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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집 연대기 - 일생에 한번 자기만의 삶의 리듬을 찾는 경이로운 시간
박찬용 지음 / 웨일북 / 2021년 2월
평점 :

"삶은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허탈하게 만든다.(p.314)" 10년간 은행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이 차고 넘치는 만큼 부유한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전으로부터 최고장을 받고도 요금을 납부하지 못해 전기가 끊겨버렸고 그중 일부만이라도 납부하기위해 몇 천원을 들고 은행에 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반 입출식 통장 금액란이 부족할 정도의 자릿수를 여유자금으로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수수료 몇 천원에 분노했던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었다)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부와 빈의 틈바구니에 서서 나는 늘 허탈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엔 너무도 많다. 특히 한강뷰,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 1점에 몇 천만원 하는 의자, 3억도 넘는 아파트 한 채 값의 슈퍼카 등등.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끝없는 허탈감에 허우적대기보단 <첫 집 연대기>의 저자처럼 나름의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거의 환타지에 가까운 이상향의 집을 찾아나섰다가 결국 월세와 보증금을 합한 돈보다 더 큰 돈을 들여 만들어나가는 저자의 눈물겨운 탐험기! 출장을 위해 찾은 스웨덴에서 발견한 원목의자를 우편으로 부치기 위해 비오는 날, 박스를 찾아 스웨덴 거리를 헤맸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담긴 <첫 집 연대기>를 소개해본다.
일도 사랑도 잔고도 확실하지 않으니 내 자신이 약해진 잇몸 속에서 흔들리는 이가 된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선 늘 멍했고 어떤 면에서는 늘 뾰족해져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 글귀를 보게 되었다. 사람이 바뀌려면 사는 곳이 바뀌어야 한다, 같은 그런 글귀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 없는 잠언들은 대부분 쌀로 밥하는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말은 이상할 정도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첫 집 연대기> p.27
시작은 인터넷에 떠도는 '사람이 바뀌려면 사는 곳이 바뀌어야 한다.'는 문구였다. 그 문구는 마법 혹은 저주(?)처럼 저자를 매혹시켰고 정신을 차려보니 오래된 집을, 그것도 월세와 보증금을 합친 금액보다 더 큰 공사비를 들여 고치고 있었다. 구조가 좀 많이 이상했지만 단독 주택이 즐비한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그것도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의 월세집, 저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집을 만들어 나간다. 핑크톤의 이탈리아산 타일(그냥 재고도 아니고 악성 재고)를 깔았고 원목 마루를 찾아 온갖 온라인 카페란 카페는 다 뒤졌으나 (주인 할머니가 그가 집에 없는 사이 그냥 장판을 깔아버셔서)실패했다. 과감하게 냉장고와 정수기, 조리대를 포기했지만 정원을 갖게 되었다.
그 집에 책을 나르던 초여름 밤이 '단독주택의 스위트 스폿'같은 기분이었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창밖에는 마당에 심은 감나무의 꼭대기가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도로의 불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이파리의 진한 초록빛이 숨길 수 없는 생명력을 반짝이며 드러냈다.
<첫 집 연대기> p.187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유치한데 내가 이 집에서 바랐던 건 특정한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란 그냥 음악을 켜두고 책을 읽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걸 구현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디오를 올려둘 책상도 하나 없었다. 이사 갈 때 샀던 이케아 종이 상자 위에 앰프를 올려두고 스피커는 그냥 바닥에 두었다. 라디오 안테나가 온 날 그걸 연결해서 천장 근처, 전 입주자가 박아둔 못에 걸어두었다. 치지직 소리만 나던 앰프에 안테나를 연결하자 정제된 물처럼 깨끗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없던 방에 소리가 채워질 때의 그 느낌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렇게 작은 순간들이 혼자 집을 채울 때의 위안과 기쁨이 되었다.
<첫 집 연대기> p.219
요즘은 점점 내 취향을 잃어가는 것 같다. 내 취향에 맞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가격, 가성비즉 현실적인 측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 정도 가격에 이 퀄러티면..' 이라는 말로 내 취향 따위는 쉽게 뭉개버린다. 경제적 부담과 취향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예산안에서 편함을 택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그런 시류가 대세가 된 지금, 자신의 취향에 맞는 집을 찾아 나서고, 용감히 대세를 거스르는 저자에게 박수를!! 획일화, 규격화, 평균화된 취향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가격이 너무 오른다. 똑같은 모양과 구조를 가진 아파트, 그 속에 채워진 비슷한 모양의 가구와 가전제품까지 집집마다 인테리어가 다 거기서 거기인 이유는 바로 비용과 효용에 따른 경제적 논리 탓이 아닐까. 나만의 취향을 위한 집을 찾아내고, 또 만들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멋지다. 아마 나는 도저히 해낼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