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박현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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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박현모, 푸른역사, 2007)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책



보기 드문 책이 한 권 나왔다. 이 책은 세종과 그 시대의 여러 면모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수 있지만, 새로운 역사서술을 선보였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 하다. 박현모는 이 책에서 "세종의 '정치'에 접근"하였으며 "사료가 침묵하고 있는 계곡에서는 '상상적 고찰'이라는 다리"를 놓는 "'실험적' 글쓰기"를 선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한껏 의미를 부여하여 1990년대에 나온 역사서 가운데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책’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이 주목해야 할 세 가지를 꼽으라면,



1

역사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라면, 그런 맥락에서 몇 가지를 더 부연해보자. 첫째, 이 책은 복수의 시각에서 쓰여졌다. 대체로 역사는 단일한 시각에서 쓰여지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이런 주류적 흐름에 반기를 들며 복수의 시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선왕이면서 살아 생전 왕위를 물려준 태종이 본 세종, 신하였던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김종서, 신숙주가 본 세종, 아들이자 비극의 주인공이 된 세조가 본 세종, 그리고 먼 훗날 세종의 시대처럼 성세를 누렸다는 성종이 바라본 세종 등으로 여러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저자의 노력을 결코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본질적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저자 역시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포기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세종을 바라보았으며 一以貫之는 없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저자는 ‘정치가 세종’이라는 시각을 줄 곳 견지하였다.



2

둘째, 이 책에서 세종을 聖君이 아닌 ‘정치가 세종’으로 묘사되었다.



사실 우리는 줄 곳 학교에서 세종을 ‘성군’으로 배웠다. 한국역사에서 ‘聖’이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순신과 세종이 아마도 대표적일 텐데, 그나마 이순신은 그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일부 있었던 반면, 세종은 비판은 별로 없었다. 물론 트집을 잡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세종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정치’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聖을 탈색하려고 노력하였다. 저자가 취한 태도는 프롤로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인간’ 세종의 고민으로부터 그의 정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역사 속에서 덧칠해진 ™S오이 아닌 맨얼굴의 세종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물론 저자의 이런 태도는 신선하다는 점에서 <역사학과의 직업역사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태도가 없다면 과학적 진술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서술에서 거둔 효과가 어느 정도였던가 하는 것은 여기서는 유보하고자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역시 聖君의 기호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시도 자체는 매우 의미가 있었으나, 그의 시도가 실제 서술에서 성공하였다고 흔쾌하게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3

셋째, 이 책은 ‘상상적 고찰’을 내세운 ‘실험적’ 글쓰기를 시도하였다. 언제까지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쓰는 글을 ‘실험’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니까 더 이상 역사적 상상력이 실증이라는 말에 밀릴 이유가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실험으로 겸양지사를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이 책 역시 실험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비록 스스로 한계를 지었으나 이 책에서 제시한 상상적 고찰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실증적인 역사서술을 하였다. 그 자신의 말처럼 “‘가위와 풀’을 가지고 사료를 최대한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증이 아니면 무엇이 실증인가. 그러나 저자는 내심 욕심을 낸다. 그것은 실증이 아니라 실증의 일부분이라고. 저자는 정치학과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답게 정치를 “‘정치’란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개의 진실과 복수의 가치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며 “큐빅과 같이 여러 개의 국면들이 맞붙어 공존하는 그런 세계”라고 하였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역사학과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역사 역시 ‘실증과 상상력이 맞붙어 공존하는 세계’이다.



저자가 정치란 선과 악이 혼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이나 악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구의 인식이라고 하였듯이, 역사도 실증과 상상력이 혼재된 것이므로 실증에만 국한한다면 온전한 역사를 서술하기는 힘들다.



물론 저자에게도 아쉬운 점은 없지 않다. 그것은 저자가 상상적 고찰을 <‘사료’=역사, ‘해석’=정치사상>이라는 구도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역사는 사료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사료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료=역사라는 인식은 적절하지 않다. 20세기의 전통적인 역사인식도 <사료 해석=역사>라는 구도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저자의 역사관은 좀 좁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상상력 고찰의 칼을 배든 것은 의마가 크다 할 것이다.



《정감록》(백승종, 푸른역사, 2006)과 같이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어떤 책을 심도 있게 읽으려면 다른 책과 비교해서 읽을 필요가 있을 텐데, 이런 맥락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정감록, 역사사건의 진실게임》이다. 정감록과 읽을 때 세 가지 비교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조선 초기 守成의 시기와 조선 후기 반역의 시기를 대비해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세종을 조선을 ‘국가’로 만든 정치가로 상정하면서 이 시기를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치질서를 만든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감록의 저자는 조선의 주류적 정치질서인 성리학적 질서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 정감록을 제시한다. 조선을 세우려는 사람들과 조선을 뒤엎으려는 사람들의 대비가 흥미롭다.



