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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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로맨스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로맨스물이 아니다.

첫째 남녀 주인공이 이미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 마지막회를 보면서 느낀 건데 19회 때와 20회의 두 배우,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그들이 결혼하여 부부가 된 순간 둘의 사랑은 더이상 풋풋한 남녀의 로맨스가 아닌 그냥 행복한 삶이 된다.
그렇게 애간장을 녹이던 현빈과 하지원의 백허그인데, 결혼후 5년이라는 단서가 붙자 아무 스파크도 튀지 않는 생활로 느껴진 건 결혼 5년차 아줌마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아니었길 바란다.) 

각설하고 둘째, 다른 주인공들의 비중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유생들의 나날'에서 남장한 윤희와 완벽남 이선준의 사랑을 엮어가느라 주변인으로 맴돌았던 구용하와 문제신도 '각신들의 나날'에선 그간 쌓은 캐릭터를 좀 더 펼쳐낼 공간을 부여받는다.

네 명의 주인공 중 누구도 찌그러지지 않게 살려낸 규장각 각신들의 그 세계는 참 균형 잡히고 보기에 좋았도다. 
특히, 공부만 잘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알리지 못할 고민을 그러안고도 규장각을 향한 외부의 견제, 한달 안에 파직을 당하지 못하면 네 가족은 죽음 목숨이라는 시부될 사람의 압박, 가난한 살림을 일으키기 위한 과욋일, 규장각의 가중한 업무를 몸이 부서지도록, 마음이 부서지도록 해내면서도 어느 하나 '에라 모르겠다' 놓아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윤희가 마음을 움직였다. 사건이 해결되어가는 모양새들이 '소설이니까 그렇지'가 아니라 그렇게 진인사할 때 하늘도 도움을 주는 거지, 나 역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대하는 내 마음을 돌아봐야겠어,라는 반성을 일으켰다고나 할까...  

구용하는 놀멍놀멍하면서도 세간의 일을 다루는 지혜는 빠삭하여 암행어사의 일조차도 기생집을 전전하며 한방에 해결하고~

물건을 확인한 뒤에 뺏어 보게나. 하지만 이기는 건 강한 자가 아니라 약점이 없는 자라네.

이 주점의 비리를 캐내려면 가까이 있는 주점을 통하는 게 가장 쉬우이. 알고 있는 걸 가장 쉽게 알려 주지. 안 좋은 일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말일세. 언제나 무서운 뒷말을 만들어 내는 건 동종업을 하고 있는 경쟁자거든. 어물전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건 그 옆의 어물전임을 잊어선 안되네.
옛날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양반은 일을 참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 돈 버는 것도 언제나 다리품 한 번 팔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손쉽게 해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말에서도 믿음직한 구석이 보이는 듯하였다.
이건 뭐, 쥐식빵 자작극을 일으킨 사람의 일화가 너무 금방 떠오르는구만~

문재신은  아버지와 티격태격하는 모양이 너무나 정겹고.

염병할! 내가 네놈 때문에 원수 놈 아들까지 걱정해 주게 생겼다. 네 녀석들처럼 어울려 다니니까 세상이 복잡해지잖아! 적을 구분할 수가 없어, 적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복잡하지 않은 세상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람들이 단순하게 나누고 싶어 했을 뿐이지.

하기야 너한테는 소론이란 말도 민망하지. 네 머릿 속에 학문이라 불릴 만한 게 얼마나 들어가 있다고. 패만 뭉친다고 다 당파는 아니니까. 어쩌다가 이런 놈이 내 아들인지, 이선준 같은 아들만 있으면 다리 뻗고 자겠구먼.
재신의 한쪽 입 꼬리가 자신 있게 올라갔다.
아버지가 모르셔서 그렇지, 걔네 부친도 못지않게 골치 썩거든요.
골치 썩겠지. 네놈 같은 골칫덩어리와 붙어 다니는데, 암!

악! 아버지 이건 비겁합니다. 묶어 놓고 패다니!
풀어놓으면 네가 가만히 맞을 놈이냐? 내가 늙은 것과 네가 묶인게 오히려 공평하다, 인마!

대물도령의 물건, 내가 갖지 못할 바에야 잘라버릴 테다, 라며 표독을 떨던 초선이는 또다시 추문에 휩싸인 윤희를 구해내고.
도련님 바람났다는 소문만 들려 봐요. 바로 달려가서 도련님 물건을 확 잘라 버릴 테니까
나도 장가는 가야 하오
본처는 봐드려요!
아, 쏘쿨한 기생느님의 대사~ 왠지 내마음을 건드리고(뭐래니...)

