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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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을 읽는 내내 묘한 기시감에 사로 잡혔다. <오로라의 밤>을 읽을 때엔 옐로나이프의 오로라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던 내가 기억나는 것 같았고 <매화나무 아래>를 읽을 때엔 언니가 입원한 병원 앞에서 늙은 매화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 나는 수없이 많은 '나'를 보게 되었다. 오래된 이야기이자 새로운이야기인, 지나간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다가올 이야기이기도 한, <우리가 쓴 것>. 가끔 나는 이 책을 "내가 쓴 것"이라고 잘못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독이 아니다. <우리가 쓴 것>은 곧 수많은 '나'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써왔고 미래에도 써나갈 이야기이기 때문에.




언젠가 오로라를 보러 가겠다고 생각했다. 멈춰 있는 작은 사진 속 한 장면이 역동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내 삶에 깃드는 순간, 그때 또 다른 눈이 떠지겠지. 오래도록 설렜다. 하지만 계속 '언젠가'에 머물렀다. 아직 학생이다가, 돈이 없다가, 아이가 생겼다가, 아이가 어렸다가, 모든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시간이 없었다.

<우리가 쓴 것> p.198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소원, 계속 '언젠가'에 머물러 있던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캐나다로 떠난 며느리와 시어머니, 그리고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여성에게 강요된 모성애와 그렇지 않은 모성애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던 가시의 존재를 재차 확인하는 것처럼 따끔거린다. 그런 고통을 감각하게 될 때면 한숨 짓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정말 방법이 없다. 효경이 손자 한민이를 보기 싫다고 오로라에 소원을 빌 때에도, 아픈 아이를 하루만 봐달라고 부탁하는 딸에게 눈물을 참아가며 "오늘만이야"라고 말할 때에도. 나에게 강요된 것들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결국 눈물이 나고서야 내 마음이 잠잠해졌다. <오로라의 밤>을 읽고 또 읽었다. 오로라를 올려다보던 효경이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p.246)' 라며 맑고 개운한 눈물을 흘리던 때처럼 지금 이 세상의 모든 '효경'이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오로라의 밤'에 가닿게 되길 빌어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 위에 풀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예 엉엉 울었다. 어른이 된 후로 내가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울었던 적이 있었나. 소리 내서 울었던 적이 있었나. 억울함과 서운함, 고통과 후회로 사무친 눈물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눈물. 몸과 마음 속 모든 낡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

<우리가 쓴 것> p.246




"근데 승훈아, 나라면 싫을 것 같아. 아무것도 못하고 저렇게 누워만 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걸까요?"

(중략)

그럼 나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죽을 날을 향해 걸어가고만 있는 지금의 나는 의미가 있나.

<우리가 쓴 것> p.42




큰 언니 금주, 둘째 언니 은주, 그리고 막내인 주인공의 이름은 동주가 아닌 말녀이다. 말녀는 환갑이 한참 넘어서야 개명신청을 할 수 있었고 그제서야 '동주'가 되었다. 오래된 이야기같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 이야기라 낡거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개명하고 나서 동주 본인보다 더 벅찬 얼굴로 기뻐해주던 금주 언니가 치매 요양원 입원해 하루씩 늙고 죽어가고 있다. 금주 언니가 지내는 치매 요양원 1층의 창 너머에는 '쫓겨나고 떠밀리다 아무 데나 발을 붙인 늙은 나그네 같은' 매화나무가 서 있다. 매화나무의 하얀 꽃이 지기 전에도, 초록 잎으로 뒤덮였을 때에도 언니를 찾아갔지만 언니는 매번 왜 이제서야 왔냐고 꽃이 지기전에 꼭 오라고 말한다.



