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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프 도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7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평점 :

온다 리쿠는 장르적 규정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작가다. <에피타프 도쿄>는 소설, 논픽션, 에세이, 희곡까지 장르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완성된 이야기로 온다 리쿠적 글쓰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 이야기는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태피스트리 같다. 지어지는 존재 밖에 또 다른 층으로 지어지는 존재가 있고 그렇게 층층히 정교하게 지어진 이야기들은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들어 허구적이면서도 기묘한 리얼리티를 제공한다. 엄청난 인파가 넘쳐나는 거리에 그림자도 없고, 상점의 유리에도 비치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어쩐지 있을 것만 같다.
'그때가 좋았다.'
도쿄의 묘비명으로 어떨까?
'그때가 좋았다.'
도시는 언제나 과거가 더 나았다.
<에피타프 도쿄> p.35
옛말에 있듯이 벚나무 밑에는 귀신이 서고 시체가 묻혀 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 아닐까. 또는 죽은 사람이 꽤 많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문득 또 한 구절이 떠올랐다.
'꽃 밑에서.'
도쿄의 묘비명으로 이건 어떨까.
어둠 속에 피었다가 떠나가는 이들의 기억과 함께 진다. 그런 게 유적으로 발굴된 도쿄에 어울리지 않을까.
<에피타프 도쿄> p.38
에피타프는 묘비명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을 기리는 짧은 문구를 말한다. '에피타프 도쿄'는 도쿄라는 도시의 묘비명이자 K가 집필중인 희곡의 제목이다. K와 요시야의 이야기가 담긴 '피스(piece)'와 요시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드로잉', 그리고 K가 쓰고 있는 희곡 '에피타프 도쿄'까지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교차된다.
한 술집의 단골인 요시야와 K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요시야가 '흡혈귀'라는 비밀을 나누게 됐고 그것을 계기로 함께 도쿄의 묘비명을 찾아 도시를 배회한다. K가 쓰는 희곡 <에피타프 도쿄>는 여성 살인청부업자 단체의 이야기이다. 이른 오후 낡은 아파트의 부엌에서 A, B, C, D, E, F 가 모여 도시락을 싸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봉사 활동을 위해 모인 듯하지만 이들은 서로 낯선 관계다. 이들에게 일감을 소개해주는 G는 늘 예쁘고 맛있는 과자를 준비한다. 인원수에 맞춰 산 과자에 특별한 표식을 하나 넣고 과자를 랜덤으로 돌려 표식이 있는 과자 상자를 받은 사람이 일감을 받게 된다. 다들 페이가 큰 일감을 원하면서도 누군가를 살해해야한다는 건 끔찍하게 여긴다. G는 도쿄가 과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부엌에 서서 고급스럽고 멋진 과자를 먹으며 그것을 간절히 바라기도, 동시에 바라지 않는다.
"그림책이나 동화에서 끝을 맺는 문장으로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는 게 있잖습니까? 그게 영 찝찝한 겁니다."
"왜요?"
"모순되잖아요. '언제까지고'는 '영원히'라는 뜻인데 '살았습니다'는 과거형, 영원이 끝났죠. 모순 아닌가요?"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는 더 이상하지 않아요? '언제까지고'가 '영원히'라면 '살고 있습니다'는 현재진행형. 미래는 아직 알 수 없으니까 '영원히'는 유보되는 셈이에요. 이것도 모순이죠."
<에피타프 도쿄> p.307~308
K와 요시야는 길을 걷다 뜬금없이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가진 모순에 대해 견해를 나눈다. K는 어떻게 수정을 해도 모순적인 이 문장이 사실은 요시야 같은 불멸의 존재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냐며 질문을 던진다. 요시야와 같은 존재들이야말로 영원불멸의 존재인데 과거의 인격은 각자 완결되는 것이 아니냐며, 그들에게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란 표현은 모순이 아닌 것 같다고. 순순히 긍정하던 요시야는 '행복하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거라고 다시 말을 더한다.
K가 도쿄에 어울리는 묘비명을 찾는 이유는 그의 희곡에 붙일 이름을 위해서였다.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희곡 역시 미완이다. 온다 리쿠의 <에피타프 도쿄>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K의 희곡 <에피타프 도쿄>는 아직 진행중일 것이다. 온다 리쿠가 K의 몸 안으로 들어가 완성할 <에피타프 도쿄>는 어쩐지 기묘하면서도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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