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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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을 읽고 나서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냥 재미있었다고 말하자니 영 재미가 없다.

읽어보지 않고는 그 재미와 묘미를 알 수 없으니 나는 또 하나의 남모르는 보물 하나를 간직하게 되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마르셀 에메라는 프랑스 작가의 단편집이다. 모두 다섯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최근에 읽은 단편 중에서 어슐리 k 르귄의 바람의 열두방향은 SF성격이 강한 환타지 단편들이었다면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은 뛰어난 상상력이 돋보이는 환상소설쯤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딱히 어떤 성격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다섯 편의 단편이 모두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벽을 드나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가루가루라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소재나 배경은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이다. 별로 특색이랄 것도 없는 평범한 하급공무원인 주인공,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상사, 직장 동료들이 나오고 몽마르트가 배경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런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요소들은 주인공이 벽을 드나든다는 설정으로 인해 갑자기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한다.   현실의 세계와 현실 같지 않은 세계를 너무나 태연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재치 넘치는 글을 읽다보면 첫 번째 이야기에서부터 금세 마음을 빼앗긴다.

두번째 이야기 생존시간카드라는 글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이다.   시간에 대한 비틀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은  이 글은 우리에게 과연 절대적인 시간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생존시간카드란 비생산적인 소비자들 이를테면 노인 퇴직자 실업자 예술가와 작가 같은 사람들의 생존권을 박탈하여 한달에 살 수 있는 날을 정해주는 카드를 말한다.   사람에 따라서 한달을 다 살수도 있고 20일만 살수도 있고  일주일만 살수도 있다. 한달을 다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머지 시간동안 일시적인 죽음에 들어간다.   많은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간카드를 사서 생존시간을 늘린다.   간마저 거래되고 배급되는 사회, 예술가나 작가가 비생산적인 부류로 들어가는 세계.

이 글 역시 작가의 재치와 상상력이 넘치는 뛰어난 수작이다.

세번째 이야기 속담은 자식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보여주려는 한 가장의 이야기가 코믹하면서도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무수한 우리들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가정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웃으면서 읽다가 자못 슬퍼지는 이야기이다.

네번째 이야기 칠십 리 장화와 마지막 이야기 천국에 간 집달리는  이 책에서 가장 동화적인 요소가 강한 단편들이다.   칠십 리 장화는 가난한 어머니와 아들을 등장시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의 세계와 모자간의 애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매우 아름다운 글이다.

글의 마지막부분에 소년이 칠십 리 장화를 신고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가 아침 햇살을 모아 어머니의 잠든 머리맡에 올려놓는 부분을 읽다보면 소년이 꾸는 아름다운 상상에 가슴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다. 

천국에 간 집달리는 진정한 선행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글이다.

다섯 편을 순식간에 읽고 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더 없나? 이다.    너무 짧고 너무 아쉽다.   더 많은 글이 실려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참 재미있다. 짧은 단편이 이렇게 재미있고 기발하고 독특할 수가 없다. 선종훈씨가 그린 삽화도 매우 훌륭하다.  글과 그림이 궁합이 잘 맞아 책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마르셀 에메의 다른 책이 있으면 찾아서 읽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아직 번역된 책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빨리 그의 다른 책들이 번역되어 출판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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