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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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봤던 영화가 자꾸 생각난다. 자기 자신을 ‘범죄자’라는 파멸의 길로 내몬 것도 사랑이었고, 그로 인해 희망도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핏기 없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것도 사랑이었는데, 그 사랑은 시애틀의 자욱한 안개처럼 ‘애나’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나가 버렸다. 양손에 든 커피를 집어던진 채 ‘훈’을 찾아 나선 애나의 그 애절한 모습에서,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카페에 앉아 오지 않을 훈을 기다리면서 담담하게 뱉어내는 애나의 독백에서, 완연히 깊어가는 가을의 쓸쓸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을만 되면 <만추>가 생각나고, 사랑이 두려웠던 애나의 표정을 통해 쓸쓸하고 고독한 가을의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 난 <만추>란 영화가 참 좋다. 이제 곧 완연한 가을이 올 테고, 그 가을을 핑계 삼아 난 오늘도 애틋한 로맨스를 꿈꾼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가을과 딱 맞아떨어지는 책이다. ‘폴’, ‘로제’, ‘시몽’이라는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애매모호한 사랑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 바로《브람스를 좋아하세요...》다. 분량도 짧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쉽게 읽히는 책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녹록지 않기에 쉽게 읽을 수만은 없는 책이기도 하다. 6년 동안 사귀고 있는 폴과 로제의 관계에서부터, 권태롭고 위태위태한 폴과 로제 사이에서 새로운 인물인 시몽의 등장으로 인해 이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가 이 소설의 큰 플롯이라 하겠다. 그 플롯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감정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들이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각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를 거라고 본다. 그 다름을 생각하면서 이 소설을 읽는다면《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훨씬 친절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커플에게 가장 치명적인 적은 ‘권태’가 아닐까? 그 권태가 익숙함이 되는 순간 서로 오가는 말투부터 날이 서게 될 것이고, 그 칼날이 모욕감으로 되돌아올 때 두 사람은 이별이라는 수순을 밟는 게 대부분의 장수 커플이 겪는 고통이자 아픔이다. 폴과 로제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폴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고, 로제 또한 폴이 아닌 다른 여자들과의 유희를 통해 그 권태를 벗어나기에 급급했다. 그 찰나에 시몽이 나타났고, 폴은 시몽의 열정적인 구애에 심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서 폴의 마음에 남아 있던 건 다름 아닌 익숙함이었다. 익숙함이 폴과 로제를 소원하게 했고, 묘하게도 그 익숙함이 폴과 로제를 다시 재회하게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연인들이 느끼게 되는 소외와 고독, 외로움이 다시금 익숙함으로 덮어지는 과정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폴은 익숙함을 선택했고, 그 결말에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기에 여러분들은 책을 통해 익숙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으면 한다.


겨울의 단조로운 나날, 고독한 그녀 앞에 끝없이 펼쳐진 집과 상점 사이의 똑같은 길들, 로제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수치심과 더불어 수화기를 든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지독히도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전화, 그리고 영영 되찾을 길 없는 긴 여름에 대한 향수, 그 모든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한다.’라는 절박감과 더불어 그녀를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만들었다.(본문 95쪽 中)


 사랑이라는 뜨거운 감정을 오롯이 상대에게 집중해도 그 유효기간은 3년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기간이 넘어가면 다들 익숙함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알아달라고 상대의 가슴을 상처 내기에 바쁘다. ‘브람스’보다는 ‘모차르트’가 좋다고, 왜 유명한 모차르트를 놔두고 브람스를 듣냐고 아우성이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가을에 정말 어울리는 책이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커플이나 너무 오래 만나 권태감을 느끼는 연인들이 읽으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 안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한번 불태우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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