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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우리가 쓴 것>을 읽는 내내 묘한 기시감에 사로 잡혔다. <오로라의 밤>을 읽을 때엔 옐로나이프의 오로라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던 내가 기억나는 것 같았고 <매화나무 아래>를 읽을 때엔 언니가 입원한 병원 앞에서 늙은 매화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 나는 수없이 많은 '나'를 보게 되었다. 오래된 이야기이자 새로운이야기인, 지나간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다가올 이야기이기도 한, <우리가 쓴 것>. 가끔 나는 이 책을 "내가 쓴 것"이라고 잘못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독이 아니다. <우리가 쓴 것>은 곧 수많은 '나'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써왔고 미래에도 써나갈 이야기이기 때문에.
언젠가 오로라를 보러 가겠다고 생각했다. 멈춰 있는 작은 사진 속 한 장면이 역동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내 삶에 깃드는 순간, 그때 또 다른 눈이 떠지겠지. 오래도록 설렜다. 하지만 계속 '언젠가'에 머물렀다. 아직 학생이다가, 돈이 없다가, 아이가 생겼다가, 아이가 어렸다가, 모든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시간이 없었다.
<우리가 쓴 것> p.198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소원, 계속 '언젠가'에 머물러 있던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캐나다로 떠난 며느리와 시어머니, 그리고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여성에게 강요된 모성애와 그렇지 않은 모성애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던 가시의 존재를 재차 확인하는 것처럼 따끔거린다. 그런 고통을 감각하게 될 때면 한숨 짓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정말 방법이 없다. 효경이 손자 한민이를 보기 싫다고 오로라에 소원을 빌 때에도, 아픈 아이를 하루만 봐달라고 부탁하는 딸에게 눈물을 참아가며 "오늘만이야"라고 말할 때에도. 나에게 강요된 것들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결국 눈물이 나고서야 내 마음이 잠잠해졌다. <오로라의 밤>을 읽고 또 읽었다. 오로라를 올려다보던 효경이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p.246)' 라며 맑고 개운한 눈물을 흘리던 때처럼 지금 이 세상의 모든 '효경'이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오로라의 밤'에 가닿게 되길 빌어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 위에 풀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예 엉엉 울었다. 어른이 된 후로 내가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울었던 적이 있었나. 소리 내서 울었던 적이 있었나. 억울함과 서운함, 고통과 후회로 사무친 눈물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눈물. 몸과 마음 속 모든 낡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
<우리가 쓴 것> p.246
"근데 승훈아, 나라면 싫을 것 같아. 아무것도 못하고 저렇게 누워만 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걸까요?"
(중략)
그럼 나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죽을 날을 향해 걸어가고만 있는 지금의 나는 의미가 있나.
<우리가 쓴 것> p.42
큰 언니 금주, 둘째 언니 은주, 그리고 막내인 주인공의 이름은 동주가 아닌 말녀이다. 말녀는 환갑이 한참 넘어서야 개명신청을 할 수 있었고 그제서야 '동주'가 되었다. 오래된 이야기같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을 이야기라 낡거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개명하고 나서 동주 본인보다 더 벅찬 얼굴로 기뻐해주던 금주 언니가 치매 요양원 입원해 하루씩 늙고 죽어가고 있다. 금주 언니가 지내는 치매 요양원 1층의 창 너머에는 '쫓겨나고 떠밀리다 아무 데나 발을 붙인 늙은 나그네 같은' 매화나무가 서 있다. 매화나무의 하얀 꽃이 지기 전에도, 초록 잎으로 뒤덮였을 때에도 언니를 찾아갔지만 언니는 매번 왜 이제서야 왔냐고 꽃이 지기전에 꼭 오라고 말한다.
이제 알겠다. 금주 언니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
<우리가 쓴 것> p.45
금주언니는 이제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로 삶을 이어나가야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때가 되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동주는 병원을 나선다. 그리고 그 매화나무 앞에 선다. 오래 살아 낸 나무의 냄새를 맡으며, 벌레인가 싶었던 겨울눈을 발견한 동주의 눈 앞에서 봄의 광경이 펼쳐진다. 새하얀 꽃들이 늙은 나무를 뒤덮어 흐드러지게 만개할 벅찬 광경이, 이내 함박눈처럼 흩날릴 그 꽃잎들이. '꽃이 지기전에 꼭 다시 오라'던 금주언니의 말을 떠올리며 꽃이 눈이고 눈이 꽃임을,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