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파는 회사
아마노 아쓰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더난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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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업을 이어받아 리조트 호텔을 경영하게 된 MBA 출신 사장이 적자로 돌아선 숫자만 올릴 생각을 하다가 마침내 '마음을 움직이는 서비스를 하자', '나의 리조트에 오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서비스를 하자'는 깨달음을 얻자 그것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아랫사람을 변화시키고 마침내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

요즘 자주 보이는, 우화 형식을 빌려 자기계발서 특유의 내용을 전달하는 스토리텔링 방식을 취하고 있다.

참, 일본 자기계발서 스타일.

예전에는, 그러니까 내가 어리고 철이 없을 때는 물건 파는 사람은 사는 사람보다 낮은 위치, 즉 을이고 내가 수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내가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라는 개념을 장착했다.

예를 들면 카페에 내가 가서 돈을 써주는 거니까 마땅히 카페 사장이 나에게 굽실굽실해야 한다가 아니라 이런 아늑한 공간을 열어줘서 참 고맙다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혹 내 맘같지 않은 판매자나 회사도 있고 또 내가 열과 성을 다해도 그 맘을 몰라주는 손님이나 고객도 있겠지만 점점 그런 개념이 있는 사람에게서 물건을 사고, 그런 개념이 있는 사람의 음식점에 가고 그런 생각이 있는 사람들을 찾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여러 형편을 경험해 보게 되면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더 많이 배려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서, 나이 들어 가는 것에 유일한 위로가 된다. 내가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지혜로워졌을 때 세상을 뜨게 되는 것이 아이러니지만, 회사에서도 자신의 업무 경험이 최대치였을 때 나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삶이란 참 아이러니한 것이다.

내가 판매행위를 하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내가 파는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물건을 팔고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내 시간을 회사에 저당잡힌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작은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참 행복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충만하겠지.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면 내가 먼저 그런 생각을 장착한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일테고...

쉽게 후루룩 잘 넘어가는 책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고.
 
모 건설회사 카피처럼 진심이 집을 짓고, 진심이 물건을 팔고, 진심이 통하는 그런 사회에 살고 싶다. 아니 한글자만 바꿔보자.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사족.

책이 참 예쁘다. 그런데 양장본이다.
페이퍼백으로도 예쁜 책은 만들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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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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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로맨스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로맨스물이 아니다.

첫째 남녀 주인공이 이미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 마지막회를 보면서 느낀 건데 19회 때와 20회의 두 배우,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그들이 결혼하여 부부가 된 순간 둘의 사랑은 더이상 풋풋한 남녀의 로맨스가 아닌 그냥 행복한 삶이 된다.
그렇게 애간장을 녹이던 현빈과 하지원의 백허그인데, 결혼후 5년이라는 단서가 붙자 아무 스파크도 튀지 않는 생활로 느껴진 건 결혼 5년차 아줌마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아니었길 바란다.) 

각설하고 둘째, 다른 주인공들의 비중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유생들의 나날'에서 남장한 윤희와 완벽남 이선준의 사랑을 엮어가느라 주변인으로 맴돌았던 구용하와 문제신도 '각신들의 나날'에선 그간 쌓은 캐릭터를 좀 더 펼쳐낼 공간을 부여받는다.

네 명의 주인공 중 누구도 찌그러지지 않게 살려낸 규장각 각신들의 그 세계는 참 균형 잡히고 보기에 좋았도다. 
특히, 공부만 잘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알리지 못할 고민을 그러안고도 규장각을 향한 외부의 견제, 한달 안에 파직을 당하지 못하면 네 가족은 죽음 목숨이라는 시부될 사람의 압박, 가난한 살림을 일으키기 위한 과욋일, 규장각의 가중한 업무를 몸이 부서지도록, 마음이 부서지도록 해내면서도 어느 하나 '에라 모르겠다' 놓아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윤희가 마음을 움직였다. 사건이 해결되어가는 모양새들이 '소설이니까 그렇지'가 아니라 그렇게 진인사할 때 하늘도 도움을 주는 거지, 나 역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대하는 내 마음을 돌아봐야겠어,라는 반성을 일으켰다고나 할까...  

구용하는 놀멍놀멍하면서도 세간의 일을 다루는 지혜는 빠삭하여 암행어사의 일조차도 기생집을 전전하며 한방에 해결하고~

물건을 확인한 뒤에 뺏어 보게나. 하지만 이기는 건 강한 자가 아니라 약점이 없는 자라네.