이제 알겠다. 금주 언니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

<우리가 쓴 것> p.45




금주언니는 이제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로 삶을 이어나가야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때가 되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동주는 병원을 나선다. 그리고 그 매화나무 앞에 선다. 오래 살아 낸 나무의 냄새를 맡으며, 벌레인가 싶었던 겨울눈을 발견한 동주의 눈 앞에서 봄의 광경이 펼쳐진다. 새하얀 꽃들이 늙은 나무를 뒤덮어 흐드러지게 만개할 벅찬 광경이, 이내 함박눈처럼 흩날릴 그 꽃잎들이. '꽃이 지기전에 꼭 다시 오라'던 금주언니의 말을 떠올리며 꽃이 눈이고 눈이 꽃임을,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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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폭력 - 고대 그리스부터 n번방까지 타락한 감각의 역사
유서연 지음 / 동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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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N번방 사건과 버닝썬 사건 등 IT기술의 발전에 기생해 진화해온 성범죄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응분의 죗값을 치르지 않는 성범죄자들을 보며, 과연 법이 이런 범죄를 막고자하는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생후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기부터 수많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음란물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은 웰컴투비디오의 손정우 사건은 또 어떤가. 날로 진화하는 성범죄를 따라잡지 못하는 낡아빠진 관련 법들, 솜방망이처벌 등이 이런 성범죄를 조장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빨리 제대로 된 법규 제정과 함께 수사 인력의 질적, 양적 확충 등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이런 제도적 개선은 사후적 해결방법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속도는 성범죄의 진화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데 있다. 저자는 시각의 폭력에 물든 이 사회에서 사후적 대책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각의 폭력과 이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인 측면으로 접근해 근본적인 해결방법을 찾는다.



디지털 성폭력의 기저에는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내려온 시각중심의 철학적 전통이 깔려 있다. 여성을 포함한 타인과 소수자를 시각적으로 대상화하고 통제하려는 '이성'에 근거해 이것이 여성혐오 등과 결합해 관음증의 폭발이라는 광기로 이어지는지를 짚어나간다.



프로이트는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의 제1장 <성적이상>에서 관음증과 노출증은 종이 한 장 차이임을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보는 즐거움이 성 목적으로 바뀌는 경우는 노출증 환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예전 한국의 여중 여고 앞에 출몰하곤 했던 '바바리맨'들의 노출증적 도착은 '나의 것을 보여주었으니 너의 성기도 보여다오'식의 호혜적 '봄'의 관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각종 SNS를 통해 과식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노출하고, 이를 절시증적 욕망을 가진 불특정 다수가 보고 소비하며 '좋아요'를 눌러주는 현상에서 심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각의 폭력>


많은 이들이 SNS로 타인의 일상을 엿보고 나의 일상을 노출한다. 자유롭게 사진을 찍고 일상을 공유하는 요즘, 어쩌면 언제라도 권력이 되고 폭력이 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타자와 주체가 연루됨을 거부한 채 은밀하고 탐욕스럽게 타자를 지배 통제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한계를 넘어서 여성을 비록한 타자, 자연과 생명에 공감하고 공존하려는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관음증적 시각이 아닌 촉각과 통감각적으로 연결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뜻이라는 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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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모양은 삼각형
양주연 지음 / 디귿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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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혼자'들의 독립생활 이야기를 소개하는 에세이 '디귿'시리즈. 두번째로 만나본 <행복의 모양은 삼각형>은 등산을 하며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틈새 행복'을 발견해가고, 나 자신을 진짜 사랑하는 법을 깨우쳐가는 이야기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다. 남들에게 쏟는 다정함과 너그러움의 절반을 나에게 쏟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내가 노력을 덜 해서, 살이 쪄서, 예쁘지 않아서, 능력이 부족해서, 스펙이 딸려서 원하는 걸 이루지 못했다고 너무 손쉽게 스스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쉽게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이 나 자신이므로.

<행복의 모양은 삼각형> p.31


우리나라의 75%가 산이라니, 등산의 재미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4분의 1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건가 싶어 억울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등산은 너무 싫었다. 애증의 대상도 아니고 애증의 '증'이라는 감정만 남은 등산. 회사다닐 때 분기별로 돌아오는 야유회때마다 제발, 제발 산에만 가지 않게 되길 바라고 또 바랐는데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에 좋다는 산에 가길 원하는 상사들을 모시고 도장깨기하듯 다녀왔다. 지금은 그 산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산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하산해 들어간 오리구이집에서 다들 얼큰하게 취했던 기억과 다음날 온 몸에 남았던 어마어마한 근육통뿐. 그리고 하나 더,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산 정상에서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광경과 아주 잠깐동안 내게 깃들었던 성취감! 정상에 오르자마자 단체 사진을 찍고, 무겁게 지고 올라갔던 먹을 것들을 내놓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때 아주 잠시 성취감이 깃들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저자가 등산에 빠진 게 이 성취감 때문이라고 하니, 왠지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상사에 대한 극심한 반감으로 등산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모든 고비를 넘기고 정상에 올랐을 때, 해냈다는 성취감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가득 차오른다.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토너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나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람, 원하는 곳에 의지와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야!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뿌듯함이 차올라 기분이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이 구역 자존감 왕이다. 등산을 하고 나면 스스로가 한층 좋아졌고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행복의 모양은 삼각형> p.31


