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 / 베니스의 상인 / 말괄량이 길들이기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줄리어스 시저 / 리처드3세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희극인가?



이 여자는 내 소유물이요, 동산이요, 집이요, 살림도구요, 전답이요, 창고요, 말이요, 소요, 당나귀요, 아무튼 내 것이란 말이요.


여자만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이렇게 편한 길이 있었다. 여자들은 참 좋은 가축이다. 내 자식도 낳아주고, 키워주고, 내가 원할 때 잘 수도 있고, 병들면 간호해주고, 내가 없어도 알아서 제 자식 거둬 먹이고, 설사 평생 내가 일 안하고 논다고 해도 걱정이 없다. 그야말로 슈퍼원더우먼. 이런 로또를 내 손안에 장악하지 않는 건 천하의 멍충이! 남성 인류는 승리했다. “역사”시대의 승리자는 남성이다. 인류 최초의 식민지는 여성이었다. 여성을 길들인 방법으로 신대륙을 길들였고 아프리카를 길들였다. 소유하면 다 내 꺼. 내 맘대로. 어딜 여자가 시건방지게……

이 작품이 무려, 셰익스피어의 “희극”이란다.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야 하는가?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보며 웃고 즐거워할 수 있는 건 남편이거나 남편을 주인으로 임금으로 섬기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는 2등 인류 ‘여성’의 삶을 인정하는 노예 아내이다. (누군가는 또 그러겠지. 그렇게 숭고한 자기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을 짓밟지 말라고. 차라리 숭고한 나의 노예 어머니라고 해라. 그것이 차라리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정말 희극인가? 본래 연극 대본이었고 발레로도 만들어져 발레의 지루함을 잊게 한 효자 상품이 된 즐겁고 유쾌한 희극? 이런 비극이 희극이 된 사실이야 말로 희극이다. 활자로 확인한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말대로 여성이 어떻게 길들여졌는지를 보여주는 시대의 보고서였다.  


“난 결혼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결혼을 한다면 세 발 의자를 빗 삼아 당신의 머리털을 빗겨 주고 얼굴에는 칠을 해서 바보 취급을 해줄테야.”라고 건방지게 말하고, 여러 구혼자들을 거느린 동생 비안카에게는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누구”냐고 당당하게 추궁하던 캐서리나가 아내도 얻고 돈도 벌어보자는 심산으로 찾아온 페트루치오에게 길들여져 마지막엔 가장 온순하고 순종적인 아내가 되어 남편의 내기를 이기게 해준다는 이 연극은 사실 소름 끼치는 공포물이다. 이런 공포물을 보고 웃는다는 게 그야말로 공포다. 이상하지 않은가? 페트루치오는 마치 개를 길들이는 것처럼 캐서리나를 길들인다. 그리고 “애정을 갖고 아내를 잡는 법” 이라며 그 방법을 다른 남성들에게 가르친다.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말은 여기서부터 나왔나보다. 

 

캐서리나는 아버지와 남편의 계약에 의해 미치광이 같은 결혼식을 한다. 이 아버지란 사람도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딸을 팔아먹는지, 남편이 먼저 죽었을 때 딸에게 유산이 남는지를 확실하게 챙긴다. 결혼(=매매)의 과정을 거쳐 캐서리나는 아버지 주인에서 남편 주인으로 양도된 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편의 별장에 감금된다. 남편 페트루치오는 캐서리나를 굶기고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자기 명령에 복종하도록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린다. 애걸이라고는 안 해본 캐서리나가 먹을 걸 달라고 애원한다. 심지어 캐서리나의 판단력을 흐려버리기 위해 대낮에 뜬 태양을 달이라 하고 지나가는 노인에게 건장한 귀부인이라고 하며 그녀의 생각을 묻는다. 이건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하는 그 유명한 정신적 충격법 아닌가? 진나라를 훅~말아드신 환관 조고가 2세 황제인 호해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니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황제인 호해마저도 “그럼 말인가?” 하며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했다는 그 상황. 이제 나는 나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나를 지배하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자발적 백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심신 장악법. 이렇게 확실하게 캐서리나의 정신을 노예화한 후 페트루치오는 옷과 장신구 마저 캐서리나의 취향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입혀입혀 친정으로 귀환한다. 승리자가 되어서. 아내들에게 “그 험상궂은 이맛살은 좀 펴고 그렇게 매몰찬 눈매는 하지 마세요…사랑과 순종을 가지고 봉사해야 할 경우에 지배나 권력을 요구하는 것은 여자로서 어리석고 창피한 노릇이에요.”라고 말하는 길들여진 아내를 데리고.