둘째, 지배 엘리트의 시각과 저항 지식인의 시각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세종>은 지배 엘리트가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정감록>은 전봉준과 같이 지배질서에서 배제된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비교해서 읽는다면 조선을 보다 심층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셋째, 역사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세종>은 세종이라는 주인공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정감록>은 직접 그 당사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전자는 주인공을 향해 시선이 몰려들었고 후자는 주인공으로부터 시선이 퍼져나갔다. 두 역사책은 모두 1인칭 기법을 사용하였다. 역사서술에서 1인칭 기법은 매우 드문 방식이다. 1인칭은 소설이나 수필 등에서는 익숙한 방식이지만 객관적 서술에 지배당하는 역사에서는 낯선 방식이다. 그러나 두 책 모두 광범위한 사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1인칭 기법을 통해서도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러나 저자의 정치적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 가지 당혹스러운 것은 저자의 정치관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자가 이 책에서 드러낸 정치의식은 민주화 시대의 그것보다는 왕조시대의 통치의식에 가깝다. 이 말이 거슬린다면 지배 엘리트 위주의 서술방식이라고 교정해줄 수는 있다.



아마도 저자는 당대의 시각과 언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우리가 당대의 시각과 언어를 알 수 있겠는가. 물론 기록에 그렇게 남겨져 있는 것을 가위와 풀로 오렸으니 맞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문자일 뿐이지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의미는 저자 자신의 말처럼 현재적 시각과 현재의 문법에 있다.



따라서 내가 저자가 왕조시대의 통치의식에 집중되었다고 한 것은 그 시대를 그렇게 반영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질서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세종의 ‘정치’에 방점을 찍었지만 기실은 ‘세종’에 방점을 찍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통치와 국가질서 확립이라는 맥락에서 세종과 지배세력의 정치를 묘사하는 데에 주력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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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전 -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여덟 인생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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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픔, 그리고 '세월을 견딘 사람들'의 위대함

소설가 김형경은 추천의 글에서 "<여자전>에 대해 무엇이든 덧붙이는 것은 사족"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너절한 사족'을 붙이지 않을 용기가 내게는 없다. 20세기의 암울했던 우울했던 측면을 가파르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묵묵부답으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책을 읽기 이전에도 '직업역사들'의 역사를 많이 읽었다. 때로 왜 읽었나 하는 허무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들이 비록 '팩트'이니 '사실'이니 하면서 글을 썼다지만 감동이 오지 않는 것을 어찌할까. 인간의 존엄이라든가 세월의 위대함이 주는 메시지가 없다. 그러니 감동이 있을 리가 없다. 반면 <여자전>은 직업역사가가 쓴 것도 아니고 그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학교역사교과서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이들이긴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세월을 견딘 사람들'의 위대함을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역사의 힘이라면 힘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만약 인간을 이해하는 담론이라면 이 책이야말로 20세기 역사서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8명은 20세기를 살았던 여성이라는 점 말고는 달리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동시대 한국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공통점 말고는 신분도 부도 학력도 환경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모를지라도, 서로 모르는 채 제각각의 인생을 살았더라도, 20세기의 격랑에서 이들은 슬픔을 관통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보따리'를 같이 푸는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의 슬픔은 '한 낱 슬픔'이면서도 '역사적 슬픔'이다. 그들이 본디 영웅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고 말할 때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풀무질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록 영웅처럼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위대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웅이기 때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세월을 견딘 사람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전자가 위대함을 독점하는 것을 역사학에서는 영웅사관이라고 한다. 반면 후자에 주목하는 것을 미시사적 관점이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책은 미시사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2. '傳이라는 형식'

엄밀하게 말하면 이 글은 여덟 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편의 이야기이다. 물론 8명이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말로 자신의 삶을 전해준다. 그러나 이들의 말을 글로 표현하는 이는 김서령이라는 저자 한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뚜렷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물론 이야기를 역사로 협애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역사를 포괄하면서도 역사 이상인 어떤 것, 저자는 이것을 "소설도 노래가사도 역사도 체험도 모조리 이야기라는 말 속에 녹여낸다"고 표현하였다.

