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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감옥 ㅣ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이면서 여러개인 것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애완견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지나간다. 나무위엔 새들이 분주하고 발밑엔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우연히 모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 잠시 재미있는 생각을 해본다.
개는 내가 이 세상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것이다. 세상을 이루는 색은 흑백으로 단조롭겠지만 갖가지 냄새와 소리들로 풍부하게 살아 움직이는 그런 세상일게다.
새는 개가 느끼는 것과는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공기의 흐름으로 가득 찬 허공을 날아다니며 새들이 느끼는 세상은 나와도 다를 것이다.
개미는 아마 나란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 할 것이다. 개미가 살아가는 세상은 수많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개미는 개와도 새와도 또 나와도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마 각 존재는 시간마저도 다르게 느낄 것이다. 하루가 24시간의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린 모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
그런데 우린 모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일까?
공간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에는 공간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사색을 볼 수 있는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도저히 그 끝에 이를 수 없는 통로를 갖고 있는 집 이야기, 앞문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뒷문으로 빠져나오는 집 이야기, 수많은 방과 거실, 욕실에 차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까지 들어있는 작은 차 이야기.
모두 현실의 공간에선 있을 수 없는 것들의 이야기이지만 누가 아는가? 나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르게 공간을 인식하는 어떤 세계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나의 현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수많은 현실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상상해본다면 그래서 여기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또 다른 현실에서는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세상이 훨씬 신비롭고 비밀에 가득 찬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
미하엘 엔데
미하엘 엔데는 참 대단한 상상력의 작가다.
그가 안내하는 세상은 언제나 신비롭고 이상하고 환상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러나 그가 안내하는 세상은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에 비친 이 세상의 모습처럼 환상이란 것으로 뒤틀려 있지만 결국 이 세상의 모습을 반영하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이 세상의 다른 면을 이루고 있는, 누구든 보려고 마음을 열면 나타나는 그런 세상이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8편의 단편들을 하나씩 읽다보면 비현실적인 동화 같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공감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머물 집을 못 찾고 그림 속에서 찾은 집을 현실의 다른 공간에 창조해버린 시릴의 이야기(긴 여행의 목표)에 매료되기도 하고, 그림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하세계(미스라임의 동굴)를 상상하며 내 존재의 한계를 생각하기도 하고, 이 세상에선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느끼던 길잡이가 결국 기적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찾은 길잡이 이야기(길잡이의 전설)에서는 묘한 아픔까지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때론 분명한 이미지로 채워진 그림보다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로 가득 찬 그림이 더 큰 기쁨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음악보다 알 수 없는 선율로 가득 찬 음악이 더 매혹적이기도 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