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박현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박현모, 푸른역사, 2007)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책



보기 드문 책이 한 권 나왔다. 이 책은 세종과 그 시대의 여러 면모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수 있지만, 새로운 역사서술을 선보였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 하다. 박현모는 이 책에서 "세종의 '정치'에 접근"하였으며 "사료가 침묵하고 있는 계곡에서는 '상상적 고찰'이라는 다리"를 놓는 "'실험적' 글쓰기"를 선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한껏 의미를 부여하여 1990년대에 나온 역사서 가운데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책’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이 주목해야 할 세 가지를 꼽으라면,



1

역사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라면, 그런 맥락에서 몇 가지를 더 부연해보자. 첫째, 이 책은 복수의 시각에서 쓰여졌다. 대체로 역사는 단일한 시각에서 쓰여지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이런 주류적 흐름에 반기를 들며 복수의 시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선왕이면서 살아 생전 왕위를 물려준 태종이 본 세종, 신하였던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김종서, 신숙주가 본 세종, 아들이자 비극의 주인공이 된 세조가 본 세종, 그리고 먼 훗날 세종의 시대처럼 성세를 누렸다는 성종이 바라본 세종 등으로 여러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저자의 노력을 결코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본질적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저자 역시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포기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세종을 바라보았으며 一以貫之는 없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저자는 ‘정치가 세종’이라는 시각을 줄 곳 견지하였다.



2

둘째, 이 책에서 세종을 聖君이 아닌 ‘정치가 세종’으로 묘사되었다.



사실 우리는 줄 곳 학교에서 세종을 ‘성군’으로 배웠다. 한국역사에서 ‘聖’이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순신과 세종이 아마도 대표적일 텐데, 그나마 이순신은 그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일부 있었던 반면, 세종은 비판은 별로 없었다. 물론 트집을 잡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세종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정치’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聖을 탈색하려고 노력하였다. 저자가 취한 태도는 프롤로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인간’ 세종의 고민으로부터 그의 정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역사 속에서 덧칠해진 ™S오이 아닌 맨얼굴의 세종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물론 저자의 이런 태도는 신선하다는 점에서 <역사학과의 직업역사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태도가 없다면 과학적 진술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서술에서 거둔 효과가 어느 정도였던가 하는 것은 여기서는 유보하고자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역시 聖君의 기호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시도 자체는 매우 의미가 있었으나, 그의 시도가 실제 서술에서 성공하였다고 흔쾌하게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3

셋째, 이 책은 ‘상상적 고찰’을 내세운 ‘실험적’ 글쓰기를 시도하였다. 언제까지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쓰는 글을 ‘실험’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니까 더 이상 역사적 상상력이 실증이라는 말에 밀릴 이유가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실험으로 겸양지사를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이 책 역시 실험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비록 스스로 한계를 지었으나 이 책에서 제시한 상상적 고찰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실증적인 역사서술을 하였다. 그 자신의 말처럼 “‘가위와 풀’을 가지고 사료를 최대한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증이 아니면 무엇이 실증인가. 그러나 저자는 내심 욕심을 낸다. 그것은 실증이 아니라 실증의 일부분이라고. 저자는 정치학과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답게 정치를 “‘정치’란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개의 진실과 복수의 가치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며 “큐빅과 같이 여러 개의 국면들이 맞붙어 공존하는 그런 세계”라고 하였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역사학과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역사 역시 ‘실증과 상상력이 맞붙어 공존하는 세계’이다.



저자가 정치란 선과 악이 혼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이나 악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구의 인식이라고 하였듯이, 역사도 실증과 상상력이 혼재된 것이므로 실증에만 국한한다면 온전한 역사를 서술하기는 힘들다.



물론 저자에게도 아쉬운 점은 없지 않다. 그것은 저자가 상상적 고찰을 <‘사료’=역사, ‘해석’=정치사상>이라는 구도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역사는 사료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사료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료=역사라는 인식은 적절하지 않다. 20세기의 전통적인 역사인식도 <사료 해석=역사>라는 구도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저자의 역사관은 좀 좁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상상력 고찰의 칼을 배든 것은 의마가 크다 할 것이다.



《정감록》(백승종, 푸른역사, 2006)과 같이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어떤 책을 심도 있게 읽으려면 다른 책과 비교해서 읽을 필요가 있을 텐데, 이런 맥락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정감록, 역사사건의 진실게임》이다. 정감록과 읽을 때 세 가지 비교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조선 초기 守成의 시기와 조선 후기 반역의 시기를 대비해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세종을 조선을 ‘국가’로 만든 정치가로 상정하면서 이 시기를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치질서를 만든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감록의 저자는 조선의 주류적 정치질서인 성리학적 질서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 정감록을 제시한다. 조선을 세우려는 사람들과 조선을 뒤엎으려는 사람들의 대비가 흥미롭다.



둘째, 지배 엘리트의 시각과 저항 지식인의 시각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세종>은 지배 엘리트가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정감록>은 전봉준과 같이 지배질서에서 배제된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비교해서 읽는다면 조선을 보다 심층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셋째, 역사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세종>은 세종이라는 주인공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정감록>은 직접 그 당사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전자는 주인공을 향해 시선이 몰려들었고 후자는 주인공으로부터 시선이 퍼져나갔다. 두 역사책은 모두 1인칭 기법을 사용하였다. 역사서술에서 1인칭 기법은 매우 드문 방식이다. 1인칭은 소설이나 수필 등에서는 익숙한 방식이지만 객관적 서술에 지배당하는 역사에서는 낯선 방식이다. 그러나 두 책 모두 광범위한 사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1인칭 기법을 통해서도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러나 저자의 정치적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 가지 당혹스러운 것은 저자의 정치관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자가 이 책에서 드러낸 정치의식은 민주화 시대의 그것보다는 왕조시대의 통치의식에 가깝다. 이 말이 거슬린다면 지배 엘리트 위주의 서술방식이라고 교정해줄 수는 있다.



아마도 저자는 당대의 시각과 언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우리가 당대의 시각과 언어를 알 수 있겠는가. 물론 기록에 그렇게 남겨져 있는 것을 가위와 풀로 오렸으니 맞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문자일 뿐이지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의미는 저자 자신의 말처럼 현재적 시각과 현재의 문법에 있다.



따라서 내가 저자가 왕조시대의 통치의식에 집중되었다고 한 것은 그 시대를 그렇게 반영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질서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세종의 ‘정치’에 방점을 찍었지만 기실은 ‘세종’에 방점을 찍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통치와 국가질서 확립이라는 맥락에서 세종과 지배세력의 정치를 묘사하는 데에 주력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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