밑바탕이 되는 것, 단순히 역사의 사료이거나 소설의 소재거리가 아니라 역사를 가능하게 하고 소설을 가능하게 하면서 관통하는 형식, 즉 이야기라는 형식을 그는 발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야기라는 형식에 역사가 출현할 수도 있고 소설도 등장할 수 있고 영화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저자가 '傳'이라는 형식을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의 복원>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꽃으로 문질러 쓴'

이들 중에는 애초부터 삶의 목표가 분명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운명에 내던져진 채 주어진 상황에서 충실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는 발전의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지만 후자는 퀼트의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다. 이 글의 장점은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가 진보이냐 발전이야 하는 논쟁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논쟁이란 것은 대체로 백가쟁명처럼 피어오르건만 그 밑바탕이 되어야 할 실제 역사서술은 매우 적은 것이 현실이다. 풍요의 빈곤을 말할 때 논쟁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이야기는, 성공한 사람들의 아애기는 발전의 시각에서 쓰여 지게 마련이다. 언제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성공하게 되었는가, 성공의 정점에 오르게 되기까지 어떤 역경을 거쳤는가 등등. 이러한 이야기는 감동을 주고 꿈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이야기, 그렇다고 실패하였다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꿈을 주기보다는 퀼트의 아름다움을 준다. 이럴 때 아름다움은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고통을 겪고,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출발하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내가 겪어온 인생을 부정할 수는 없어 긍정할 때의 아름다움. 퀼트를 짜면서 주름진 삶을 하나씩 펼치던 <아메리칸 뷰티>라는 영화에서 나타났던 아름다움도 대체로 이런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할 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좋겠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마도 저자가 "꽃으로 문질러 쓴"이란 표현을 쓴 것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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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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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글로 써보려고 한다. 이런 글을 대개 서평이라고 하니 서평을 쓰는 셈이다. 그런데 서평이란 무엇일까. 아니 서평은 왜 요청되는 것일까. 단 하나로 규정되지 않겠지만, 아마도 그 중의 하나는 저자도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지적해보고 다른 계열들과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 들뢰즈는 "한 작가에게서 그 작가 자신도 발견하지 생각하지 못했던 높은 가능성을 이끌어내며 특별히 긍정적인 측면을 밝혀낸" 사람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서평이 무엇을까 하는 고민하는 사람에게 유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이럴 수 있다. 행여나 과장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자점을 찾아내 과장하고 취약점이 발견되면 오히려 미화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이 심해지면 병리적 현상이라 치료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그리 심하지 않다면, 그리고 비판적 시각을 놓치지 않는다면 서평의 미덕이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어긋남

오늘날이 스스로 묘지명을 쓴 선비들을 좇아 자신의 묘비명을 써야하는 시대일까. 오늘날은 이미 심각한 상황이 되어버린 매장문화를 비판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대이다. 1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쓴 선비를 좇아 매일 일기를 써야 할까. 내밀한 일기와 고백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상업화하여 저작권마저 붙는 상황에서 일기는 '역사'가 되기 어렵다. 역사보다 한 개인의 인권이 더 중요한 시대에, 교사와 부모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일기를 초등학생에게 계속 쓰게 하는 것은 곤란하다. 산을 유람하는 것이 독서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좋은 것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은 해외여행의 시대이고 그 곳에서 겪은 일상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시대이다.

물론 저자는 호고벽(好古癖)에 빠져 오늘날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과거만 찬미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는 조선후기 선비들의 삶과 예술, 사유와 안목을 길러내어 되살리려고 하였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독자의 눈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미쳤듯이, 저자 역시 과거와 현재를 균형 있게 보려는 하였다. 책의 곳곳에서 숨김 없이 드러낸 것처럼, 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비다움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과거의 것들을 재현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상황의 차이일 뿐 시대착오적인 글은 아니다.

어긋남, 그러니까 <시대착오가 아닌 어긋남>이 주는 미덕은 무엇일까. 아마도 현재 상황을 보다 면밀하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가 싶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 등자하는 이들의 삶은 제도권 안의 사대부의 삶이 아니라 제도권 밖에서 선비다움을 추구한 삶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17~19세기 선비들이 품었던 열정과 바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곧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 제도권 밖에서 진행되는 것들에 대한.

선비답게 사는 것, 또는 인간답게 사는 것

이 책에 소개된 선비들 중에는 부자들도 있었지만 가난한 이들도 있었다. 제도권에서 벼슬을 한 이도 있지만 벼슬을 하지 못한 채 제도권 밖에서 울분을 삭힌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들을 선비다움으로 수렴할 수 있을까. 답은 오히려 간명하다. 빈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공통적이었던 것은 문사철(文史哲)과 예술이었다. 오늘날의 용법으로 하면 인문학이 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직업교육이나 사회보장제도의 확충보다도 인문학이다. 인문학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이 <버려진 세계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이미 입증된 역사적 경험이다. 반독재투쟁에 헌신했던 대학생들,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에게 인문학을 빼놓으면 달리 할 말이 없어진다.

