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 광기의 랩소디 - 세상을 바꾼 컴퓨터 혁명의 영웅들, 복간판
스티븐 레비 지음, 박재호.이해영 옮김 / 한빛미디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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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미디어 '나는 리뷰어다'의 2020년 8월 리뷰 대상 도서로 선택한 책이다.

 

책 이름에 '해커', '광기' 이런 말이 있길래, 시스템 침입 관련 내용인 줄 알았다.

(예전에 본 '해킹, 침입의 드라마'가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제는 'Hackers: Heroes of the Computer Revolution'인데.. 너무 해커를 미치광이로 번역한 제목인 듯 하다. 부제에 영웅이라고 되어있다만.. 이 독후감 쓰면서야 부제를 처음 봤다.


초반에는 전화 해킹해서 공짜 장거리 전화하고 그러길래 뒤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더라.

 

이 책은 작가님이 1982년부터 1983년 사이에 100회가 넘는 해커 인터뷰를 거쳐서 완성한 책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컴퓨터 산업의 발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최초 출간이 80년대 초반이었나 보더라.

출간 이후 작가님이 추가한 맨 마지막 두 챕터('후기: 10년 후', '후기: 2010년')를 보는 것도 흥미 있었다.

 

미국에서의 IT 주도권이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더라.

최초의 해커였던 TMRC(Tech Model Railroad Club, 테크 모델 철도 클럽, 1946년에 창립된 MIT 동아리. http://tmrc.mit.edu) 부터 최후의 해커였던 리처드 스톨먼(RMS, Richard Matthew Stallman)까지 숨가쁘게 넘어가는 것을 재미도 쏠쏠했다.

 

솔직히 말하면 50년대, 60년대 이야기는 아는 이름도 없고 내용도 익숙하지 않아서 많이 지루했다.

(아직도 천공카드로는 어떻게 프로그래밍하는 것인지 유튜브 봐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만 지루함을 참으면, 요즘 세상과 유사한 예전을 다시 돌이켜 볼 수 있는 재미가 있었다.

'공유' 정신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활활 타올랐다고 한다(깃허브가 나오기 전까지는 외쿡 사람들이 짠 소스를 본 적이 없었는데 1970년대 중반에는 벌써 공유 문화가 퍼져 있었다).

 

한빛미디어 홈페이지에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 관련 내용도 있더라.

https://hanbit.co.kr/media/channel/view.html?cms_code=CMS9179050830

 

맥북에서 소프트웨어 설치할 때 홈브루 설치한 다음에 brew 명령어로 설치하는 게 아마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 아닌가 싶다. 홈브루 클럽이 활성화 되면서 '부트스트랩'(프론트엔드 프레임웍의 원조인 듯)이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나왔더라.

 

홈브루는 자신들의 힘으로 새로운 업계를 '부트스트랩'해나가는 하드웨어 해커 종족의 선봉대였다. 그들은 당연히 새로운 업계가 이전 업계와 다르리라 믿었다. 마이크로컴퓨터 업계는 해커 윤리가 지배하리라('부트스트랩'이라는 용어는 해커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새 기술 은어였다. 글자 그대로, 컴퓨터가 처음으로 켜졌을 때 혹은 부팅될 때 프로그램이 자신을 컴퓨터로 올리는 과정을 뜻했다. 프로그램 일부가 코드를 컴퓨터로 올리면 바로 그 코드가 컴퓨터를 돌려 나머지 코드를 가져온다. 자기 신발 끈을 당겨 자신을 끌어올리는 셈이었다. 바로 이것이 홈브루 사람들이 하려는 일이었다. 작은 컴퓨터 시스템 세계에 틈새를 만든 후 깊이깊이 파고들어 틈새를 동굴로, 즉 영구적인 정착지로 만든다.

p.283-284

 

70년대 중후반부터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 아는 이름이 나오고, 게임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림이 많아지니깐 눈이 반짝이게 되더라.

 

현대 컴퓨터 게임 산업을 발전시킨 많은 이가 전문 프로그래머 출신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시에라 온라인(구 온라인 시스템즈)의 로버타 윌리엄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

여성이면서 스토리 작가로서 어드벤처 게임의 새 장을 연 것 보면서,

코볼의 창시자(그레이스 호퍼)가 오버랩 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확실히 다르긴 다른가 보다. 


 

온라인 시스템즈의 성인용 게임 - SOFTPORN ADVENTURE: 맨 오른쪽이 로버타 윌리엄스(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니 텍스트로 게임을 하는 것이어서 실망을 조금 하기도 했다. 엔딩에만 화끈한? 장면이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나도 한 때는 게임을 좋아했지만 게임에 많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니깐 컴퓨터 산업을 발전시킨 주 원동력이 게임인 것을 알겠더라.

사람은 본질적으로 작은 성공을 여러 번 겪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인가 보다.

내가 아주 가끔 가다 하는 컴퓨터 게임에 죄책감을 덜 느껴도 되겠더라(예전엔 현실에서 작은 성공을 못해서 그렇게 게임에 빠졌던 것인가..).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던 편견을 많이 깨부수게 해 준 책이었다.

(전공자만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잘 할 수 있다, 컴퓨터의 역사는 남자들의 전적으로 발전시켰다, 게임은 백해무익하다 등등)

 

내가 책을 읽기 전에 느꼈듯이 원래의 ('직접 해보라'는 강령의) 의도와 다르게 '해커'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사실도 아쉽더라.

 

... 게시판에 접속해 시스템 암호나 신용카드 회사 코드를 내려받아 그 정보로 디지털 파괴를 선동하는 얼치기 중학생들 소식은, 그것도 언론이 그들을 해커라 부른다는 소식은, 자신을 진짜 해커라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p.573

 

작가님이 '10년 후' 챕터에 쓴 부분이 해커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잘 나타내 주는 것 같다.

 

매킨토시 컴퓨터의 설계자인 버렐 스미스는 제1회 해커 콘퍼런스에서 다른 발표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했다. "해커는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어느 분야에서는 해커가 될 수 있습니다. 해커 목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첨단 기술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장인정신이 있으면 해커라 생각합니다."

p.575

 

전공이 뭐지? 먹는 건가? 싶었던 그 때 그 사람들이 실감나는 컴퓨터 그래픽을 위해 한땀 한땀 모니터에 그림 나오게 만든 걸 생각하면서 반성을 좀 해야겠더라.

참, 그 당시에는 어셈블리어로 프로그램을 짰단다.

 

책에는 공유 문화가 없어진 것까지 아쉬워하면서 끝나는데, 인터넷이 나오고 깃허브가 나오면서 역사가 반복된 것 보면 참 묘하다.

 

폐쇄된 공간(통신산업, 반도체산업)의 보안 구역에서 십 수년 간 일하다가 바깥 세상으로 나온지 1년 하고 몇 개월이 지났다.

밖으로 나와보니, 이제는 깃허브에서 스타를 몇 개 받는지, 오픈 소스 어디에 얼마나 컨트리뷰트를 했는지가 '해커' 능력을 나타내는 척도가 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영어 공부를 진작 했어야 하는 건데...).

 

'해커'라는 뜻이 원래의 순수한 그 의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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