이 주점의 비리를 캐내려면 가까이 있는 주점을 통하는 게 가장 쉬우이. 알고 있는 걸 가장 쉽게 알려 주지. 안 좋은 일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말일세. 언제나 무서운 뒷말을 만들어 내는 건 동종업을 하고 있는 경쟁자거든. 어물전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건 그 옆의 어물전임을 잊어선 안되네.
옛날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양반은 일을 참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 돈 버는 것도 언제나 다리품 한 번 팔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손쉽게 해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말에서도 믿음직한 구석이 보이는 듯하였다.
이건 뭐, 쥐식빵 자작극을 일으킨 사람의 일화가 너무 금방 떠오르는구만~

문재신은  아버지와 티격태격하는 모양이 너무나 정겹고.

염병할! 내가 네놈 때문에 원수 놈 아들까지 걱정해 주게 생겼다. 네 녀석들처럼 어울려 다니니까 세상이 복잡해지잖아! 적을 구분할 수가 없어, 적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복잡하지 않은 세상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람들이 단순하게 나누고 싶어 했을 뿐이지.

하기야 너한테는 소론이란 말도 민망하지. 네 머릿 속에 학문이라 불릴 만한 게 얼마나 들어가 있다고. 패만 뭉친다고 다 당파는 아니니까. 어쩌다가 이런 놈이 내 아들인지, 이선준 같은 아들만 있으면 다리 뻗고 자겠구먼.
재신의 한쪽 입 꼬리가 자신 있게 올라갔다.
아버지가 모르셔서 그렇지, 걔네 부친도 못지않게 골치 썩거든요.
골치 썩겠지. 네놈 같은 골칫덩어리와 붙어 다니는데, 암!

악! 아버지 이건 비겁합니다. 묶어 놓고 패다니!
풀어놓으면 네가 가만히 맞을 놈이냐? 내가 늙은 것과 네가 묶인게 오히려 공평하다, 인마!

대물도령의 물건, 내가 갖지 못할 바에야 잘라버릴 테다, 라며 표독을 떨던 초선이는 또다시 추문에 휩싸인 윤희를 구해내고.
도련님 바람났다는 소문만 들려 봐요. 바로 달려가서 도련님 물건을 확 잘라 버릴 테니까
나도 장가는 가야 하오
본처는 봐드려요!
아, 쏘쿨한 기생느님의 대사~ 왠지 내마음을 건드리고(뭐래니...)

독설가인 왕도, 알고보니 아첨도 잘하는 윤희도 정감이 간다.

#
어디 보자. '애석하도다. 백성의 곤궁함이 중한데, 자질구레한 논쟁이 앞서면 어찌하느냐. 마땅히 구휼을 먼저 살피도록 하라.'

넌 정말 고약한 신하로다.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느냐? 이 당시 나는 '그따위로 일을 처리해 놓고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더냐! 백성들이 지금 다 죽어 가는 판국에 모여 앉아 입만 나불거리고 있다며! 당장 녹봉 챙겨 가는 값은 해라' 이렇게 말하였도다.

윤희는 안절부절 못하고 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입 꼬리에 미소가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제야 겨우 농담임을 알아차리고 장단을 맞춰 농담처럼 말을 하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보다는 조금 더 심하셨사옵니다."

왕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이런, 여기 또 있구나. '너희들이 아직 나보다 배움이 부족한 탓이니 나의 말을 따르도록 하라.' 이때 난 이리 말하지 않았노라.

그와 비슷하게는 말씀하시었사옵니다.

어허 대단한 거짓말쟁이로세. '그 입 닥쳐라! 쥐뿔도 아는 거 없는 놈들이 감히 내 앞에서 아는 척이냐?' 이리 말하였느니.

임금과 대신들의 회의록을 맡은 윤희가 적절히 윤문한 회의록 속기는 왕이 실제로 한 말과 함께 들으면 참으로 맛깔나지 말임다~ 

#
딱히 무슨 방법이 필요하겠사옵니까? 더 바랄 것도 없이 딱 평소대로만 하시옵소서. 달변과 독설, 궤변에 있어서만큼은 일당백이 아니시옵니까.'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상대가 왕인지라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상감마마이시라면 안 될 일이 없사옵니다. 논점만 바뀌면 뒤로 물러나 계시는 게 가장 중요하옵니다.
너는......정말이지 고약한 놈이로다.
...
왜 그 녀석들이 순순히 한양을 떠났는지 알겠구나.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게지."
몸은 아껴 가면서 일하거라. 너 또한...., 나의 신하이니.
삼인방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윤희가 아니라, 여리여리해보여도 제몫을 다하는 윤희가 멋있다

그대가 용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대가 헤엄쳐 놀 수 있는 물이 되겠소. 그러니 그대의 바람이 곧 나의 바람이오.

