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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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은 그것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선 한 단어, 한 문장 만으로도 그것이 가진 한 뭉텅이의 의미를 줄줄이 끌고 들어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더 깊이 있는 의미를 전달해 주지만 그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겐 한 두 걸음 걷다 자꾸 걸려 넘어지는 돌맹이 같은 것이다.

아편쟁이의 고백이라 자신의 경험을 낮추어 말하고 있지만 작가가 이루어 놓은 교양의 성벽은 맨 정신의 독자를 주눅들게 만든다.

한마디를 던지더라도 주석 없이 그냥 나온 말이 없고, 표면만 있는 경구가 없다. 신약성경이든, 율리시스든 그리스 고전이든 뭔가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다. 텍스트를 죽죽 읽지 못하고 계속 표시된 각주를 읽으면서 '이씨, 별 내용도 아니구만 자꾸 이럴래?'라는 반발심이 드는 한편, 조선시대 선비들이 글을 쓸 때 '고사리'라고 쓰면 '백이숙제'의 고사를 떠올리며 글의 맥락이 삽시간에 음식 얘기가 아니라 충절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것 같은 이 교양 놀음, 나도 한번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어떤 오기가 발동한다....

얼마 전 읽은 견인도시 연대기에서 고아 아이들을 모아 도둑질을 시키면서 그 아이들을 '로스트보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고 보니 피터팬의 네버랜드에 모여있는 고아 아이들이 서로를 부르는 용어였음을 딸아이에게 피터팬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면서 비로소 알았다. 물론 피터팬에서 '로스트보이'라 불린 아이들의 이력을 모르고 견인도시 연대기에서 '로스트보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해도 새로운 이야기를 즐기는데는 그리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과거와 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그 말에는 새로운 곳으로 점프할 수 있는 새로운 링크가 또 하나 추가된다.

이 얇은 책이 고전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체면과 격식을 중요시하는 19세기 영국 지식인 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엿볼 수 있었고 그 젠 채하는 지식인의 말투가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고 약간은 딱딱한, 고전스러운 문체지만 책은 쏙쏙 읽혔다. 이것은 내가 책읽기 내공이 쌓여서인지 작품의 힘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제대로 된 약이 없어 그 시절엔 일상적으로 쓰였다는 아편, 시작은 값싸게 살 수 있는 구원이지만 결국은 아편의 하인이 되어 지배당하고 그 와중에 피폐해지는 일상이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삼자가 되어 자신의 과오를 담담히 기술해나가는 것은 분명 후회로 점절된 내부의 격랑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겠지만 그는 끝까지 냉정을 유지한다. 나는, 그가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히듯, 그를 경계로 삼아 어떤 것에든 휘둘리지 않을 것,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을 훗날 낱낱이 고백해야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책이 이 세상에 온 의미일 것이고, 내가 이 책을 읽은 의미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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