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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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사유에 대한 보고서


개인은 전체 속에서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간섭하고 통제했던 전체주의는 파시즘, 나치즘, 볼셰비즘, 군국주의 등 나라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잔인하고 악랄했던 사건을 뽑으라면 아돌프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와 스탈린의 ‘볼셰비즘 독재’라고 본다. 1940년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 600만여 명을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체계적으로 학살한 히틀러의 만행은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스탈린 또한 공산당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농부들)을 강제노동수용소인 ‘굴라크(Gulag)’에 감금하면서 강제노동을 시켰는데, 그 굴라크에서 죽어 나간 숫자만 600만~1,5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스탈린의 독재 또한 히틀러 못지않게 정말 끔찍하면서도 너무 잔인했다. 이렇듯 전 세계에서 ‘전체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독재와 학살을 보고 자란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에게 전체주의가 저지른 만행은 여러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 법정에서 진행된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면서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죄가 없다는 그의 말에서 한나 아렌트의 상징이 된 ‘악의 평범성’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서 한나 아렌트는 그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함 속에서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가운데 드러난 사유하지 않음이었다. 아이히만을 통해 ‘사유의 부재(무사유)’를 발견한 한나 아렌트는 사실적 경험에서 형성되는 도덕적 질문들에 대한 어떤 의심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그 의심을 해부한 책이 바로 한나 아렌트 철학의 정수를 담은 《정신의 삶》이다.


그녀의 전작인 <인간의 조건>에서 ‘전체주의적 과정’과 그로 인한 근본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이 필요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전체주의적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전체주의적 체계가 ‘근본악’을 만들었다”고 말이다.(‘인간의 조건’ 31쪽 中, 한길사) 그러면서 인간의 조건의 핵심이자 근간을 이루는 노동, 작업, 행위를 활동적 삶의 주요 테마로 삼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정신적 삶》에서는 우리의 삶에서 정신의 삶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면서 그 근간으로 사유, 의지, 판단을 조명하고 있다. 사유, 의지, 판단이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경험하는 근본적인 활동임에도 이러한 정신활동이 직업적인 철학자들의 몫이었기에 접근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신적 삶은 활동적인 삶과 더불어 철학자들을 포함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기에 정신적 삶을 이해하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들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 속에서 사유, 의지, 판단의 중요성을 한나 아렌트의 《정신적 삶》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사유]

한나 아렌트는 기존에 있던 형이상학적 전통을 비판하면서 사유를 시작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를 [존재=현상]이라는 명제를 통해 정신적 삶과 정치적 삶의 원초적 본질에 대해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울러서 ‘정신의 삶’으로서 사유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현상에서부터 출발해서 현상세계 속 정신 활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유란 무엇을 의미하고, 우리는 왜 사유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근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칸트, 마르크스 등의 철학자들을 통해 현상의 우위성과 사유의 원형, 사유, 이성, 의미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유에 대해 살피고 있다. 관조적 삶이 활동적 삶보다 우위에 있다는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부수고, 활동적 삶과 정신적 삶은 서로 대조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게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의 필수조건이다.


[의지]

사유와 이성, 의미의 상관관계와 그 원형을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살폈다면 의지의 중심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의지와 지성, 자유의 연관성과 그 의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 사도 바울, 에픽테토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지이론을 통해 의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를 통해서는 의지와 지성의 우위성에 대해 밝힌다. 아퀴나스는 지성이 의지보다 우위에 있다는 입장이고, 둔스 스코투스는 지성보다 의지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독일의 관념론과 니체와 하이데거를 통해 의인화된 의지의 개념(독일의 관념론은 의지를 형이상학적 범주로 설정)과 의지를 존재론적 범주가 아닌 인간 능력으로서의 의지에 정면으로 도전한 니체의 영원회귀와 초인,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 이념을 통해 의지를 설명한다. 이렇듯 ‘의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한나 아렌트는 여러 철학자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주장을 서로 반박하게 하면서 의지 활동의 역사가 반대와 대립의 연속이었음을 상기시킨다.


[판단]

‘판단’의 중심엔 칸트가 있고, 그의 저서인 <판단력비판>을 통해 ‘판단’을 다루는데 한나 아렌트는 이 책 ‘의지’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유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이 난관은 다른 정신 능력, 즉 시작 능력 못지않게 신비스러운 능력인 판단 능력에 대한 호소를 통한 경우를 제외하고 열리거나 해결될 수 없다.” (698쪽 中) 이렇듯 ‘판단’은 정신의 삶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인데 한나 아렌트는 ‘의지’ 원고를 끝내고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다. 고로 ‘판단’을 집필하지 못한 것은 한나 아렌트가 생전에 강의한 칸트 정치철학 강의 발췌문으로 ‘판단’을 대신하는데 이 부분은 한나 아렌트의 역작인《정신의 삶》에서 크나큰 오점이자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나 아렌트를 생각하면 사유한다는 자체가 사치로 느껴질 만큼 정신 활동에 대한그녀의 학문적 열정과 그 깊이는 정말 대단했다. 700페이지가 넘는《정신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전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인간의 조건>을 읽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사유와 의지, 판단에 대한 철학들은 너무나 깊고 난해했다. 그래서 말인데 평생을 바쳐 사유에 대해 연구한 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면 이 책《정신의 삶》을 읽을 땐 한나 아렌트처럼은 아니더라도 사유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면서 읽으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소크라테스부터 아우구스티누스, 하이데거, 니체,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논리와 철학을 이해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은 수월하게《정신의 삶》에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보여준 ‘사유의 부재’를 통해 ‘악의 평범성’의 무서움에 대해 알게 됐다면, 이제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정신의 삶》을 통해서 사유하고, 의지하며,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곧 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왜 사유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계된다.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사유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진정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691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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