물론 여기서 인문학은 좁은 의미의 문과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은 인간이라는 존재 및 이 존재가 창출한 문화적 산물을 이해하는 담론이다. 요컨대, 인간을 이해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은 '인간다움'을 고민하게 한다. 이렇듯 인문학은 부자에게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사유화하는 것이 그릇된 것임을 알게 하는 힘이며, 가난한 이에게는 자신도 공적 세계에 속하는 존재임을 일깨우는 힘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곳들, 가난한 집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다양한 곳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들, 교회건물에 도서관을 만드는 교회,....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모두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낯설게 하는 효과

고전적인 것들은 사물을 낯설게 하는 효과가 있다. 책의 제목이 너무도 고전적이라 그런지 익숙하던 선비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비답게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책을 들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전적인 제목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나는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읽었다. 그러나 어떤 책이든 다양한 시각에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도 선비답게 산다는 것을 묻는 것보다 행복한 삶을 묻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의 시각에서 읽을 수도 있고, 인간다움을 떠나 단지 선비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인 사람의 관점에서도 읽을 수도 있다. 또한 조선시대를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의 시각과 저녁이나 주말에 조용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책을 찾는 사람의 시각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다 읽고 나니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인식에는 동의하기 어려움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역사관에 무척 동의하기 어려웠다.

저자의 역사인식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사관에 가깝다. 고구려를 '우리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라든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강력한 비판도 그렇고, 전후 일본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 등에서 그런 것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알아야 하는 것은 민족주의 역사학은 자자가 책에서 말한 '역사는 공언'이라는 말과 배치된다는 점이다. 저자가 진저 역사를 공적 세계에 대한 담론으로 이해하려면 역사와 민족을 구분해서 사유해야 한다.

또한 저자의 역사인식은 왕조적 사관에 가깝다. 저자는 한 사관(史官)이 세종을 비판한 것에 대해 수긍하지 못하였다. 이는 세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이 세조을 '성군(聖君)'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세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렇게 분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종은 성군이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의 정치가로서 치적도 쌓았고 실정도 하였던 사람이다. 따라서 세종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곤란하겠지만, 聖君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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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2-1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참 좋습니다.
즐겨찾기 해둡니다.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정감록 역모 사건의 진실게임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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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영하는 한 소설에서 ‘압축할 줄 모르는 자는 뻔뻔하다’고 했는데, 다 써놓고 보니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역사적 사유도 좋지만 서평이라면 압축도 필요한 법인데 …. 어떤 옛 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긴 글을 보냅니다.’ 이 시는 어떤 부인이 변방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애절함을 노래한 것이다. 이 서평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시구절을 채용하고자 한다. 오늘은 좀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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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가 나는 전문역사서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백승종 2006 푸른역사)의 서평 -



역사적 사유


오랜만에 역사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책을 만났다. 마치 지하철 안내방송처럼 정보만 제공하고 사라지는 역사책은 많아도 역사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책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적 진실에 대해, 역사적 상상력에 대해, 역사서술이라는 것에 대해, 이제는 너무 멀리 돌아온 역사의 과학성과 문학성에 대해, 그리고 한 구절 한 구절에 베인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것들을 역사라고 총칭하는 것이 허락이 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사유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추상적 역사인식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의 심연에서 나오는 역사인식론이 펼쳐진다.


지적인 역사대중서


그리고 지적인 역사대중서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한국역사학계에서는 강단의 역사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역사서술을 바꾸자는 흐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특히 1990년대 하반기부터 많은 역사대중서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체로 가볍고 흥미본위의 역사대중서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사실 ‘그 대중’이 역사가들보다 지적인 수준이 낮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타 분야의 학자들이나 대학원생들, 사회 각 방면에서 역사적 사유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적인 수준은 높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을 쉽게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을 뿐이다. 심지어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역사가들보다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이들은 역사적 사건들의 나열에서 발견할 수 없는 역사의 어떤 깊은 맛을 음미하고 싶은 것이다. 국사교과서의 정형화된 역사도 아니고, 역사드라마의 화려한 영상도 아닌 역사, 그래서 차분하게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보면서 지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역사. 역사대중서가 필요하다면 이런 지적인 역사대중서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내가 도서관의 전문사서라면 이 책을 지적인 역사대중서로 분류할 것이고 왜 그렇냐고 묻는다면 ‘삼미식품’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역사의 재미, 역사의 의미, 역사의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 미시사의 또 다른 좌표점


