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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정옥희 지음, 강한 그림 / 엘도라도 / 2021년 5월
평점 :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선수를 정말 좋아한다. 그녀가 마지막 참가한 올림픽에서 억울하고도 어이없게 금메달을 빼앗겼을 때 가슴이 참 아팠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엄청난 노력을 하더라도 마음 먹은 바를 이룰 수 없는 게 그 바닥의 생리라면 가령 능력이 부족한 15위 선수가 불공정한 방법으로 14등을 밟고 일어서는 일은 더 비일비재할 것이다. 불공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남을 밟고 일어서고 싶은 욕망은 사회 어디를 가나 존재하지만 가시적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그 사람을 즉각적으로 평가하고 노력여부를 박제하며, 주연만 대우받는 세상에서 순위권 바깥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속내가 궁금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발레리나, 그 뒤에서 그녀들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준 코르 드 발레들의 이야기, 그들이 흘린 피와 땀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로 만나 보았다.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뒷맛이 씁쓸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좀 더 낮은 곳, 좀 더 가려진 곳, 좀 더 침묵하는 곳에 절로 눈길이 갔다. 어떤 분야를 보더라도 가장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코르 드 발레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그들은 관객들이 프리마 발레리나만 바라보더라도 묵묵히 최선을 다해 춤을 추는 성실함과 겸손함을 갖췄다. 또한 수년간 반복하며 몸으로 익힌 노련함을 지녔다. 우리 대부분은 코르 드 발레이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p.74
발레를 전공한 저자는, 스스로가 발레리나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여덟 살 때부터 발레 학원을 다니기 시작해 발레 전공으로 대학 무용과에 입학했고 프로페셔널 발래단에서 활동했지만 발레리나와 발레를 전공한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한다. 저자에게 '발레'란 땀에 절어 소금이 더께 앉은 레오타드, 발가락을 종이 테이프로 칭칭 감고 파스 냄새와 땀 냄새로 기억된다고. 화려한 무대위에, 핀 조명을 받고 서 있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 그 뒤에 선 조명조차 비추지 않지만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코르 드 발레. 아마 우리 대부분은 코르 드 발레가 아닐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스타 플레이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의 입에 회자될만큼 낭중지추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 그들이 사회를 변혁시킬지는 몰라도 이 사회가 변함없이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주변에서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열심히 해내는 '코르 드 발레'들의 성실함 덕분이 아닐까. 누가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아도 코르 드 발레의 무대는 계속되어야 한다. 설혹 무대에서 크게 실수하여 울면서 집에 걸어갔더라도 다음 날엔 여느 날과 같은 모습으로 연습실에 들어가야한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코르 드 발레들처럼 말이다.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수플레가 푹 꺼지는 순간, 그 순간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