치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화를 내고, 지나치게 요구한다. 이런 부모의 병적인 가르침으로 인해 아이들의 마음은 시나브로 지치고 병들게 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그들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아마도 부모에게 강요된 어린 시절은 지우고 싶은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 자기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지만 그 행복한 삶이 멀게 있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몸에 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고, 그 어린 시절을 인식하고 존중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몸에 밴 어린 시절》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 책《몸에 밴 어린 시절》이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뚜렷한 처방전은 되지 못 하겠지만 어린 시절 받았던 아픔이나 고통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줄 거라 믿는다. 더불어 지금도 어린 시절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 세상의 많은 영혜들에게《몸에 밴 어린 시절》을 선물해드린다.


한때 당신이 거쳐 온 어린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일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존재다. 어른이 된 지금도 당신의 삶 안에 그대로 남아서 지속되고 있는, 과거에 거쳐 온 어린이의 모습을 ‘내재과거아’라 부른다. 이 책을 통해 당신 자신과 당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새롭게 살펴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책 뒷면 표지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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