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전 -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여덟 인생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슬픔, 그리고 '세월을 견딘 사람들'의 위대함

소설가 김형경은 추천의 글에서 "<여자전>에 대해 무엇이든 덧붙이는 것은 사족"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너절한 사족'을 붙이지 않을 용기가 내게는 없다. 20세기의 암울했던 우울했던 측면을 가파르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묵묵부답으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책을 읽기 이전에도 '직업역사들'의 역사를 많이 읽었다. 때로 왜 읽었나 하는 허무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들이 비록 '팩트'이니 '사실'이니 하면서 글을 썼다지만 감동이 오지 않는 것을 어찌할까. 인간의 존엄이라든가 세월의 위대함이 주는 메시지가 없다. 그러니 감동이 있을 리가 없다. 반면 <여자전>은 직업역사가가 쓴 것도 아니고 그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학교역사교과서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이들이긴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세월을 견딘 사람들'의 위대함을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역사의 힘이라면 힘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만약 인간을 이해하는 담론이라면 이 책이야말로 20세기 역사서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8명은 20세기를 살았던 여성이라는 점 말고는 달리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동시대 한국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공통점 말고는 신분도 부도 학력도 환경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모를지라도, 서로 모르는 채 제각각의 인생을 살았더라도, 20세기의 격랑에서 이들은 슬픔을 관통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보따리'를 같이 푸는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의 슬픔은 '한 낱 슬픔'이면서도 '역사적 슬픔'이다. 그들이 본디 영웅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고 말할 때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풀무질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록 영웅처럼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위대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웅이기 때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세월을 견딘 사람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전자가 위대함을 독점하는 것을 역사학에서는 영웅사관이라고 한다. 반면 후자에 주목하는 것을 미시사적 관점이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책은 미시사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2. '傳이라는 형식'

엄밀하게 말하면 이 글은 여덟 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편의 이야기이다. 물론 8명이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말로 자신의 삶을 전해준다. 그러나 이들의 말을 글로 표현하는 이는 김서령이라는 저자 한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뚜렷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물론 이야기를 역사로 협애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역사를 포괄하면서도 역사 이상인 어떤 것, 저자는 이것을 "소설도 노래가사도 역사도 체험도 모조리 이야기라는 말 속에 녹여낸다"고 표현하였다.

밑바탕이 되는 것, 단순히 역사의 사료이거나 소설의 소재거리가 아니라 역사를 가능하게 하고 소설을 가능하게 하면서 관통하는 형식, 즉 이야기라는 형식을 그는 발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야기라는 형식에 역사가 출현할 수도 있고 소설도 등장할 수 있고 영화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저자가 '傳'이라는 형식을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의 복원>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꽃으로 문질러 쓴'

이들 중에는 애초부터 삶의 목표가 분명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운명에 내던져진 채 주어진 상황에서 충실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는 발전의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지만 후자는 퀼트의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다. 이 글의 장점은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가 진보이냐 발전이야 하는 논쟁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논쟁이란 것은 대체로 백가쟁명처럼 피어오르건만 그 밑바탕이 되어야 할 실제 역사서술은 매우 적은 것이 현실이다. 풍요의 빈곤을 말할 때 논쟁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이야기는, 성공한 사람들의 아애기는 발전의 시각에서 쓰여 지게 마련이다. 언제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성공하게 되었는가, 성공의 정점에 오르게 되기까지 어떤 역경을 거쳤는가 등등. 이러한 이야기는 감동을 주고 꿈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이야기, 그렇다고 실패하였다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꿈을 주기보다는 퀼트의 아름다움을 준다. 이럴 때 아름다움은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고통을 겪고,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출발하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내가 겪어온 인생을 부정할 수는 없어 긍정할 때의 아름다움. 퀼트를 짜면서 주름진 삶을 하나씩 펼치던 <아메리칸 뷰티>라는 영화에서 나타났던 아름다움도 대체로 이런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할 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좋겠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마도 저자가 "꽃으로 문질러 쓴"이란 표현을 쓴 것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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