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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평점 :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내적 사색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는 점이다.
음악을 들으며 무한한 선율의 세계에 빠질 때나 그림을 보며 새로운 세계로 안내되어 들어갈 때, 책을 읽으며 낯선 만남과 조우할 때마다 나는 내 내면의 세계가 넓어지고 정신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건 아주 감질나게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분명 하나의 기쁨이다.
그림이나 미술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예컨대 과학이나 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모두는 인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훌륭한 그림 한점은 훌륭한 역사책이나 뛰어난 과학적 지식 이상으로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한 시대를 말없이 웅변해주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느끼는 가장 본질적인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도 있고 무한한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로 안내하는 그림도 있다.
그림을 보면서 단지 그 그림을 그린 작가와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시간과 공간 철학과 사상까지도 만나게 된다. 물론 모든 작품에서 그런 만남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명화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것과 구분되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일 거다.
서양미술사에 관련한 책 중에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만큼 유명하고 잘 쓰여진 책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서양미술사는 잘 쓰여진 책이 항상 그렇듯이 과장되고 현학적이지 않은 문체, 균형 있는 시각, 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제시해 주고 있는 책이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현대미술사 쪽이 부족하다고 느껴지지만 그 흐름 속에 있을 때는 그 흐름이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현 시대의 미술의 흐름은 시간이 지나고 난 후의 어느 시점에나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서양미술사의 첫 부분에 곰브리치는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들에 대한 것이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의 의미는 상당히 무겁게 다가왔다. 미술에 있어 새로운 기법 새로운 표현들이 끊임없이 나타났지만 그것이 그 전 시대보다 진보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건 우리가 아주 오래된 원시시대의 미술에서도 충분히 감동과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미술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시도와 도전의 역사였으며 그러한 시도와 도전은 기존의 반대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것을 제시함으로써 미술의 영역을 계속 확장해 온 미술가들의 역사로 보여 진다.
한 때 당연하게 여겨지던 생각과 양식들이 그것에 회의를 갖고 의문을 던졌던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극복되어 온 것을 바라보면 사람의 편견과 선입견이 미술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 사랑받는 많은 그림들이 한때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던 그림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책 한권으로 미술이나 미술사에 대해 무언가 알았다고 표현하기엔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작품을 실제로 감상한다고 해도 미술에 대해서 안다는 표현을 쓰기엔 무척 어려울 것 같다. 미술은 그만큼 다양하고 늘 새로운 것이 시도되는 시험의 장이다. 오늘날은 특히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서양미술사의 본보기로서 지침서로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는 책이다. 413개나 되는 컬러 도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