『캘리번과 마녀』에는 패트루치오가 아내를 길들이던 잔악한 수법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역사” 시대의 개막 이후 남성에게 세계사적 패배를 당했던 여성들은 그나마 중세까지는 공유지에서 약초 재배를 하고, 농촌에서 남편과 함께 농토를 가질 수 있었고, 도시의 공방에서는 기술 직공으로 일하며 사회적 경제적 자립을 추구할 수 있었다. 임신의 지속과 중단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비법과 묘약)이 있었으나 공유지가 파괴되고 마녀 사냥이 지나간 후 16~17세기에 여성은 사회 생활의 모든 입지를 상실했다. 이렇게 자립의 바탕을 잃은 여성들은 남성에게 종속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여성들이 가졌던 사회적 자산은 모두 빼앗기고 마녀로 찍혀 화형당하거나 시건방진 여자(말괄량이)로 찍혀 입에 재갈을 물고 마을을 돌며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캐서리나가 별장에서 남편에게 당한 그 고문이 바로 실제 역사에서 마녀사냥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1593년쯤 이 작품이 씌어졌다고 생각하면 그땐 이미 마녀사냥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난 후였다. 이 세상에 한 발 디딜 땅도 없어진 여성들은 남성의 집으로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생존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두 번째 세계사적 패배 “마녀 사냥”의 소프트 버전이 『말괄량이 길들이기』였다.  이것 보라고. 남편은 아내에게 이 정도의 장악력을 발휘해야 하며 말괄량이들은 이렇게 길들여져야 한다고 남녀 모두 웃고 떠들며 그렇게 5백년이 넘게 이 작품은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대표 희극으로 공연되고 전파되어 온 것이다. 페르루치오가 아내를 길들이는 방법이 "독에는 독으로"였다. 이제 그 말을 되돌려 줄 때다. 그루밍에 장악된 말괄량이를 깨워 시건방진 눈빛으로 바라보라. "독에는 독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5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경미 옮김 / 책세상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77)


 


옛날에, 학교 다니던 시절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띈 이 책을 서가 앞에 쭈그려 앉아 단숨에 읽었던 생각이 난다. 그때 맑스는 물론이고 엥겔스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에! 아니, 이게 정말 사실이야?” 나의 인생 책 하나 고르라면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을 꼽는다.


인류학과 여성학의 연구결과 원시수렵채집 사회에서도 남자가 사냥해온 것보다 여자들이 채집해온 음식이 인류 생존에 큰 공헌을 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진화에서도 암컷의 성선택이 중요함이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지만 20여 년 전만해도 나처럼 공교육만 받은 인간에게, 인류가 문명을 시작하기 위해 최초로 식민지로 삼은 것이 ‘여성’인류였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고도 놀라운 사실의 발견이었다. 아빠가 바깥일하고 엄마가 집안일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남녀의 몫이었으니까. 생각해보니 그땐 인류학도, 진화론도 몰랐다. 우리가 알던 가족이 재산을 자신의 확실한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제도였다니! 그리고 그 ‘가족’의 형태 또한 생산 수단과 소유의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니! ‘가족’은 처음부터 사회의 기초이고 자연발생적 사회 단위라고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이었다. 좋은 책은 상식을 부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엥겔스의 이 저작이 기억이 난다.