윤희는 엉금엉금 기어 글자로 다가갔다. 글자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글자는 그녀의 손등으로 옮겨 왔다. 고개를 들어 창을 보았다. 바닥에 써 놓은 글이 아니었다. 창호지에 덧대어 뒤집어 붙인 그의 편지였다. ...선준은 알고 있었다. 힘겨운 일이 생기면 이 방에 잠시나마 기대려고 찾아올 자신의 아내를.

이봐이봐, 이런 무책임한 작가를 봤나. 이렇게 세상에 없는 완벽한 남자를 있는듯이 생생하게 만들어 놓으면 어쩌란 말야. 이걸 본 여자들은 이런 배려깊은 사랑을 꿈꾸는데 현실의 남자들이 어디 그래? 아이 낳고 나면 자기는 안 돌봐준다고 애 같은 짓이나 하고 말야. 작가는 부디 기대를 높혀놓고 현실의 남자를 맞닥뜨리게 하는 잔인한 장난은 마시오.(갑작스런 버럭모드, 아줌마의 혈기로 이해해주시길~) 

예전엔 로맨스물을 읽으면 여주인공은 나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데, 나처럼 털털한 여주인공을 죽도록 사랑하는 이런 완벽남, 내게는 왜 하늘에서 안 떨어지나요, 모드였다면 지금은 이 소설을 읽고 이런 부분이 마음을 움직인다.  

과하지 않은 몸짓 하나, 우아한 손짓 하나, 미소를 놓지 않는 눈짓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은 분이었다. 황씨의 부러운 속삭임이 배경으로 깔렸다.
"젊음은 모든 여인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지만, 저 나이에 갖는 아름다움은 오로지 남편의 애정이 만들어 준단다. 사내들은 영원히 아름다운 부인을 소망하면서도 그 소망이 제하기 나름인 것을 몰라.

신랑, 잘 들었어? (근데 그래서 이 남자가 자꾸 콜라겐 먹으라고 하나? 마누라의 미모는 남편하기 나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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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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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은 그것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선 한 단어, 한 문장 만으로도 그것이 가진 한 뭉텅이의 의미를 줄줄이 끌고 들어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더 깊이 있는 의미를 전달해 주지만 그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겐 한 두 걸음 걷다 자꾸 걸려 넘어지는 돌맹이 같은 것이다.

아편쟁이의 고백이라 자신의 경험을 낮추어 말하고 있지만 작가가 이루어 놓은 교양의 성벽은 맨 정신의 독자를 주눅들게 만든다.

한마디를 던지더라도 주석 없이 그냥 나온 말이 없고, 표면만 있는 경구가 없다. 신약성경이든, 율리시스든 그리스 고전이든 뭔가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다. 텍스트를 죽죽 읽지 못하고 계속 표시된 각주를 읽으면서 '이씨, 별 내용도 아니구만 자꾸 이럴래?'라는 반발심이 드는 한편, 조선시대 선비들이 글을 쓸 때 '고사리'라고 쓰면 '백이숙제'의 고사를 떠올리며 글의 맥락이 삽시간에 음식 얘기가 아니라 충절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것 같은 이 교양 놀음, 나도 한번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어떤 오기가 발동한다....

얼마 전 읽은 견인도시 연대기에서 고아 아이들을 모아 도둑질을 시키면서 그 아이들을 '로스트보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고 보니 피터팬의 네버랜드에 모여있는 고아 아이들이 서로를 부르는 용어였음을 딸아이에게 피터팬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면서 비로소 알았다. 물론 피터팬에서 '로스트보이'라 불린 아이들의 이력을 모르고 견인도시 연대기에서 '로스트보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해도 새로운 이야기를 즐기는데는 그리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과거와 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그 말에는 새로운 곳으로 점프할 수 있는 새로운 링크가 또 하나 추가된다.

