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 : 원색의 마술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6
그자비에 지라르 지음 / 시공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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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책읽기를 게을리 해서 많은 양의 책이 밀려 있다. 아침부터 상당히 많은 눈이 내렸다. 기쁘다. <마티스> 찾아서 내 마음속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은 쉽지만 않다. 오늘 아침의 눈이 분명 선명하게 발자국을 남겨 주리라 믿는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거칠고 원색적인 색채에서 착안한 마티스의 그림은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된다. 그의 작품 전체에서 느끼는 감흥은 순수 그것 자체이다. 작품[춤]을 보면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마치 한 마리 나비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거친 붓의 터치가 주는 느낌은 마치 아프리카 평원에 온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야수파? 간단하지만 않아서 화풍에 대해 언급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거칠다. 원색적이다. 보색대비를 잘 활용하는 작가[마티스] 그 거친 표현기법은 길들여지지 않은 한 마리 야생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말은 생동감 있고, 길들여지지 않은 난폭함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좀처럼 방향을 잡을 수가 없지만 그의 발놀림은 정교하게 계산 된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면서 한 마리 다크 호스가 태어나는 것처럼...

[마티스]는 인상파와 야수파. 그리고 큐비즘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사실적인 것과는 거리감이 있고 색채와 표현기법에 있어서는 추상적 면이 강해서 기존의 질서를 뛰어넘는 놀라운 도전이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예술가가 태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의 시간이 오래 반복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확한 구성을 통해서 표현하는 그의 배치를 보면 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목욕하는 세 여인>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기법에 그것은 세잔에서 영향을 받아 피카소에게 전해 준 듯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예술은 그만큼 자기 자신의 육체를 갉아먹는 힘든 일임에도 우리는 한 사람의 끊임없는 노력의 성과를 쉽게 간과하기 쉽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단순함 속에서도 강한 질서를 찾아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배치의 균형은 놀란 만큼 정밀한 것이어서 우리들에게 그림을 보는 안정된 눈을 가지게 한다. 마티스의 그림은 분명 단순화하는 의도가 다분히 내재되어 있음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 갖는 놀랄만한 구성력은 익히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실험과 과거의 습득을 통해서 이룩한 그의 예술세계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빠지게 한다. 거칠고 단순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마치 어린시절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나를 볼 것만 같은 향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그의 그림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한 그의 조각들에서도 그와 같은 이미지를 함께 느끼고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그림들은 사실 우리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을 지는 모르지만 진한 감동을 선사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오늘 기회가 된다면 마티스를 만나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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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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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갈등을 예감하게 한다. [다섯째 아이]-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이상의 오감도 중-

[다섯째 아이]-데이비드와 헬리엇은 많은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길 원한다. 적어도 다섯째 아이-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진행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정에 벤이 태어나면서부터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어지기 시작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벤은 아이 때부터 폭력적이고 아둔한 성격을 가진 아이다. 그가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데이비드와 헬리엇이 추구하는 행복은 다분히 추상적인 단어로 전락해 버린다.

다섯 째 아이[벤]과 그 가족들간의 갈등의 원인은 벤의 폭력성과 난폭함이 가족 구성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인간은 다분히 자신과 동화하지 않거나 동질화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처럼...... 일상성과 동떨어진 것에 대한 두려움은 마침내 자신들의 자유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결속력을 앗아가는 매개체가 되어 순식간에 평화롭던 그의 가족에게 이별이라는 필연적인 선물을 선사한다.

분명 뭔가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벤] -레싱이 말하는 유전자의 상징적 의미는 이질적인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와 폭력성 그리고 난폭함이라는 변형 유전자가 분명 다른 세계와의 갈등을 야기 시키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행복은 [벤]이 태어나면서 모두 허상이 되어 버린다. 남편은 돈버는 기계가 되고 아내는 아내대로 스트레스를 받고,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각각의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가고 마침내 모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간다. 모든 원인은 벤이 태어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대 의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난무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과 너무나 밀접한 사회적 현상들이 아닌가?

나는 벌써13년 째 타지에 와서 살고 있다. 그것이 어떤 문제를 동반해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가족을 구성하면서 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데이비드와 헬리엇은 그 쉬울 것 같던 작은 소망이 산산이 무너진다. 그리고 각각의 일상적인 삶에서 점점 더 대화마저 없다.-그것이 바로 현실의 우리들이고 앞으로 우리들이 겪어야할 필연적인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남성들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 같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눈 여겨 보아야할 부분은 대략적으로 이렇다. 헬리엇이 아직까지 성 경험이 없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시대적인 반응을 서술한 부분(그 여자는 사실 부도덕해, 그 여자는 남자에 미쳤어,-과거의 견해, 현재의 견해- 아마도 어린 시절 무슨 일이 있었을 거야. 안됐어-그러나 헤리엇은 단지 아무 남자와 뒹구는 것이 싫을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많은 아이를 낳고, 가족끼리 끈끈한 유대를 통하여 함께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했던 헤리엇과 데이비드. 그러나 [벤]이 태어나면서 맞이하게 되는 문제, 그리고 가족 개개인이 겪는 상처가 그들 가정의 행복을 앗아가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벤]은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먹고, 마시는 일 그리고 지나치게 어떤 대상에 집착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폭력적이다.-(현대인은 누구도 자신의 삶의 자유을 억압당하거나 희생할 여지가 없으므로)

