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유곽에서 (구) 문지 스펙트럼 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정든 유곽에서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남해 금산],[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작품들을 선별해 놓은 작품들이다. 추억과 몽상의 경계 속에서 흔들리는 소년(혹은 청년)의 화자가 등장한다.

구체적인 일들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화자는 정신적 분열현상을 가지고 있는 불안한 존재인 것 같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언급하기는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 속에서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는(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작품을 작품만 놓고 본다고 그 시대적 배경을 구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요즘의 비평이 아닌가? 그러나 완전히 그것을 배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았으면....../구토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 -口話 中

화자는 정신적 분열의 착란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아니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은 아니다. 그것을 현실로 보아야할 것인가? 어디론가 피하고 싶은 현실을 말하는 것인가? 아, 그러나 사회는 그리 밝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출애급]-어디로부터 구원을 말하는가? 그래서 치욕은 아름다운 걸까? 엘리엘리 죽지 말고......끊임없이 신을 찾으면서 구원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 신에 대한 귀의를 꿈꾸면서도 화자는 늘 고향을 떠나고, 자진해서 감옥을 가고,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을 따라서 돌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중략-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나는 남해금산에서부터 이성복의 작품이 연애시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화자는 마침내 그 어둡고 깜깜한 돌 속에서 그 사랑을 찾아서 미지의 세계로 배경을 이동한다.

돌은 현상학적으로 단단한 광석에 지나지 않은가? 이 광석 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무모한 행동에서 그 사랑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그리고 침전하는 바다 속에서 화자의 사랑은 잠기고 있다. 바다 속에서 돌의 무게만큼 무거운 사랑을 화자는 기꺼이 선택한다. 사랑은 어쩌면 추억과 함께 사는 지도 모른다. 이 한편의 시가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오이디푸스 콤플레스에 사로잡힌 화자가 앓아야하는 세상, 그렇기 때문에 소년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어쩌면 거꾸로 걷는 오리가 탄생했으면 하는 화자의 바램이 당연한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든 유곽에서는 이성복의 전체적인 시 패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복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정든 유곽에서]를 만나기보다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먼저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떤 싸움의 기록]- 화자는 사건에 대해서 극도로 자제하면서 대상과 거리를 유지한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가만히 걸어갔다. 소리질렀다.)화자가 대상에 접근하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사건의 정황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마침내 화자는 이 동네는 법도 없냐고 소리질렀다. 가족의 붕괴로도 볼 수 있고 흔들리는 가부장으로 볼 수 있겠지만 중심없이 표류하는 시대적인 환경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이성복의 시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과연 가부장적인 인간으로 극한 되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러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절함이 내재되어 있는 시들은 조용한 외침이 아니라 차라리 세상과 나와 가정 사회에 대한 절규의 외침인 것이다. 그러면서 삶을 한 단면을 바라보게 하는 묘한 매력들로 가득하다. 가령 [벽제]시를 보면 간단하게 말한다. 이별하기 어려우면 가보지 말아야할, 벽제 끊어진 다리.

그렇다. 이성복의 시에는 분명 현실의 아픔이 내재 되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전체를 두루 살펴보아야 그의 시에 대한 맛을 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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