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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평점 :

<하버드 스퀘어>는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르겠던 시절, 아마도 '청춘'이나 '젊은 날' 정도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그때의 모든 것이 담긴 소설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했음이 틀림없지만 당시엔 감히 사랑한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과 감각 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아름답지만 돌아갈 수 없는 여름날, 아니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시절은 가슴 한 편에 뭉근한 통증으로 남아 있었다. 그 통증은 <하버드 스퀘어>를 읽으며 나에게 다시 찾아왔다.
아버지는 여길 좋아했었어요?
나는 그랬다고 대답했다. 아주 좋아했었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좋아했었다는 뜻이었다.
"졸업하고 나서야 이곳을 좋아하게 됐지."
<하버드 스퀘어> p.17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아들과 함께 여름 캠퍼스 투어 중이었다. 푹푹 찌는 여름날 함께 하버드 캠퍼스를 둘러보던 아들이 '나'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여길 좋아했었어요?" 모든 게 신기루일지 모른다는 불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모래에 그린 선이 아니라 산골짜기처럼 느껴졌던 그때, 눈앞에 파티가 펼쳐져 있는데 초대받지 못한 느낌에 괴로워하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곳은 그에게 삶의 터전이 아니었고, 그의 고향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아니었고, 그가 될 수도 없었던 곳이다. 1977년의 케임브리지, 그곳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누군가를 생각해낸다.
7월 말 방학을 맞아 텅 빈 하버드 캠퍼스에 거의 홀로 남겨지다시피한 '나'는 영문학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첫 번째 종합시험에 떨어졌고 딱 한 번의 재시험 기회가 남아 있었다. 17세기 문학에 관한 모든 책을 육 개월에 걸쳐 다시 읽기로 결심한 뒤 어느 날, 카페 알제에 죽치고 앉아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무슨 주제든 상관없이 랩을 하듯 따다다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주머니가 많이 달린 빛바랜 군복 윗도리를 입은 많아야 서른네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의 이름은 칼라지였다. 그는 노란색 체커 택시를 모는 택시 운전사로 낮 동안은 카페 알제를 비롯한 하버드 광장을 돌며 여자를 꼬시고 밤에는 택시 운전대를 잡으며 돈을 벌었다.
그는 택시운전사였고 나는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다. 그는 아랍인이었고 나는 유대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즉시 역할을 바꿔서 살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등 떠밀려 시작한 방랑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행성에 속해 있었지만 나는 이 행성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세상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이해했다. 누군가 그를 힘껏 밀쳐도 그는 곧 중심을 잡고 자기가 갈 방향을 찾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도 항상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고 항상 뒤처진 느낌이었다.
<하버드 스퀘어> p.74
칼라지와 함께 하는 동안 늘 그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뭔가에 길들여지고 억눌려 있었던 그와 달리 제멋대로인 칼라지가 부러웠고 항상 그를 배우고 싶어 했다. 한편으론 그와 함께 하는 모습이 남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열네 살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집트에서 추방되었던 '나'는 튀니스에서 자랐지만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프랑스로 쫓겨난 칼라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서로 거울을 보듯 비슷한 면이 많은 그들이 다른 점이라면 칼라지는 택시운전사였고 '나'는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다는 것이며 칼라지에겐 없는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칼라지는 곧 추방될 위기에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물었다. "말해봐요."
칼라지는 숨을 가다듬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을 위해 내가 요리를 해서 상을 차렸어.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근데 나는?" 그가 잠깐 망설였다. "에 무아(나는)?"
<하버드 스퀘어> p.271
칼라지와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조촐하게 파티를 열었다. 칼라지가 만든 고기 스튜와 나머지 친구들이 가져온 술과 음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칼라지가 갑자기 문을 쾅 닫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칼라지는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을 위해 내가 요리를 해서 상을 차렸어. 근데 나는? 나는 뭐냐고?"라고 말하곤 흐느껴 울었다. 그는 곧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고, 튀니스를 떠나기 전보다 더 가난한 상태였다. 그 어두운 침실에서 흐느껴우는 칼라지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칼라지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 그가 여기서 모든 것을 망치고 모든 것을 잃는 모습은 자기 자신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자신의 운명이라는 생각. 주인공이 두 번째 종합시험에 떨어지면 칼라지와 동일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알겠어? 난 자신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도 만찬을 준비한 요리사가 된 기분이야. 다들 즐겁게 먹고 마실 뿐, 이 식사가 끝나면 요리사가 사라질 거라는 사실은 잊고 있지. 나는 그렇게 죽어가는 요리사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여길 떠나 다른 데로 가고 싶지 않다고. 난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아무도.
<하버드 스퀘어> p.272
<하버드 스퀘어>를 읽는 동안 미래의 내가 잊지 않길 바라며 모서리를 접어두었던 어떤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손 끝에 힘을 주어 모서리를 접었던 이유가 나에게 잊힐까 두려워서만은 아니라는 것은. 그것은 너무나 그립지만 결코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기억에 대한 표식이기도 했다. 뜨겁고 아름다웠던 여름, 청춘. 그 한 시절이 오롯이 담긴 소설 <하버드 스퀘어>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