저자가 등산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바로 작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의 맛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나 가혹하고 엄격하다. '내가 노력을 덜 해서, 살이 쪄서, 예쁘지 않아서, 능력이 부족해서, 스펙이 딸려'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책망하고 코너로 몰아간다. 그런 나 자신에게 스스로가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이뤄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아주 작은 것들을 성취해내면서, 그것을 성취해가는 과정을 즐기기도 하고 성취해나가는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등산을 하고 나면 나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필요한 건 현실을 변화시킬 큰 모험보다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틈새 행복'들이라는 것을. 아침에 숲길을 걸으며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엔 건강한 도시락을 준비하는 등 온전히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일상에서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알 수 있었다. 이 소소한 루틴들은 여행만큼 많은 것을 변화시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줬다. (중략) 행복이란 부단히 노력해서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매일을 살아내면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행복의 모양은 삼각형> p.57~58


'틈새 행복'이라는 말 참 좋았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 등산을 하며 작은 성취를 이루고 '틈새 행복'이 가득한 평범한 일상은, 우리에게 벅찬 감동이나 일생일대의 감화를 주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우리게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잡아준다. 행복이란 부단히 노력해서 달성하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 맛있게 먹은 식사, 푹 빠져 읽은 책 한 권, 포근한 이불 속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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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정옥희 지음, 강한 그림 / 엘도라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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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선수를 정말 좋아한다. 그녀가 마지막 참가한 올림픽에서 억울하고도 어이없게 금메달을 빼앗겼을 때 가슴이 참 아팠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엄청난 노력을 하더라도 마음 먹은 바를 이룰 수 없는 게 그 바닥의 생리라면 가령 능력이 부족한 15위 선수가 불공정한 방법으로 14등을 밟고 일어서는 일은 더 비일비재할 것이다. 불공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남을 밟고 일어서고 싶은 욕망은 사회 어디를 가나 존재하지만 가시적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그 사람을 즉각적으로 평가하고 노력여부를 박제하며, 주연만 대우받는 세상에서 순위권 바깥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속내가 궁금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발레리나, 그 뒤에서 그녀들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준 코르 드 발레들의 이야기, 그들이 흘린 피와 땀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로 만나 보았다.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뒷맛이 씁쓸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좀 더 낮은 곳, 좀 더 가려진 곳, 좀 더 침묵하는 곳에 절로 눈길이 갔다. 어떤 분야를 보더라도 가장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코르 드 발레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그들은 관객들이 프리마 발레리나만 바라보더라도 묵묵히 최선을 다해 춤을 추는 성실함과 겸손함을 갖췄다. 또한 수년간 반복하며 몸으로 익힌 노련함을 지녔다. 우리 대부분은 코르 드 발레이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p.74


발레를 전공한 저자는, 스스로가 발레리나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여덟 살 때부터 발레 학원을 다니기 시작해 발레 전공으로 대학 무용과에 입학했고 프로페셔널 발래단에서 활동했지만 발레리나와 발레를 전공한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한다. 저자에게 '발레'란 땀에 절어 소금이 더께 앉은 레오타드, 발가락을 종이 테이프로 칭칭 감고 파스 냄새와 땀 냄새로 기억된다고. 화려한 무대위에, 핀 조명을 받고 서 있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 그 뒤에 선 조명조차 비추지 않지만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코르 드 발레. 아마 우리 대부분은 코르 드 발레가 아닐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스타 플레이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의 입에 회자될만큼 낭중지추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 그들이 사회를 변혁시킬지는 몰라도 이 사회가 변함없이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주변에서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열심히 해내는 '코르 드 발레'들의 성실함 덕분이 아닐까. 누가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아도 코르 드 발레의 무대는 계속되어야 한다. 설혹 무대에서 크게 실수하여 울면서 집에 걸어갔더라도 다음 날엔 여느 날과 같은 모습으로 연습실에 들어가야한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코르 드 발레들처럼 말이다.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수플레가 푹 꺼지는 순간, 그 순간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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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집 연대기 - 일생에 한번 자기만의 삶의 리듬을 찾는 경이로운 시간
박찬용 지음 / 웨일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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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허탈하게 만든다.(p.314)" 10년간 은행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이 차고 넘치는 만큼 부유한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전으로부터 최고장을 받고도 요금을 납부하지 못해 전기가 끊겨버렸고 그중 일부만이라도 납부하기위해 몇 천원을 들고 은행에 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반 입출식 통장 금액란이 부족할 정도의 자릿수를 여유자금으로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수수료 몇 천원에 분노했던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었다)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부와 빈의 틈바구니에 서서 나는 늘 허탈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엔 너무도 많다. 특히 한강뷰,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 1점에 몇 천만원 하는 의자, 3억도 넘는 아파트 한 채 값의 슈퍼카 등등.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끝없는 허탈감에 허우적대기보단 <첫 집 연대기>의 저자처럼 나름의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거의 환타지에 가까운 이상향의 집을 찾아나섰다가 결국 월세와 보증금을 합한 돈보다 더 큰 돈을 들여 만들어나가는 저자의 눈물겨운 탐험기! 출장을 위해 찾은 스웨덴에서 발견한 원목의자를 우편으로 부치기 위해 비오는 날, 박스를 찾아 스웨덴 거리를 헤맸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담긴 <첫 집 연대기>를 소개해본다.