속표지에 실린 문인방의 얼굴은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 인물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어진(御眞)을 보고 신기해한 적이 있고, 신윤복의 그림에서 삶에 지쳐 세상사에 달관한 듯한 농민들의 표정을 본 적은 있었다. 위대한 선비들의 단아한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그러나 문인방과 같은 ‘평민지식인’의 지향과 좌절이 뒤섞인 표정은 낯설었다. 세상의 모순에 정면으로 응시한 충혈된 눈, 울분이 분노가 되고 다시 우수가 되어버린 눈빛, 멀리 이상세계를 갈망하는 듯한 약간 벌린 입술 … 문인방이라는 18세기 한 인물의 살아 있는 표정에서 인간의 복합적 욕망을 볼 수 있었다.


문인방은 이 책의 2장에 등장하는 인물로 1783년 정감록 역모사건의 주모자이다. 그는 서북지역의 술사였다. 지역적으로도 신분적으로도 그는 18세기 당시 조선의 주류에는 도저히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글을 알았고 글을 통해 세상을 알았고 세상의 모순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그를 ‘평민 지식인’ 또는 ‘유랑지식인’으로 분류한 후 ‘삶의 전략’이라는 시각으로 그를 추적한다. 결국 저자는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다방면의 분석을 한 후 역사적 해석을 내린다. “문인방의 등장은 한국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저자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종교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힌 19세기~20세기의 일련의 사건들(동학-원불교 등의 신흥종교 계열, 1894년 갑오농민전쟁-1919년 3․1운동 등의 저항운동 계열)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니까 19세기 이후의 변화를 설명하려면 17-18세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해명이 되어야 하는데, 18세기 정감록 역모사건을 파헤치다보면 비밀결사체의 존재, 종교적 카리스마의 존재, 성리학이라는 주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대항이데올로기의 형태 등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사건이 분출하였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배경과 원인을 일정한 역사적 흐름에 편입시키려고 노력한다. 저자 역시 이런 맥락에서 문인방의 등장에 주목한 듯 하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로서 나에게 그 문구는 다르게 다가왔다. 문인방의 등장이 갖는 의미는 18세기적이라기보다는 21세기적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니까 문인방의 등장은 한국역사학계에서 미시사의 또 다른 출발점으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본다.


20세기 사학사를 개관한 이거스에 따르면 서구 역사학계에 주목할만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1970년대이다. 근대화에 대한 반성적 흐름이 1950-60년대에 다방면에서 일어나다가 1970년대가 되면서 보다 집약적인 흐름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거시사에서 미시사로의 전환에 주목하였다.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미시사를 상징하는 것은 《치즈와 구더기》(1975)의 메노키오이다. 메노키오라는 한 방앗간 주인(물론 글을 읽고 쓰면서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관이 있었음)이 역사에 등장하여 말하고 숨기고, 움직이고 멈추었다. 긴즈부르그가 그런 역사서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삶의 전략에 주목했기 때문이며, 그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그전까지 국가, 민족, 경제구조, 주도세력 등으로 서술된 근대역사학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요컨대, 한 개인의 삶의 전략이 충실히 역사화가 되면서 이제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물론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서 그렇다는 것이다.


문인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1990년대에 한국역사학계에서도 근대화에 대한 반성으로 여러 형태의 역사실험이 있었다. 여성주의적 역사서술, 일상사적 역사서술, 미시사적 역사서술 등 대체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 계열로 분류되는 흐름이었다. 이 가운데 미시사에 대해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의 흐름을 되짚어보면 미시사에 대한 오독(誤讀)이 적지 않았다. 미시사를 일상사와 동일시하여 신변잡기나 나열하고 일상의 풍경을 그리는 것을 미시사라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시사적’이라고 운위하는 글을 읽어보면 도대체 미시사에 대한 고민을 하였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진지한 미시사 서술도 있었다. 저자도 이 계열에 속하는 역사가이다. 그가 쓴 여러 편의 미시사는 그런 면에서 정독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방의 등장이 특별한 것은 사건과 더불어 등장했다는 점이다. 역사학은 무엇보다도 사건이다. 미시사는 역사적 사건에 마주친 한 인간의 삶에 대해, 그가 어떻게 그 사건을 바라보았으며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전에도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2003), 《그 나라의 역사와 말》(2002)을 쓴 바 있다. 이 책들은 한국역사학계에서 선구적인 미시사 작품들로 위치지어질 수 있다. 따라서 우열을 가릴 성질은 아니지만, 현 시점에서 문인방의 등장에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영조와 정조의 시대에 벌어진 역모사건’이라는 흥미로움이다. 무릇 하나의 사건에 여러 사람이 참여한다면 각자는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접근전략을 달리한다. 저자는 문인방과의 가상대담에서 다양한 층위에서 사건의 전모에 다가서려고 노력하면서도 이경래(양반), 박서집(평민), 정조 등의 이해당사자들의 이해도 놓치지 않았다. 미시사는 구체적인 개인에 주목하고 그 사람이 당대에 겪는 모순과 사건의 소용돌이에서 어떤 전략을 취하느냐, 그리고 그것은 유일무인한 단일성이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중층성들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문인방(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김원팔, 문양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의 등장은 한국 미시사의 또 다른 좌표점이다. 물론 하나의 상징으로서.