이 얇은 책이 고전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체면과 격식을 중요시하는 19세기 영국 지식인 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엿볼 수 있었고 그 젠 채하는 지식인의 말투가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고 약간은 딱딱한, 고전스러운 문체지만 책은 쏙쏙 읽혔다. 이것은 내가 책읽기 내공이 쌓여서인지 작품의 힘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제대로 된 약이 없어 그 시절엔 일상적으로 쓰였다는 아편, 시작은 값싸게 살 수 있는 구원이지만 결국은 아편의 하인이 되어 지배당하고 그 와중에 피폐해지는 일상이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삼자가 되어 자신의 과오를 담담히 기술해나가는 것은 분명 후회로 점절된 내부의 격랑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겠지만 그는 끝까지 냉정을 유지한다. 나는, 그가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히듯, 그를 경계로 삼아 어떤 것에든 휘둘리지 않을 것,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을 훗날 낱낱이 고백해야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책이 이 세상에 온 의미일 것이고, 내가 이 책을 읽은 의미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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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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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라 해서 노숙자와 동급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당신의 아버지로 인해 겪었던 상처가 자신을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아버지로 만들었고, 그 아버지의 비뚤어진 억압으로 인해 트렁커가 된 '름'
부모가 동반자살을 하려다 혼자 살아남은 아이, 그 시절의 기억과 그 이후의 거친 삶을 기억에서 지우고 트렁커가 된 '온두'

사람이 멀쩡한 집을 놔두고 트렁크에서 자야한다는 사실을, 뭐 남의 일이니까 내 알 바 아니지,라고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설득력이 이 이야기에는 있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기억력을 자극하는 게임 치킨차차차를 만든 '름'과 '온두'는 바로 옆 주차공간에 차를 대고 밤마다 멀쩡한 집을 두고 그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치킨차차차를 하면서 두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과거를 서로에게 풀어놓는다.

아버지가 기억을 잃어가지 않도록 게임을 만든 '름'은 효자가 아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짓을 잊지 않고, 자책하며 고통받기를 원하는 지도 모른다.
한때 아버지와 아들은 동시에 언어장애를 겪는다. 아버지는 '죽어라, 죽어'라는 동사 밖엔 말하지 못하고, 아들은 '개새끼, 나쁜 놈' 같은 명사만을 말한다.
물론 하나의 동사밖에 말하지 못하는 상태와 무엇이든 명사는 말할 수 있는 불공평한 상태를 놓고 명사의 힘이 크냐, 동사의 힘이 크냐를 판단할 순 없겠지만 이 둘의 싸움에선 명사의 힘이 큰 것 같다.

유모차를 판매하는 온두는 특이한 판매사원이다. 친절 따위는 나에게 바라지마라, 나는 너와 니 아이에게 딱 맞는 유모차를 권하는 일을 할 뿐이다. 니가 사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까칠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유모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인해 전국에서 그녀가 권하는 유모차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그런 판매사원이다.

작가는 여자다. 물론 소설 앞 표지에 자신이 창조한 세상과는 퍽이나 다르게 곱게 미소짓는 작가 사진이 있지만 그 사진이 없었어도 이 책의 디테일들을 읽어보면 그녀가 여자이고 아마도 누군가의 엄마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까칠하지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초보엄마를 이끌어줄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그 푸대접을 겪고 싶다.

나는 친절은커녕 오히려 불친절한 판매 사원이었다. 그냥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유모차가 무엇인지 선택해서 판매할 뿐이었다. 그래서 매장에 와서 대접을 받길 원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불쾌를 느끼고 돌아가기도 했다. 나는 '고객님'이란 간지러운 말은 쓰지 않았다. 만약 꼭 써야 한다면 '님'을 빼고 싶다. 고객! 이 물건은 어떤가요? 당신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이 유모차입니다.
"다시 말할게요. 이 유모차를 끌고 오전에 두 시간씩 외출을 하세요. 힘이 붙으면 빠른 걸음으로 운동하세요."
"애를 태워서요?"
"그럼 유모차에 누굴 태우려 하셨어요?"
내 말투는 썩 좋지 않았지만 그녀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
"왜 이걸 추천했는지 잘 아실 텐데요. 소담 어머님은 꼼짝을 못하고 있어서 산후 우울증에 걸린 거예요. 산후 우울증! 아시죠? 오전에 집에 있지말고, 아이를 태우고 공원이나 산책로를 뛰어 다녀요. 아이는 아마 아주 잘 잘 거예요. 햇빛만큼 두 분 모자께 필요한 건 없어요. 일주일간 써보세요. 지금 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면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무거운 주제일수록 가볍게 다루고 싶다는 그녀의 인터뷰처럼 그녀는 정말 무겁고 피하고 싶은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그리면서도 그것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게 그 세계를 이루어냈다.

또 한가지 고백하자면 난 요즘 정말 한국문학이 좋다.

외국 문학은 역자의 번역을 한번 거친다는 것 이외에도 뭔가 참 다른 사회적 상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무언가 남의 옷 같은 느낌이라면(물론 바로 그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이 좋아서 외국 문학이 좋은 사람도 있을테지만...) 우리말을 모국어로 하는 글쟁이들의 글을 읽을 때는 그 글이 주는 내용과 그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느낌이 어떤 쾌감을 준다고나 할까.

