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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읽다가 포기한 책들이 더러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기만 한 책, 읽는데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한 책, 내용보다는 작가 자신의 앎을 내세우는 책, 읽기 거북할 정도의 성적(性的) 묘사가 많은 책 등등. 그 중에서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파격적인 소재로 인해 읽기가 너무나도 거북했다. ‘롤리타’라는 선정적인 제목은 차치하고서라도 열두 살 소녀와 서른일곱 남자의 만남이라는 소재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름도 우스꽝스러운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를 데리고 다니면서 나누는 노골적인 성적(性的) 묘사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를 넘어서 인간이라면 넘어서는 안 될 윤리적인 선마저 무너트린 험버트 험버트가 너무나도 싫으면서 짜증이 났다. 언어적인 유희(遊戱)가 가득한 작품이라는 말만 믿고 읽다가 덮기를 두어 번, 그러다가 이번엔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책이기에 끝까지 읽기만 하자는 마음으로 읽었고, 결국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숨죽이며 덮을 수 있었다. 다 읽은 후 나보코프가 쳐 놓은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다가 책 읽기를 포기해버렸던 내 자신이 정말 싫었다. 소설은 말 그대로 작가가 지어낸 허구(fiction)이고,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의 장면들이 사실 그대로가 아닌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것일진대 그 거북함이 싫어서, 선정적인 소재와 험버트의 소아성애자 같은 삶이 싫어서 책 읽기를 포기했던 내 사유의 부족함에 절망했고, 그 절망을 통해 <롤리타>에서 나보코프가 묘사했던 언어의 희롱과 조롱이 나를 향하고 있는 거 같아서 괜히 창피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녀의 정강이를 스치듯 쓰다듬는 내 손끝에 섬세한 털의 여리디여린 저항이 느껴졌다. 나는 어린 헤이즈Haze가 뿜어내는, 여름 안개Haze처럼 자극적이면서도 건강한 열기에 넋을 잃었다.(98쪽 中)
나보코프는 <롤리타>의 서문에서 ‘존 레이 주니어’ 박사라는 그럴듯한 인물(나보코프가 창조한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탄생 배경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서문의 마지막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험버트를 병자로 취급하면서 정신병리학의 고전이자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끼칠 윤리적 충격은 대단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를 대단히 혐오했고, 그의 작품 속에 도덕적 교훈이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거 자체를 싫어했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것처럼 나보코프는 ‘일단 책을 쓰기 시작하면 오로지 이 책을 끝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500쪽)이었다. <롤리타> 또한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고, 존 레이 주니어 박사의 서문을 통해 이 소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시나브로 나보코프가 쳐놓은 덫에 꽁꽁 묶여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거라고 본다. 이처럼 <롤리타>를 읽으면서 도덕적 교훈을 찾으려 하거나 윤리적인 잣대로 나보코프의 소설을 재단하려는 독자들이 계신다면 이 소설에서는 제발 그러지 말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나보코프의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그가 왜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롤리타>를 썼을는지 이해도 간다. 나보코프는 어려선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20대를 맞이해서 맞닥뜨린 아버지의 암살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아버지의 죽음으로 소년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졌을 그였기에 글을 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생계수단 중 하나였고, 쓰다 보니 그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을 거라고 본다. 탁월한 글쓰기에 돈벌이가 되는 에로티시즘이 콜라보 되었으니 독자들에게 소설이 팔리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러시아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다시 미국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던 그의 방랑자 같은 삶이 이꽃 저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나비의 삶과 무척이나 닮았었고, 그의 나비 같은 삶이 <롤리타>에서 어린 소녀 ‘로’와 함께 미국 전역을 누비면서 험버트의 광기어린 사랑으로 표출되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롤리타>를 읽으면서 세상과 등장인물들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언어적 유희 못지않게 시점의 변화 또한 이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험버트는 소설에서 ‘나’라는 1인칭으로도, ‘험버트’라는 3인칭으로도 불린다. ‘나’와 ‘험버트’를 넘나들며 이 소설의 주인공인 ‘험버트’는 이 소설의 작가이자 주인공의 행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누가 쓴 소설이던가? 바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쓴 소설이고, ‘험버트’는 ‘나보코프’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아니던가? ‘험버트’를 나보코프와 동일시하는 순간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헷갈리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나보코프’가 쳐놓은 또다른 덫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롤리타>를 읽으면서 순간순간 저자 행세를 하는 험버트를 잡아내지 못한다면 나보코프의 비웃음을 책을 통해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것은 내 곁에 롤리타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화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495쪽 中)
책 서문부터 독자들을 농락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지금에서야 완독할 수 있었음에 나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이번에도 읽다가 포기했더라면 <롤리타>는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한 한 남성의 변태적인 소설이자 소아성애자의 사랑을 거침없이 묘사한 쓰레기 같은 소설이었다고 자위하며 험버트에게 저주를 퍼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간적 상실감과 어린 시절의 나보코프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에 대한 부재, 그리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언어에 대한 상실감이 <롤리타>를 통해 주인공인 험버트의 광기어린 사랑에 투영됐다고 말하고 싶다. 더 나아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엔 그가 그리워한 추억들을 숨긴 채 여기 저기에 덫을 놓고 순진한 나비들을 아름다운 꽃으로 유혹하고 있는 나보코프가 있을 뿐이다. <롤리타>가 포르노그래피적인 소설이자 비윤리적인 소설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보코프는 언어유희(言語遊戱)라는 페르소나 속에서 ‘큭큭’ 하고 비웃으면서 독자들을 조롱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