엥겔스의 날카로운 첫 키스 이후 20여 년 만에 읽은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은 잊었던 ‘전망’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그렇게 가슴 뛰었던 책이었지만 여태껏 참 이상한 ‘정상가족’에 대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었고, 결혼만 하면 자발적으로 좋은 며느리 되려고 노력했고, 남자들의 ‘추행’은 남자라서 그런거라고 참아와야 했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 무르익었어야 했을까? 2016년 강남역에서 살해된 젊은 여성의 희생으로 더 이상 가만 있지 않겠다는 목소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주 강력하고, 당황스런 백래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은하선의 대학강의가 취소되고, 만화가와 성우가 페미니스트인지 뒷조사를 당하고, 청원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청원하는 이 과격한 반응들. <82년생 김지영>같이 온건한 다큐 소설을 가지고 난리 법석을 떤다. 늘 해왔던 대로, 빨갱이 공격하듯, 페미니스트를 공격할 거란 생각이 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심 자기가 괜찮은 진보적 남성이라 여기는 자들 중에도 “요즘 여자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희들에게 잘해주잖아.”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폭력이 아니고서는 저들에게 이해시킬 말이 없다. 뭔가 쿵!하는 감정적 충격을 받지 않고서는 지금의 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할 남자들은 없다고 본다. 미러링은 그들의 언어를 똑같이 되돌려 줌으로써 그들을 폭력적으로 깨우치는 계몽(!)의 언어가 맞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폭력밖에 너희들이 알아듣는 말이 없기 때문에 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던 말 그대로다.


엥겔스의 말대로 모건의 <고대사회>는 그때도 지금도 그 혁혁한 연구결과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제대로된 번역서조차 없다) 인류학이야말로 맑스와 엥겔스가 추구하던 유물론적 역사연구였다. 엥겔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 족의 친족체계를 연구한 모건의 <고대사회>를 바탕으로 가족의 역사적 형태가 생산수단의 소유에 따라 변화함을 밝히고 결국 국가도 그 사적 소유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기구임을 주장한다. 엥겔스와 맑스의 과학적인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폭망한다. 그 후 공산사회는 어떤 모습은 어떨지를 가족의 형태로 전망해 본다. 물론 엥겔스의 역사발전의 법칙이라든지, 생물학적 남녀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 등은 그들의 시대적 한계라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맑스, 엥겔스를 비판해왔고 그 비판을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모건이, 그리고 엥겔스가 이 책에서 지적한 핵심, 그리고 지금 여성주의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를 딛고 새로운 전망을 위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사적 소유’의 대물림이 아닐까? 그러니가 페미니즘은 여성 권리 신장 운동이 아니다. 사적 소유로 이뤄낸 이 문명과의 싸움이다. 정희진의 말대로 “인식론”이다.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공부를 많이 하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역사학에서 인류학으로 넓혀야 하고 생물학에서 진화학으로 넓혀야 한다. 


사적 소유는 집단의 이익이 반대된다. 사적 소유 덕분에 우리 가족이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 큰 환상이다.  실질적으로 ‘우리 가족만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안 된다. 모건이 연구한 이로쿼이 부족의 시스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엥겔스가 18세기 일부일처제 사회를 연구한 결과이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실증할 수 있는 현상이다. 내가 벌어 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내 노후까지 책임져야 하는 사회는 노예사회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관념이고 실제는 계급사회임을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돈으로 보육을 사고, 노인 돌봄을 사려고 하는데 그게 그 사람의 노동에 대한 적정한 대가인가? 어떻게 그 적정선을 아는가? 우리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최저임금을 주고 남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악착을 떨어댄다. 중산층의 가사 노동을 줄이기 위해 동남아 여성들의 합법적인 가사도우미 취업을 허용해야 한다는 기사도 봤다. 어떻게 저런 천박한 인식으로 기자질을 할 수 있는지 그게 더 놀라웠다.


