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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평점 :
한 권의 책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글로 써보려고 한다. 이런 글을 대개 서평이라고 하니 서평을 쓰는 셈이다. 그런데 서평이란 무엇일까. 아니 서평은 왜 요청되는 것일까. 단 하나로 규정되지 않겠지만, 아마도 그 중의 하나는 저자도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지적해보고 다른 계열들과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 들뢰즈는 "한 작가에게서 그 작가 자신도 발견하지 생각하지 못했던 높은 가능성을 이끌어내며 특별히 긍정적인 측면을 밝혀낸" 사람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서평이 무엇을까 하는 고민하는 사람에게 유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이럴 수 있다. 행여나 과장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자점을 찾아내 과장하고 취약점이 발견되면 오히려 미화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이 심해지면 병리적 현상이라 치료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그리 심하지 않다면, 그리고 비판적 시각을 놓치지 않는다면 서평의 미덕이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어긋남
오늘날이 스스로 묘지명을 쓴 선비들을 좇아 자신의 묘비명을 써야하는 시대일까. 오늘날은 이미 심각한 상황이 되어버린 매장문화를 비판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대이다. 1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쓴 선비를 좇아 매일 일기를 써야 할까. 내밀한 일기와 고백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상업화하여 저작권마저 붙는 상황에서 일기는 '역사'가 되기 어렵다. 역사보다 한 개인의 인권이 더 중요한 시대에, 교사와 부모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일기를 초등학생에게 계속 쓰게 하는 것은 곤란하다. 산을 유람하는 것이 독서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좋은 것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은 해외여행의 시대이고 그 곳에서 겪은 일상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시대이다.
물론 저자는 호고벽(好古癖)에 빠져 오늘날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과거만 찬미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는 조선후기 선비들의 삶과 예술, 사유와 안목을 길러내어 되살리려고 하였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독자의 눈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미쳤듯이, 저자 역시 과거와 현재를 균형 있게 보려는 하였다. 책의 곳곳에서 숨김 없이 드러낸 것처럼, 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비다움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과거의 것들을 재현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상황의 차이일 뿐 시대착오적인 글은 아니다.
어긋남, 그러니까 <시대착오가 아닌 어긋남>이 주는 미덕은 무엇일까. 아마도 현재 상황을 보다 면밀하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가 싶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 등자하는 이들의 삶은 제도권 안의 사대부의 삶이 아니라 제도권 밖에서 선비다움을 추구한 삶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17~19세기 선비들이 품었던 열정과 바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곧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 제도권 밖에서 진행되는 것들에 대한.
선비답게 사는 것, 또는 인간답게 사는 것
이 책에 소개된 선비들 중에는 부자들도 있었지만 가난한 이들도 있었다. 제도권에서 벼슬을 한 이도 있지만 벼슬을 하지 못한 채 제도권 밖에서 울분을 삭힌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들을 선비다움으로 수렴할 수 있을까. 답은 오히려 간명하다. 빈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공통적이었던 것은 문사철(文史哲)과 예술이었다. 오늘날의 용법으로 하면 인문학이 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직업교육이나 사회보장제도의 확충보다도 인문학이다. 인문학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이 <버려진 세계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이미 입증된 역사적 경험이다. 반독재투쟁에 헌신했던 대학생들,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에게 인문학을 빼놓으면 달리 할 말이 없어진다.
물론 여기서 인문학은 좁은 의미의 문과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은 인간이라는 존재 및 이 존재가 창출한 문화적 산물을 이해하는 담론이다. 요컨대, 인간을 이해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은 '인간다움'을 고민하게 한다. 이렇듯 인문학은 부자에게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사유화하는 것이 그릇된 것임을 알게 하는 힘이며, 가난한 이에게는 자신도 공적 세계에 속하는 존재임을 일깨우는 힘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곳들, 가난한 집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다양한 곳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들, 교회건물에 도서관을 만드는 교회,....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모두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낯설게 하는 효과
고전적인 것들은 사물을 낯설게 하는 효과가 있다. 책의 제목이 너무도 고전적이라 그런지 익숙하던 선비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비답게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책을 들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전적인 제목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나는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읽었다. 그러나 어떤 책이든 다양한 시각에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도 선비답게 산다는 것을 묻는 것보다 행복한 삶을 묻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의 시각에서 읽을 수도 있고, 인간다움을 떠나 단지 선비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인 사람의 관점에서도 읽을 수도 있다. 또한 조선시대를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의 시각과 저녁이나 주말에 조용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책을 찾는 사람의 시각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다 읽고 나니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인식에는 동의하기 어려움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역사관에 무척 동의하기 어려웠다.
저자의 역사인식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사관에 가깝다. 고구려를 '우리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라든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강력한 비판도 그렇고, 전후 일본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 등에서 그런 것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알아야 하는 것은 민족주의 역사학은 자자가 책에서 말한 '역사는 공언'이라는 말과 배치된다는 점이다. 저자가 진저 역사를 공적 세계에 대한 담론으로 이해하려면 역사와 민족을 구분해서 사유해야 한다.
또한 저자의 역사인식은 왕조적 사관에 가깝다. 저자는 한 사관(史官)이 세종을 비판한 것에 대해 수긍하지 못하였다. 이는 세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이 세조을 '성군(聖君)'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세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렇게 분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종은 성군이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의 정치가로서 치적도 쌓았고 실정도 하였던 사람이다. 따라서 세종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곤란하겠지만, 聖君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