독설가인 왕도, 알고보니 아첨도 잘하는 윤희도 정감이 간다.

#
어디 보자. '애석하도다. 백성의 곤궁함이 중한데, 자질구레한 논쟁이 앞서면 어찌하느냐. 마땅히 구휼을 먼저 살피도록 하라.'

넌 정말 고약한 신하로다.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느냐? 이 당시 나는 '그따위로 일을 처리해 놓고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더냐! 백성들이 지금 다 죽어 가는 판국에 모여 앉아 입만 나불거리고 있다며! 당장 녹봉 챙겨 가는 값은 해라' 이렇게 말하였도다.

윤희는 안절부절 못하고 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입 꼬리에 미소가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제야 겨우 농담임을 알아차리고 장단을 맞춰 농담처럼 말을 하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보다는 조금 더 심하셨사옵니다."

왕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이런, 여기 또 있구나. '너희들이 아직 나보다 배움이 부족한 탓이니 나의 말을 따르도록 하라.' 이때 난 이리 말하지 않았노라.

그와 비슷하게는 말씀하시었사옵니다.

어허 대단한 거짓말쟁이로세. '그 입 닥쳐라! 쥐뿔도 아는 거 없는 놈들이 감히 내 앞에서 아는 척이냐?' 이리 말하였느니.

임금과 대신들의 회의록을 맡은 윤희가 적절히 윤문한 회의록 속기는 왕이 실제로 한 말과 함께 들으면 참으로 맛깔나지 말임다~ 

#
딱히 무슨 방법이 필요하겠사옵니까? 더 바랄 것도 없이 딱 평소대로만 하시옵소서. 달변과 독설, 궤변에 있어서만큼은 일당백이 아니시옵니까.'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상대가 왕인지라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상감마마이시라면 안 될 일이 없사옵니다. 논점만 바뀌면 뒤로 물러나 계시는 게 가장 중요하옵니다.
너는......정말이지 고약한 놈이로다.
...
왜 그 녀석들이 순순히 한양을 떠났는지 알겠구나.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게지."
몸은 아껴 가면서 일하거라. 너 또한...., 나의 신하이니.
삼인방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윤희가 아니라, 여리여리해보여도 제몫을 다하는 윤희가 멋있다

그대가 용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대가 헤엄쳐 놀 수 있는 물이 되겠소. 그러니 그대의 바람이 곧 나의 바람이오.

윤희는 엉금엉금 기어 글자로 다가갔다. 글자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글자는 그녀의 손등으로 옮겨 왔다. 고개를 들어 창을 보았다. 바닥에 써 놓은 글이 아니었다. 창호지에 덧대어 뒤집어 붙인 그의 편지였다. ...선준은 알고 있었다. 힘겨운 일이 생기면 이 방에 잠시나마 기대려고 찾아올 자신의 아내를.

이봐이봐, 이런 무책임한 작가를 봤나. 이렇게 세상에 없는 완벽한 남자를 있는듯이 생생하게 만들어 놓으면 어쩌란 말야. 이걸 본 여자들은 이런 배려깊은 사랑을 꿈꾸는데 현실의 남자들이 어디 그래? 아이 낳고 나면 자기는 안 돌봐준다고 애 같은 짓이나 하고 말야. 작가는 부디 기대를 높혀놓고 현실의 남자를 맞닥뜨리게 하는 잔인한 장난은 마시오.(갑작스런 버럭모드, 아줌마의 혈기로 이해해주시길~) 

예전엔 로맨스물을 읽으면 여주인공은 나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데, 나처럼 털털한 여주인공을 죽도록 사랑하는 이런 완벽남, 내게는 왜 하늘에서 안 떨어지나요, 모드였다면 지금은 이 소설을 읽고 이런 부분이 마음을 움직인다.  

과하지 않은 몸짓 하나, 우아한 손짓 하나, 미소를 놓지 않는 눈짓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은 분이었다. 황씨의 부러운 속삭임이 배경으로 깔렸다.
"젊음은 모든 여인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지만, 저 나이에 갖는 아름다움은 오로지 남편의 애정이 만들어 준단다. 사내들은 영원히 아름다운 부인을 소망하면서도 그 소망이 제하기 나름인 것을 몰라.

신랑, 잘 들었어? (근데 그래서 이 남자가 자꾸 콜라겐 먹으라고 하나? 마누라의 미모는 남편하기 나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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