우린 어떻게 갑질을 근절하고, 비정규직을 일소하고, 최저임금을 올릴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사적 소유’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 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사적 소유란 타인의 사적 소유를 침해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노동이 상품화된 이 사회에서 누군가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권리 빼앗기기 싫어서 “아쉬우면 너도 시험봐서 들어와라.”이런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이 모든 갈등에 대한 근원적 사유 없이 누구 편든다는 것은 또다른 누군가를 착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일들은 법과 제도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삶에 대해 성찰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떤 부인이 맑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가 되면 누가 구두를 닦나요?” “당신이 닦으시오”


사적 소유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은 (어렵지만)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사적 소유 철폐가 예전에 소련이 하다가 실패했던 공동농장,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 부와 권력으로 남을 지배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자유, 평등, 우애의 공동체는 인간 개인의 자발적인 심성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랜 노예의식이 인간의 심성을 지배하고 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 스스로 페미니스트로서 가부장적 사적 소유 문명에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면 권리 찾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두 자기가 닦는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아마 이게 가장 어렵고, 익숙지 않은 것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蜩與學 鳩笑之曰..「我決起而飛, 搶楡 枋而止, 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 ,奚以之九萬里而南爲?」 

접힌 부분 펼치기 ▼

조여학구소지왈.. <아결기이비, 창유방이지, 시즉부지이공어지이이의, 

해이지구만리이남위> 

펼친 부분 접기 ▲

매미와 매추라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힘껏 날아도 느릅나무 관목에 부딪치고 때로는 그 위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는데 뭐하러 구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가려고 하냐?>

適莽蒼者, 三飡而反, 腹猶果然 ., 適百里者, 宿㫪糧. 適千里者,三月聚糧. 之二蟲又何知!

접힌 부분 펼치기 ▼

적망창자, 삼손이반, 복유과연,  적백리자, 숙용량, 적천리자, 삼월취량, 지이충우하지!

펼친 부분 접기 ▲

야외로 놀러가면 세끼만 먹고 와도 배가 부르지만 백리를 가는 사람은 밤새 먹을 양식을 절구질해놔야 하고, 천리를 갈 사람은 삼개월 먹을 양식을 모아야 하는법이야. 그러니 저 매미와 매추라기가 뭘 알겠나?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此小年也.

접힌 부분 펼치기 ▼

소지불급대지, 소년불급대년, 해이지기연야? 조균부지회삭, 혜고부지춘추, 차소년야.

펼친 부분 접기 ▲

부족한 식견으로는 큰 지혜에 따를 수 없고, 수명이 짧은 것은 오래 사는 것의 일생을 알 수 없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하루를 모르고 쓰르라미는 1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수명이 짧은 것이다.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上古有大椿 者,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접힌 부분 펼치기 ▼

초지남유명령자, 이오백세위춘, 오백세위추, 상고유대춘자, 이팔천세위춘, 팔천세위추 

펼친 부분 접기 ▲

초나라 남쪽에는 큰 거북이가 있는데 오백년을 봄으로삼고 오백년을 가을로 삼는다. 옛날에 대춘이라는 나무는 팔천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년을 가을로 삼았데.

此大年也, 而彭祖乃今以九特聞, 衆人匹 之, 不亦悲乎!

접힌 부분 펼치기 ▼

차대년야. 이팽조내금이구특문, 중인필지, 불역비호! 

펼친 부분 접기 ▲

이런걸 오래사는 거라고 하는거야. 팽조는 지금껏 오래 사는 것으로 이름났는데 사람들이 팽조처럼 오래 살려고 하니 딱한 일이쟎니!



너무 큰 날개를 갖고 있어 날지못하는 돼지처럼 보이는 붕! 어지간히도 비웃음에 시달렸을 것이다. 작은 메추라기도 팔랑팔랑 날아 다니는데 넌 뭘하냐? 뭘하겠다고 바람을 기다리겠다는 뻥을 치는거야?