이 작품은 별 특이한 점은 없다. 단지 우리들의 현실과 너무나 밀접한 나머지 읽는 내내 답답한 감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헬리엇은 인정하게 된다. 모든 것이 정리되어지고 나면 데이비드와 단 둘이 새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들도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통의 가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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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 : 무희의 화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5
앙리 루아레트 지음, 김경숙 옮김 / 시공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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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서양화)은 유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시대적 흐름에 따라서(시대가 요구하는) 변화, 발전한 것이 미술사가 아닌가. 그래서 쿠르베에서 백남준까지 현대미술사의 한 단면을 세세히 검토해보고 음미해 보는 일은 그만큼 의미있고 재미있는 일이다. 미술을 알면 역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세의 세계관부터 현재 유럽의 세계관까지 알 수 있는 것이 매력인 것 같다. 내 견해로는 문학, 세계사. 정치. 경제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인 것 같다.

지금부터 드가의 작품을 훔쳐보기로 하자. 인상파는 자연과 빛의 전도사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면 자연과 빛의 동작을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상을 묘사하는 작가들의 모임. 또는, 빛의 변화를 연구하는 색채의 과학자.

시공 디스커버리총서에서 만난 드가는 아무래도 작아 보였다. 단순히 책의 크기가 아니라 느낌의 작음이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맨 처음 문예사조사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가장 쉽게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 미술사였다.(그때 그 당시의 세계관에 따른 미술의 변화 그리고 대중들의 변화. 그리고 유럽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하는 프랑스 혁명의 의의) 적어도 나는 그렇다. 유럽의 역사를 일일이 알기보다는 그 당시의 화단의 성향과 움직임 그리고 혁신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들 그에 따르는 경제, 정치, 사회 전반의 변화를 파악하는 즐거움을 미술사에서 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먼저 시공 디스커버리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접하지 않았으면 하는 노파심이 든다. 차라리 드가의 전기라고 말하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시공사의 마케팅의 승리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만 아무튼 내용에 있어서는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다. 사실 드가는 실제적인 인물의 묘사(실제적인 시민과 가까운 친인척-근대적인 인물들을 묘사했다) 드가는 점이지대에 있던 작가라고 보면 될까?(고전과 현대) 아무튼 그는 고전의 연구를 통하여 자신만의 근대적 감각을 표현한 화가-이를테면 溫故知新의 교훈을 잘 실천한 대표적인 작가라고나 할까? 자신만의 새로운 대상과 이론을 발휘하는 힘이 드가에게는 있었다. 그것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그는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들의 무대 연습실의 장면,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당시의 인물들을 사실적이고 실제적으로 그려낸 그의 집요한 통찰력을 그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미대를 다니는 동생을 통하여 값비싼 화집을 보아온 탓도 있겠지만 시공사의 책은 그다지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적어도 드가를 접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인상파 화가들과 당시의 화단의 기류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시공 디스커버리총서에서도 상당 부분 언급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보다 깊이를 탐익하고 싶어하는 독자라면 도서관에서 드가의 화집을 보거나 보다 세밀하고 밀도 있게 서술해 놓은 현대 미술사를(구체적으로 출판사는 모르지만) 접해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끊임없는 열정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드가- 그런 이유로 우리는 선인들의 높은 열정을 답보하고 교훈으로 삼는 일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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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유곽에서 (구) 문지 스펙트럼 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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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유곽에서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남해 금산],[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작품들을 선별해 놓은 작품들이다. 추억과 몽상의 경계 속에서 흔들리는 소년(혹은 청년)의 화자가 등장한다.

구체적인 일들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화자는 정신적 분열현상을 가지고 있는 불안한 존재인 것 같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언급하기는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 속에서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는(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작품을 작품만 놓고 본다고 그 시대적 배경을 구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요즘의 비평이 아닌가? 그러나 완전히 그것을 배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았으면....../구토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 -口話 中

화자는 정신적 분열의 착란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아니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은 아니다. 그것을 현실로 보아야할 것인가? 어디론가 피하고 싶은 현실을 말하는 것인가? 아, 그러나 사회는 그리 밝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출애급]-어디로부터 구원을 말하는가? 그래서 치욕은 아름다운 걸까? 엘리엘리 죽지 말고......끊임없이 신을 찾으면서 구원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 신에 대한 귀의를 꿈꾸면서도 화자는 늘 고향을 떠나고, 자진해서 감옥을 가고,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을 따라서 돌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중략-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나는 남해금산에서부터 이성복의 작품이 연애시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화자는 마침내 그 어둡고 깜깜한 돌 속에서 그 사랑을 찾아서 미지의 세계로 배경을 이동한다.

