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라 해서 노숙자와 동급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당신의 아버지로 인해 겪었던 상처가 자신을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아버지로 만들었고, 그 아버지의 비뚤어진 억압으로 인해 트렁커가 된 '름'
부모가 동반자살을 하려다 혼자 살아남은 아이, 그 시절의 기억과 그 이후의 거친 삶을 기억에서 지우고 트렁커가 된 '온두'

사람이 멀쩡한 집을 놔두고 트렁크에서 자야한다는 사실을, 뭐 남의 일이니까 내 알 바 아니지,라고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설득력이 이 이야기에는 있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기억력을 자극하는 게임 치킨차차차를 만든 '름'과 '온두'는 바로 옆 주차공간에 차를 대고 밤마다 멀쩡한 집을 두고 그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치킨차차차를 하면서 두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과거를 서로에게 풀어놓는다.

아버지가 기억을 잃어가지 않도록 게임을 만든 '름'은 효자가 아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짓을 잊지 않고, 자책하며 고통받기를 원하는 지도 모른다.
한때 아버지와 아들은 동시에 언어장애를 겪는다. 아버지는 '죽어라, 죽어'라는 동사 밖엔 말하지 못하고, 아들은 '개새끼, 나쁜 놈' 같은 명사만을 말한다.
물론 하나의 동사밖에 말하지 못하는 상태와 무엇이든 명사는 말할 수 있는 불공평한 상태를 놓고 명사의 힘이 크냐, 동사의 힘이 크냐를 판단할 순 없겠지만 이 둘의 싸움에선 명사의 힘이 큰 것 같다.

유모차를 판매하는 온두는 특이한 판매사원이다. 친절 따위는 나에게 바라지마라, 나는 너와 니 아이에게 딱 맞는 유모차를 권하는 일을 할 뿐이다. 니가 사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까칠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유모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인해 전국에서 그녀가 권하는 유모차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그런 판매사원이다.

작가는 여자다. 물론 소설 앞 표지에 자신이 창조한 세상과는 퍽이나 다르게 곱게 미소짓는 작가 사진이 있지만 그 사진이 없었어도 이 책의 디테일들을 읽어보면 그녀가 여자이고 아마도 누군가의 엄마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까칠하지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초보엄마를 이끌어줄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그 푸대접을 겪고 싶다.

나는 친절은커녕 오히려 불친절한 판매 사원이었다. 그냥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유모차가 무엇인지 선택해서 판매할 뿐이었다. 그래서 매장에 와서 대접을 받길 원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불쾌를 느끼고 돌아가기도 했다. 나는 '고객님'이란 간지러운 말은 쓰지 않았다. 만약 꼭 써야 한다면 '님'을 빼고 싶다. 고객! 이 물건은 어떤가요? 당신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이 유모차입니다.
"다시 말할게요. 이 유모차를 끌고 오전에 두 시간씩 외출을 하세요. 힘이 붙으면 빠른 걸음으로 운동하세요."
"애를 태워서요?"
"그럼 유모차에 누굴 태우려 하셨어요?"
내 말투는 썩 좋지 않았지만 그녀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
"왜 이걸 추천했는지 잘 아실 텐데요. 소담 어머님은 꼼짝을 못하고 있어서 산후 우울증에 걸린 거예요. 산후 우울증! 아시죠? 오전에 집에 있지말고, 아이를 태우고 공원이나 산책로를 뛰어 다녀요. 아이는 아마 아주 잘 잘 거예요. 햇빛만큼 두 분 모자께 필요한 건 없어요. 일주일간 써보세요. 지금 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면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무거운 주제일수록 가볍게 다루고 싶다는 그녀의 인터뷰처럼 그녀는 정말 무겁고 피하고 싶은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그리면서도 그것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게 그 세계를 이루어냈다.

또 한가지 고백하자면 난 요즘 정말 한국문학이 좋다.

외국 문학은 역자의 번역을 한번 거친다는 것 이외에도 뭔가 참 다른 사회적 상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무언가 남의 옷 같은 느낌이라면(물론 바로 그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이 좋아서 외국 문학이 좋은 사람도 있을테지만...) 우리말을 모국어로 하는 글쟁이들의 글을 읽을 때는 그 글이 주는 내용과 그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느낌이 어떤 쾌감을 준다고나 할까.

번역된 소설을 보면서 뭔가 순도 100%한국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찜찜해 하다가 읽으니 아, 내 뇌의 사고방식과 100% 싱크되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향연.

개의 눈빛은 가스레인지의 푸른 불빛보다 더 강렬하게 이글이글 타올랐다. 쥐포를 세 마리 구워 먹어도 충분할 화력 같았다.

이런 문장이 번역문학에서 나오겠냐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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