이에 장자는 각자의 영역이 따로 있음을 말한다. 모두들 가야하는 "평범한" 삶이 있는게 아니라 제각각 타고난 삶이 있다. 개성, 창의성, 독특함 이런거 엄청 좋아하면서도 정작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똑같다. 태어나서부터 단계별로 나이를 먹고 그 나이에 맞는 역할에 충실하면서 마치 정해진 삶의 룰이 있는 것처럼 잠깐이라도 벗어나면 불안과 초조를 느끼고 조롱을 당한다. 하지만 각자의 삶이지 않는가? 장자가 이 문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가치의 상대성이다. 하루살이가 계절을 모르듯, 우리는 대춘의 봄과 가을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도 모두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자신의 봄과 가을을 무시하고 남처럼 살기를 바라는 일 아닌가? 정작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장자에는 유독 "슬프지 아니한가?" 하는 탄식이 많다. 장자가 살던시대와 지금 시대가 많이 다르지 않다. 자신의 봄과 가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더 좋은 것을 향해 줄달음만 치고 있는 삶. 장자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3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 새로운 심리적 측면


 이반이 생각한 대로 인간은 사악하다. 인간이 하는 짓을 보면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이런 자기 혐오를 멈출 수가 없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갱신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신과 교회에 대한 선입견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을 떠올리지 말자) 물질 충족에만 빠져서는 노예의 길을 면하지 못한다. 남의 자유를 빼앗아 빵을 주는 것은 억압이다. 타인을 살게 하고 자신을 살리는 방법은 사랑의 실천임을 조시마 장로의 설법으로 누차 강조한다. 


세상을 새롭게 개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스스로 심리적 측면에서 다른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기 전에는 형제애란 싹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선 “고립”의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도처에서 군림하고 있으며 아직 그 시기가 오지도 않았습니다. 왜냐면 지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자신만의 성취된 삶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삶의 완성 대신 단지 완전한 자살행위를 이끌어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아 실현의 성취 대신 완전한 고립에 빠지기 때문에 스스로를 감추며 자신이 가진 것을 숨기고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고 자신으로부터 사람들을 멀리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532-533)

 

 조시마 장로는 젊은 시절의 살인 사건을 감추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신사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고립을 끝내라고. 그래야 사람들의 사람들이 새로워 질 수 있다고 한다. 『죄와 벌』에서 뽀르삐리는 삶으로 뛰어들라고 했다. 고립을 끝내려면 우리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는 형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마치 부처님이 연기를 설명하시듯 조시마 장로가 사람은 독단적으로 살 수 없다고 설교한다. 사실 대심문관의 말대로 신은 인간을 무제한적으로 믿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신을 따르는 자유로운 사랑을 기대했고, 대가 없이 퍼주는 무한대의 사랑과 용서, 죄 없이 남의 죄를 대신하는, 오직 주기만 하는 사랑을 보였다. 그러니 인간은 그런 사랑을 믿을 수 없다. 왜냐면 인간 차원에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행하셨다. 무조건적인 사랑.


 무신론이 팽배해지면서 인간에게 사랑이란 ‘나를 따르면 사랑할 것이다’처럼 조건절 사랑밖에 보이지 않는다. 호홀라꼬바 부인이 잘 보여준다. 그녀는 선행을 하면서도 그들이 자기를 존경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우습지만 그게 아주 대표적인 인간의 사랑이다. 그러니 반대의 경우, 나에게 악행을 저지른 자라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이것이 신을 들먹거리는 인간의 사랑과 응보다. 하지만 신의 사랑은 조건절이 아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고 햇빛이 비쳐 오는 게 무슨 계약 조건이 있던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부모와 자식을 신과 인간의 관계와 비유했을까 생각해보니 무조건적 사랑에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자식 사랑에도 조건이 붙는 추세이긴 하지만(-_-;;) 처음 태어났을 때 고물거리는 생명에게 생명수처럼 쏟아 부어지는 사랑에는 조건이 없지 않은가? 피를 젖으로 바꾸어 먹이는 사랑이 신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내팽개친 표도르는 결국 스스로를 공격한 꼴이다.