돌은 현상학적으로 단단한 광석에 지나지 않은가? 이 광석 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무모한 행동에서 그 사랑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그리고 침전하는 바다 속에서 화자의 사랑은 잠기고 있다. 바다 속에서 돌의 무게만큼 무거운 사랑을 화자는 기꺼이 선택한다. 사랑은 어쩌면 추억과 함께 사는 지도 모른다. 이 한편의 시가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오이디푸스 콤플레스에 사로잡힌 화자가 앓아야하는 세상, 그렇기 때문에 소년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어쩌면 거꾸로 걷는 오리가 탄생했으면 하는 화자의 바램이 당연한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든 유곽에서는 이성복의 전체적인 시 패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복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정든 유곽에서]를 만나기보다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먼저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떤 싸움의 기록]- 화자는 사건에 대해서 극도로 자제하면서 대상과 거리를 유지한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가만히 걸어갔다. 소리질렀다.)화자가 대상에 접근하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사건의 정황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마침내 화자는 이 동네는 법도 없냐고 소리질렀다. 가족의 붕괴로도 볼 수 있고 흔들리는 가부장으로 볼 수 있겠지만 중심없이 표류하는 시대적인 환경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이성복의 시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과연 가부장적인 인간으로 극한 되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러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절함이 내재되어 있는 시들은 조용한 외침이 아니라 차라리 세상과 나와 가정 사회에 대한 절규의 외침인 것이다. 그러면서 삶을 한 단면을 바라보게 하는 묘한 매력들로 가득하다. 가령 [벽제]시를 보면 간단하게 말한다. 이별하기 어려우면 가보지 말아야할, 벽제 끊어진 다리.

그렇다. 이성복의 시에는 분명 현실의 아픔이 내재 되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전체를 두루 살펴보아야 그의 시에 대한 맛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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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현암사 동양고전
노자 지음, 오강남 풀어 엮음 / 현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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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통한 [도덕경]읽기와 해석은 많은 인내와 한자 실력을 필요로 했다. [도덕경]을 읽는 일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내용과 느낌 점에 있어서는 마음의 양식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BS를 통해서 간간이 강좌를 들어보기도 했지만 강사의 견해가 많이 들어가 큰 도움은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대학],[중용],[논어]의 잠언들(나는 이 책들을 인생의 잠언 집이라고 명명한다.)

배울 때는 상당히 지루한 경향이 있었지만 (물론 개인적인 욕심과 한문강좌를 수강하면서 시험이라는 필요에 따라서 잠정적인 외우기에 불과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도덕경]은 인간의 가치관과 자연관, 사회 그리고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고서라고 본다. 특히 [도덕경]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자연관(미국과 유럽)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대두되면서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 근래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책이다.

[도덕경]-제1장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모든 수식어를 불허하는 이 한 문장은 나를 [도덕경]에 빠지게 하는 문구였다.
-(명가명, 비상명)

希言自然(희언자연) 말이 없는 것이 자연이다.(제 2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지인자지,자지자명)-남을 아는 것은 지혜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명철함이다.(제33장)
無執故無失(무집고무실)(제 64장)-집착이 없으니 상실이 없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관과 인간사의 뚜렷한 차이점은 자연은 집착이 없고 말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자연은 넘치면 덜어낼 줄 알고 사람은 넘치더라도 그 욕심이 끝이 없으니 시사하는 바가 이렇듯 크다.

만물과 더불어 되돌아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대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반자도지동-즉 되돌아감이 도의 근원이다. 도는 일체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는 도=자연이라는 성립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보여주는 자연관은 이렇듯 순수한 원리를 통해서 아낌없이 주는 것이 자연이라고 본다. 그 동안 우리의 패러다임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위주로 형성되어온 가치관이었다면 현대는 개인주의 경향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단시되어 온 [도덕경]의 가치가 새롭게 재평가되어지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칫 각박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여유라도 주지 않을까?

아무튼[도덕경]은 새로운 가치관의 틀에서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세계가 변화하고 세계관이 이동하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새로운 지침서로 부각하고 있는 [도덕경]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은 준책이다.

세상은 나뿐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공간이다. 이 공동체의 공간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하고 대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독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현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 그리고 가치있는 삶의 방법을 모색해 나가기위한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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