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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평점 :

인생이란 한쪽 면에 희망과 반대편에 절망이 등을 대고 붙은 동전 같은 것이다. 희망과 절망은 놀랍도록 가까이 있으며 한쪽에서 그 반대쪽으로의 전복은 우스울 만큼 쉽다. <파이 이야기>는 절망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한 소년이 벵골 호랑이 한 마리와 227일간 태평양에서 지내는 절망적이지만 희망적인 시간을 담았다.
<파이 이야기>는 맨부커상 수상작 중 역대 최대 베스트셀러이며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나는 소설책보다 영화로 먼저 이 이야기를 만났는데, 몽환적인 느낌의 동화 같은 영화는 매 장면마다 잊을 수 없는 감각을 선사했다. 망망대해 위에 한 소년과 커다란 호랑이가 갑판 위에 나란히 선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롭고도 아름다워, 경탄을 금할 수 없었던 때가 새록새록 기억난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이다. 새로운 소설 쓰는 것을 갈망하던 작가가 신을 믿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나고 그에게서 '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소개받는다. 파이는 작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환상적인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 자애로운 어머니와 형과 함께 했던 유년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파이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하고 동물들까지 모두 커다란 화물선에 오른다. 항해를 시작한 지 나흘째에 화물선이 침몰한다.
나는 태평양 한가운데 고아가 되어 홀로 떠 있었다. 몸은 노에 매달려 있고, 앞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있고, 밑에는 상어가 다니고, 폭풍우가 몸 위로 쏟아졌다. 이성적으로 이런 상황을 보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물에 빠져 죽기를 바라리라. 하지만 노를 방수포에 끼우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밀려든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동이 트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힘껏 노에 매달렸다. 그냥 매달렸다. 왜 그랬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시겠지.
p.163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사건으로 파이는 목숨을 건져 구명보트에 오르지만 나머지 가족의 생사는 알 수가 없다. 대신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까지 네 마리의 동물만이 살아남았다. 네 마리의 동물들은 야생의 본능대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놓고 다투고 결국 배 안에 남은 것은 소년 파이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뿐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동물원을 관찰하며 배운 대로 파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리처드 파커를 길들이기 시작한다.
“난 죽지 않아. 죽음을 거부할 거야. 이 악몽을 헤쳐 나갈 거야. 아무리 큰 난관이라도 물리칠 거야. 지금까지 기적처럼 살아났어. 이제 기적을 당연한 일로 만들 테야. 매일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필요하다면 뭐든 할 테야. 그래, 신이 나와 함께하는 한 난 죽지 않아. 아멘.”
p.219
“사랑한다!”
터져 나온 그 말은 순수하고, 자유롭고, 무한했다. 내 가슴에서 감정이 넘쳐났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고!"
p.339
파이가 호랑이와 보내는 시간들은 절망과 희망, 두 개의 면을 가진 동전과도 같았다. 망망대해에 온 가족을 잃고 홀로인 파이는 언제고 자신을 먹어치울 수 있는 맹수 호랑이와 단둘이다.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호랑이는 소년의 목숨을 위협하는 절망이자 소년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삶을 살아나가는 희망의 근원이었다. 파이는 227일간의 표류 끝에 마침내 육지에 도착한다. 화물선 침몰 원인을 조사하러 나온 선박회사 직원들은 파이의 이야기를 듣고 쉽게 믿지 못한다. 그러자 파이는 이야기한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인생이 이야기라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절망인가, 희망인가. 나의 인생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