역사적 진실과 역사적 상상력에 대해


1

아마도 누구나, 책을 집어들면 표지부터 유심히 보지 않을까. 이 책을 집어들고 나는 한참이나 표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살아 있는 표정이 실려 있었다. 표지는 대체로 무언가를 상징한다. 저자와 편집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표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역사의 다양한 진실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몇 개의 모습을 띤다.” 저자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으나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왜 이런 말을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선 저자가 동원한 몇 가지 서술장치에서 기인할 것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사건관련자들 각각의 시각에서 해당 사건을 바라보려고 하였다. 예컨대, 1785년의 ‘문양해의 정감록 사건’에는 6명의 인물들 각각의 관점과 각 인물에 대한 저자의 생각까지 합쳐 총 12개의 관점이 주름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마치 관점들의 향연이라도 펼쳐지는 듯 하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러나 이 유명한 명제가 이렇게 미묘하고 섬세한 대화까지를 범위에 넣어야 하는 것임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의 복합적인 대화를 통해 여러 빛과 그림자로 수놓아진 한 편의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역사책을 읽었지만 이렇게 다양한 시각에서 서술된 역사는 본 적이 없었다. 문양해의 정감록 사건에는 6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정조까지 치면 모두 7명이지만 일단 정조는 여기에서 독립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는 일단 6×2=12개의 진실에 한정하였다. 만약 이를 신분으로 구분하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각각의 진실과 역사가의 시각 등 총 3개로 좁혀질 것이다. 기존의 역사서술이라면 이 두 개의 시각이 팽팽하게 대립되면서 시종일관 긴장된 흐름이 노련한 역사가에 의해 이끌려갈 것이다. 역사가는 종국에 가서 어느 한 쪽의 현실적 승리와 다른 한쪽의 현실적 패배를 선언할 것이다. 나아가 당장의 승패에 안주하지 않고 긴 역사적 안목으로 결국 역사의 승자가 누구인가를 결정지을 것이다. 그 동안 역사연구는 대체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양한 시각을 그대로 표출하였다.


2

다 좋다. 그런데, …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설령 저자의 주장처럼 하나의 진실만을 고집하는 근대역사학은 이미 진부해졌다고 치자,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바와 같이 역사에는 다양한 진실이 존재하며 역사가는 그것을 드러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치자, 그래서 이 책이 그것을 성공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자는 그 동안 여러 편의 미시사 책을 간행한 바가 있고 이 책 역시 미시사로 분류될 수 있다. 미시사가 추구하는 바와 같이 “역사적 사건과 행위에 담긴 중층성이 제대로 밝혀질 때 역사 속 인물들이 선택했던 다양한 생존전략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인가. 저자가 힘주어 강조하듯이 그동안의 역사서술에서는 금기시되었던 허구의 세계를 역사가의 상상력으로 밝혀냈다고 해서, 그 동안 한국역사학계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이런 파격적인 실험이 과연 성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것인가.


독자로서 어떤 메시지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인가. 저자는 분명히 독자에게 무언가를 강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자에게 무언가를 돌려주었을 것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한 동안 이런 물음들 앞에서 망설였다.


