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기억’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고, 기억하지 않아야 하지만, 어느 찰나에 기억 나고야 마는,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랑과 죽음, 이별과 헤어짐이라는 단어들을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면서 ‘무뎌짐‘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고나 할까. 우리 모두 그 기억에 대해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우리 마음 어딘가에 깊숙이 남아 있었고, 단편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 기억들이 며칠 전 일어난 사건처럼 선명하게 생각이 나서 책장을 넘길수록 그 기억에 대한 긴장감이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하고 하루이틀 지난 일보다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11쪽 ‘구멍’ 中)


‘구멍’이라는 암흑 속에 봉지를 떨어뜨린 후, 그 봉지를 주우려 내려갔다 다시 오지 못한 친구 ‘탈’의 죽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다룬 <구멍>, 아버지의 부재와 그 부재를 통해 다른 남자를 사랑한 어머니, 그리고 혼자 남은 나의 유일한 벗이었던 코요테의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코요테>, 어른으로서의 가정의 의무와 책임의 경계를 다룬 <아술>, 노 교수와 젊은 여성의 사랑을 통해 이성 간 느끼게 되는 사랑의 감정과 도적적인 윤리 사이에서 방황하는 ‘헤더’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형의 잘못된 행동(폭력)이 얼마나 큰 오해와 왜곡을 불러올 수 있는지에 대한 단상이 씁쓸했던 <강가의 개>,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어릴 때 친구들과 저질렀던 무모함에 대한 기억을 다룬 <외출>, 소통의 부재 속에 관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머킨>,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생각난 <폭풍>, 3쪽이라는 아주 짧은 분량을 통해 사랑의 이중적인 면을 고발한 <피부>, 마지막으로 십 대 시절 목격했던 동성애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묘사한 <코네티컷>을 끝으로 앤드루 포터의 소설은 끝을 맺는다.


단편들 대부분이 10년도 전인 사건이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했고, 화자의 대부분이 ‘나’라고 말하는 남자인데 반하여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만 ‘헤더’라는 여성(나)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는 점, 대부분의 화자가 어린아이와 성인의 중간 언저리쯤에서 방황하고 배회하는 청소년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특징인데 호기심 많고, 사고뭉치인 청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부조리함과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지만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웠던 죽음과 불륜, 폭력과 동성애들이 시간이 지나 어떤 기억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지를 앤드루 포터는 기억하고, 10개의 단편을 통해 세상 밖으로 담담하게 끄집어내 놓았다.


무언가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강해져서 그것을 대항하려 애쓴다.(117쪽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中)


친한 친구의 죽음, 부모의 불륜, 가정의 불화, 폭력, 동성애 등 대단히 자극적인 소재인데도 불구하고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은 ‘나’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사건에 대한 기억들을 그만의 담담한 필체로 써 내려가고 있다. 본인은 이것이 앤드루 포터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의 기복 없이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주인공들 간의 심리적 상황을 툭툭 건드리듯이 자극한다. 읽는 독자로서는 그것이 때론 불쾌하지만 그 불쾌함이 부지불식간에 나를 그 상황 속에 빠져들게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나에게도 있었는지, 그런 불행한 기억들을 어떻게 지워냈는지를 스스로 자위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런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어찌 보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을 위로하는 따뜻한 포옹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다음 해에 내가 국어 선생님이 과제로 내준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읽게 될 포옹이었다.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포옹이었다. 사랑의 포옹이었다.(257쪽 ‘코네티컷’ 中)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버지니아의 무더운 여름 날씨에 수영도 해보고 싶고,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해 질 녘에 들려오는 코요테의 울음소리도 듣고 싶어졌다. ‘로버트’와 ‘헤더’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해보고 싶고, 코네티컷 연안의 섬에서 여름휴가도 즐겨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기억을 통해 앤드루 포터가 단편에서 묘사한 안 좋았던 기억, 불행한 사건들을 행복한 모습들로 바꾸고 싶다.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로버트가 죽었다는 사실에 통곡하던 헤더의 모습에서 콜린의 가여움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