번역된 소설을 보면서 뭔가 순도 100%한국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찜찜해 하다가 읽으니 아, 내 뇌의 사고방식과 100% 싱크되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향연.

개의 눈빛은 가스레인지의 푸른 불빛보다 더 강렬하게 이글이글 타올랐다. 쥐포를 세 마리 구워 먹어도 충분할 화력 같았다.

이런 문장이 번역문학에서 나오겠냐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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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무기 견인 도시 연대기 3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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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인도시 연대기의 3권이 왔다.
2권을 놓으며 언제 번역해서 출간되나 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책이 나오다니.

시간은 흘러 어느덧 톰과 헤스터가 목숨을 건 모험을 했던 때로부터 16년이 지났다.
톰과 헤스터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이제는 그 아이가 이 두 주인공을 모험으로 내몬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내 목숨만큼이나 챙기며 서로의 곁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꼈던 두 사람은 이제 아이를 함께 키우는 동료 같은 사이가 되어있다.

도시가 움직여 다니며 다른 도시를 사냥하는 견인도시의 역사학자 길드 출신인 톰은 우연한 기회에 헤스터와 삶의 동선이 얽혀버리기 전까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견인도시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헤스터는 견인도시가 움직여 다니는 맨땅(하지만 문명인은 누구도 맨땅을 밟고 살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인)에서 유랑하며 자기 부모를 죽인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떠돌고 있던 그야말로 야생의 전사. 그런 두 사람이 목숨을 건 위험을 함께 헤쳐나가면서 어느덧 서로에 대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긴 하지만, 그 둘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은 평화로운 생활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굳건하리라 믿었던, 하나 사실은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는 너무나 허약한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 그 모습을 드러내고 둘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 정찰을 하다 양에게 풀을 뜯기러 나온 목동과 마주친다. 한 사람은 그 목동이 반란군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발설하면 자신들의 부대가 위험해 지니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목동이 그렇게 할지 안 할지 모르면서 죽이면 안된다고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이 태도를 이 소설의 두 주인공에게 대입시키자면 헤스터는 아무 고민없이 죽여야 한다고 하는 쪽이고 톰은 죽이면 안된다고 하는 쪽이다. 이 둘은 서로의 다름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극복해 낼 수 있어야만 진정한 사랑일까.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해서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할 수 있지만 넣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이 이야기는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무기를 만들어낸 문명이 그 무기를 마침내 자기들끼리 죽이는데 쓰면서 일어난 '60분 전쟁' 이후의 지구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가 일어나는 시대에는 '60분 전쟁'의 시대를 '올드테크'라 부르지만 '올드'라 해서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수준의 기술을 의미한다. 책의 제목인 '악의 무기'는 올드테크가 띄워놓은 가공할 무기로, 3편은 그 무기를 오랜 잠에서 깨워줄 암호를 담은 틴북(깡통책)을 둘러싼 한바탕의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아이가 납치 당하고, 그 아이를 부모가 찾으러 나서고, 도시끼리 서로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견인도시 연대에 반대하는 그린스톰 세력이 전세계를 다시 푸르게 만들겠다는 모토로, 견인도시 연대의 행태와 마찬가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감행하며 견인도시 연대를 공격한다는 방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싶다는 것 이외에 이 이야기를 한 권 더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할 즈음,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톰을 구하기 위해, 헤스터가 해서는 안될 선택을 했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 일이 알려진 이상 더는 톰과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헤스터가 톰에게 돌연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이날 여태까지, 바인랜드에서 사는 동안 내내, 당신과 렌과 함께 산 세월 내내 나는... 맙소사, 정말 따분했어!
가, 렌을 태우고 떠나... 난 같이 안가, 톰, 바인랜드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아. 하지만 나랑 같이는 아니야, 나는 여기 남을 거야.
헤스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이곳은 이제 끝이야.
그냥 추락하고 있을 뿐이야. 죽지는 않을 거야. 저 아래에 타운들이 있잖아, 각박한 사막의 타운들. 고물 수집상들 말이야. 나한테 딱 맞는 곳이지

아, 이 작가, 연속물 쓸 줄 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죽겠다.

사족: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장하준님이 머리 식힐 때 본다고 언급했던 바로 그 책(으쓱).
영국적 문화지식과 언어센스를 가졌다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책.
아니면 나처럼 각주를 보고서야 알아듣는 뻘쭘함은 각오하시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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