이 책은 전문역사가에 의해 쓰여진 역사이다. 그리고 책을 읽어보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허구의 세계로 가득찬 소설’이 아닌 것이다. 이 책과 함께 나온 《한국의 예언문화사》(푸른역사 2006)를 보면 저자는 무려 1,350년에 걸친 한국의 예언문화를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추적하였다. 이 책에는 모두 7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7편 모두 역사학계의 관행적 서술방식에 따라 서술되었다. 사료가 제시되고 선행연구자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비판하는가 하면 여러 사건들을 이리저리 대입시켜가면서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결론을 내린다. 역사가가 역사적 해석을 내리는 방법 그대로를 충실히 따른 셈이다. 따라서 그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이 개입된 허구는 말 그대로의 허구가 절대 아니”라며 역사가의 자부심을 표방했다고 해서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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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무엇인가. 역사가는 우리네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 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다룬 영화이다. 한 인간의 삶에서 독립과 자유, 그리고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하는 것을 공감할 수 있었다. 많은 장면들이 준 감동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 훈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처럼 영화를 보거나 또는 소설을 읽으면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한 영화는, 수기가 아닌 한 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소설은 감동을 준다. 왜 그럴까.


허구와 거짓은 분명히 다르다. 기본적으로 감동은 진실된 것들에 가 닿을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에 감동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접할 때 공감하게 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영화와 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다루지만 거짓말로 포장된 허를 결코 다루지 않는다. 얼마 전 줄기세포 사건이 압축적으로 보여주듯이, 오히려 이런 일은 ‘과학’을 한다는 곳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 역사를 조작하는 대열의 전위에서 심심치 않게 전문역사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거짓은 윤리와 관계되고, 허구는 학문적 방향과 관계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과학을 하는 사람들을 영화와 소설의 허구적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삶에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삶의 길이 있으며 그만큼 다양한 진실이 있다. 자주 망설이고 때로 숨긴다. 그러면서도 주체적인 시각으로 삶의 전략들을 수립하고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모습들을 내면에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모습인 것이다. 역사가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건이며 흐름이며 사실이며 의미이지만, 무엇보다도 하나의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에 경도되어 사물과 인간의 중층적인 면모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영화와 소설의 이야기에는 다양한 캐랙터가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하나의 캐랙터만으로는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없다. 여러 캐랙터가 등장하여 삶의 여러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태백산맥이나 장길산과 같은 소설이 오랜세월 고전으로 남는 것도 삶의 복합적인 측면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삶을 두 영역으로 구분한다. ‘외부현실’과 ‘내면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은 내면에 허구의 세계로 간직한 채 외부현실과 조응한다. 병리적 현상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허구의 세계는 삶에서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심리학은 내면의 세계를 다루면서 허구의 세계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결국 그들은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루는 것이 비과학적이고 비사실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역사학이 정신분석학에 비해 더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신분석학/심리학은 내면의 허구의 세계를 무시하고 외부현실의 몇 가지 사실만으로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라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상상력이 배제된다면 과연 진보라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의 삶에서 거짓말은 어쩔 수 없는 한 요소이지만 거짓말이 역사를 추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거스는 역사학에서 역사적 상상력이 갖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긴즈부르그 자신의 상상력이 메노키오의 사고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긴즈부르그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연구전략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중단하곤 하였다.” 말하자면 역사적 상상력이 복원됨으로써 메노키오가 역사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메노키오의 등장은 새로운 역사를 가능하게 한 것이고 그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는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은 현재 주어진 조건들을 껴안으면서 새로운 경지를 모색할 때 가치를 지닌다.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그런 류의 망상은 역사가가 다룰 상상력과는 거리가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역사가의 역사적 상상력, 또는 개연성 있는 역사적 상상력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하나의 진리가 있어 그것을 추종하는 것이 삶이 아닐 것이다. 설령 그것을 향해 가더라고 그 여정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역사라면, 역사가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진실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내린 역사적 해석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반출하게 해준다. 예컨대 저자는 홍복영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 ‘권력을 탐하되 못내 멀리하는 듯한 애매함’, ‘누구도 자신의 흉중을 꿰뚫어 알 수는 없되, 인자함을 느낄 수 있게 처신’ 등. 이 책이 거의 의도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중층성과 삶의 전략이라는 것도 결국 이런 맥락에서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보았다.