일도 사랑도 잔고도 확실하지 않으니 내 자신이 약해진 잇몸 속에서 흔들리는 이가 된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선 늘 멍했고 어떤 면에서는 늘 뾰족해져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 글귀를 보게 되었다. 사람이 바뀌려면 사는 곳이 바뀌어야 한다, 같은 그런 글귀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 없는 잠언들은 대부분 쌀로 밥하는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말은 이상할 정도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첫 집 연대기> p.27


시작은 인터넷에 떠도는 '사람이 바뀌려면 사는 곳이 바뀌어야 한다.'는 문구였다. 그 문구는 마법 혹은 저주(?)처럼 저자를 매혹시켰고 정신을 차려보니 오래된 집을, 그것도 월세와 보증금을 합친 금액보다 더 큰 공사비를 들여 고치고 있었다. 구조가 좀 많이 이상했지만 단독 주택이 즐비한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그것도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의 월세집, 저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집을 만들어 나간다. 핑크톤의 이탈리아산 타일(그냥 재고도 아니고 악성 재고)를 깔았고 원목 마루를 찾아 온갖 온라인 카페란 카페는 다 뒤졌으나 (주인 할머니가 그가 집에 없는 사이 그냥 장판을 깔아버셔서)실패했다. 과감하게 냉장고와 정수기, 조리대를 포기했지만 정원을 갖게 되었다.



그 집에 책을 나르던 초여름 밤이 '단독주택의 스위트 스폿'같은 기분이었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창밖에는 마당에 심은 감나무의 꼭대기가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도로의 불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이파리의 진한 초록빛이 숨길 수 없는 생명력을 반짝이며 드러냈다.

<첫 집 연대기> p.187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유치한데 내가 이 집에서 바랐던 건 특정한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란 그냥 음악을 켜두고 책을 읽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걸 구현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디오를 올려둘 책상도 하나 없었다. 이사 갈 때 샀던 이케아 종이 상자 위에 앰프를 올려두고 스피커는 그냥 바닥에 두었다. 라디오 안테나가 온 날 그걸 연결해서 천장 근처, 전 입주자가 박아둔 못에 걸어두었다. 치지직 소리만 나던 앰프에 안테나를 연결하자 정제된 물처럼 깨끗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없던 방에 소리가 채워질 때의 그 느낌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렇게 작은 순간들이 혼자 집을 채울 때의 위안과 기쁨이 되었다.

<첫 집 연대기> p.219


요즘은 점점 내 취향을 잃어가는 것 같다. 내 취향에 맞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가격, 가성비즉 현실적인 측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 정도 가격에 이 퀄러티면..' 이라는 말로 내 취향 따위는 쉽게 뭉개버린다. 경제적 부담과 취향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예산안에서 편함을 택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그런 시류가 대세가 된 지금, 자신의 취향에 맞는 집을 찾아 나서고, 용감히 대세를 거스르는 저자에게 박수를!! 획일화, 규격화, 평균화된 취향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가격이 너무 오른다. 똑같은 모양과 구조를 가진 아파트, 그 속에 채워진 비슷한 모양의 가구와 가전제품까지 집집마다 인테리어가 다 거기서 거기인 이유는 바로 비용과 효용에 따른 경제적 논리 탓이 아닐까. 나만의 취향을 위한 집을 찾아내고, 또 만들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멋지다. 아마 나는 도저히 해낼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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