문학의 향기가 나는 전문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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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케의 목표는 역사학을 학문적으로 훈련받은 역사가들에 의해 실행되는 엄격한 과학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의 주제였던 투키디데스처럼, 문학적 우아함을 겸비하여 과거를 진실되게 구성하는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였다.”(이거스 《20세기 사학사》). 랑케는 근대역사학의 출발을 알리는 사람이다. 이거스의 주장처럼 랑케는 전문분과로서 역사학을 성립시켰다. 다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역사적 분기점에서 그래도 랑케는 문학적 우아함을 겸비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역사학은 문학적 우아함이 탈색된 채 전문성 높은 엄격한 과학으로만 진화가 되었다. 높은 수준의 역사가들이 역사에세이를 쓸 때 문학적 우아함이 등장하기는 해도, 젊은 역사가들이 ‘전문적인 역사서’에서 문학을 표방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이 책이 박사학위로 제출이 되었다면 통과를 낙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문학박사학위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가 그 라이센스를 가지고 현장에서 종사할 때는 정작 하라는 문학을 하지 않는다. 특정한 분야의 특정한 주제에 매달려 역사적 사실을 더 많이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느라 정작 ‘본업’인 문학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역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경향과 정반대로 문학의 길로 나아갔다. 역사의 과학성과 문학성의 조화는 랑케 이래로 역사학의 오랜 숙원이었다. 여기서는 이 둘의 조화를 간략하게 문학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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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존의 전통적 역사서술은 대체로 사건사적 서술과 구조사적 서술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먼저 사건사적 서술에 따라 사건의 전개과정을 충실하게 서술한다. 사건의 발단, 배경, 주요 변수들, 마무리 등 사건의 전모를 먼저 밝힌다. 그리고 나서 구조사적 서술을 통해 사건의 성격과 의미를 밝힌다. 여기에는 역사가의 해석이 들어가고 당시 사회구조와의 연계도 제시되며 궁극적으로 어떠한 역사적 흐름으로 읽어야 하는가가 제시된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룬 문양해 역모사건은 이 책과 함께 나온 《한국의 예언문화사》(푸른역사 2006)의 제4장으로 실려있다. 저자는 전문역사가답게 전통적 역사서술 방식으로 사건의 전개과정을 충실하게 서술한 뒤에 18세기 지하조직의 문화적 성격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책이 문학인 이유는 우아한 문학적 표현이 있어서도 문학적 묘사가 있어서도 아니다. 예컨대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영조 9년 4월 중순, 마침 비가 그쳤지만 남원성 안팎은 낮게 드리워진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달빛조차 희미한 깊은 밤이었다.” 마치 소설의 도입부와 같은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해서 문학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학의 향기가 난다는 것은 소설구성의 장치들 때문이다. 다양한 인물묘사, 내면의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기법, 화자를 등장시켜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앞의 두 방식은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세 번째 기법을 설명해보자.


저자는 김원팔 일가의 <남사고비결> 역모사건을 다루면서 실존하지 않았던 ‘최정도 이방(吏房)’을 등장시켜 사건을 재구성하게 한다. 기존의 역사서술에서는 이런 방식은 매우 낯설다. 거의 채용될 수 없는 일다.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문제인데 그 인물이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은 더욱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과연 종래의 역사서술에는 그런 화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분명히 ‘어떤 최정도 이방’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물론 최정도 이방은 역사가 자신이다.


3

전문역사가는 주관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덕목으로 하며 주관성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관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사건을 재구성해야 하지 않는가. 결국 전문역사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건을 재구성하게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완벽한 객관성이란 불가능하며 주관성을 완벽하게 탈색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따라서 칸트가 취했던 전략처럼 전문역사가는 객관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주관성은 가치를 발하는 것은 보편성을 획득할 때이다. 최정도 이방의 이야기가 보편적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존인물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역사의 과학성도 빼놓지 않았다. 역사의 과학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역사적 흐름을 제시하는 것, 기존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 변화의 의미와 해석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18세기에 광범위한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19세기 ‘홍경래의 난’, ‘동학의 전국적 조직망과 갑오농민전쟁’ 등의 역사적 흐름과 연결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저자는 영조와 정조대에 일어난 역모사건을 다루면서 이 시대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 반론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나아가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가 단순한 예언서가 아니라 당시 성리학적 질서에 저항하는 대항이데올로기였다는 새로운 해석도 내놓았다. 이처럼 저자는 주관성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도 근대역사학이 추구했던 것들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요컨대, 근대역사학의 문턱에서 초월적 자세를 취하지 않고 그 문턱들을 껴안으며 새로운 것을 지향한 셈이다.


최정도 이방의 등장은 주관성과 객관성에 대한 오랜 숙원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문인방의 등장이 갖는 의미만큼 최정도 이방의 등장이 갖는 의미도 크다고 본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야기라고 한다. 이야기라면 그것이 1인칭이든 3인칭이든 화자가 등장하여 재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최정도 이방의 출현 자체에 시선을 빼앗기기 보다는 그가 하는 ‘주관적인 말’이 얼마나 보편적인 해석에 어떻게 닿아 있는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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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도사 2006-12-1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참 담연님의 서평 대단합니다. 이 분은 정말 뛰어난 역사학자 같습니다. 어쩌면 저자보다 몇 백배 뛰어난 분인 것 같아요. 정말 감탄했어요. 이런 독자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