 

 이반과 호홀라꼬바 부인, 그리고 많은 이성주의자들과 과학 신봉자들, 합리주의자들 그리고 우리들은 주고 받는 계약 속에 사랑과 응보를 생각한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해결방안, 즉 ‘신을 향한 믿음 속에 선의 실천과 인간의 갱생’ 같은 얘기를 쓴 그를 정말 철 지난, 보수적인, 전근대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정말 쓸데 없는 얘기 잔뜩 길게도 써놨다고 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이반 수준에서 볼 때 할 수 있는 비난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은 이반이 설정한 인간적인 현상의 신이 아니다. 그는 신이 고통 받는 약자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행복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대심문관은 그런 신이었다. 인간들은 그런 신을 원한다며 자기들은 소수의 선택된 자가 아닌 대다수 허약한 대중에게 빵을 주고 그의 자유를 지배하고, 기적을 보여주면서 양떼로 이끌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면서 신에게 더 이상 오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신을 밀어낸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사람 신. 인신(人神)이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인신일지 모른다. 무질서하고 악한 세계가 아니라 정리되고 인과응보가 딱딱 맞아 떨어지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믿음을 원하는 자에게 경외를 보여주는 세계. 균질하고 말끔한 세계. 이반과 우리 모두 어떤 질서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자연법칙은 무질서도가 높아지는 방향인데도 끊임없이 치우고 정리하고 깔끔을 떨어대는 인간. 죽으면 썩어질 몸들이 무질서를 거부한다. 이반이 원하는 것처럼 악행에 대한 응보가 제때 제때 이뤄질 수가 없다. 한꺼번에 즉각적으로 이뤄지지도 않는다. 그건 인간의 바람일 뿐이다. 이반은 보통 인간들의 바람대로 악에 대한 응징을 대신해 줄 신을 찾았다. 그런데 이반의 생각이 굉장히 위험하다. 만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만인을 노예로, 자기 질서에 복종하는 사람을 원한다. 

 

 대심문관은 욕심쟁이가 아니다. 드러나는 악행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존경 받을 것 같다. 이게 문제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헷갈린다. 현실세계에서 누가 더 잔인한가? 눈앞에서 자식을 죽이는 놈이 잔인한가? 아니면 존경 받으며 인간을 노예로 삼는 놈이 잔인한가? 대심문관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존중하지 않는다. 개돼지 취급을 한다. 만인을 행복하게 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었고, 밥만 먹여주고 욕구만 충족시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게 더 불쾌하지 않은가? 물론 인간은 빵 없이 살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심문관은 저열한 장사꾼이다.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해야 할 욕구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적이다. 자유를 바쳐라, 그러며 먹여주겠다. 빵과 경배를 거래한 인신. 인간이 감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사특한 기적과 거래한 인신. 그는 인간의 노예근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빌헬름 라이히 이전에 이렇게 인간의 노예근성을 잘 파악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신이 준 자유를 누군가에게 반납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는 부자유스런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자유 따위 기대도 안하고 그냥 시키는대로 나의 왕국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리고 신에게 비아냥거린다. ‘당신, 사람 너무 잘 믿어’ 



당신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비밀을 알고 있었고, 모든 사람을 무조건 당신 앞에 경배토록 만들기 위해 당신에게 제시된 유일하고 절대적인 깃발을, 지상의 빵의 깃발을 자유와 천상의 빵이라는 미명하에 거부하고 말았소. 그리고 나서 당신은 끊임없이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잘 살펴보시오. 모든 것에 자유의 이름을 내걸었던 것이오! 당신한테 말해 두지만, 인간이라는 불행한 존재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녔던 자유라는 선물을 한시 바삐 넘겨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고민은 없는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의 자유를 지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뿐이오.”(446-447)




 독재자는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악마는 친절하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에 스며들어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의존하게 만든다. 노예복지주의다. 다 너희들을 잘살게 해주려는 것이다. 나만 믿고 따라라. 따르고 싶다. 자유롭게 생각하라고 하는 게 오히려 고문이다. 대심문관은 신이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만 줬을 뿐 그 이후를 책임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더 높은 차원의 신인神人이 되기보다 나의 왕국에서 배부르고 등따숩게 생각 없이 살기를 바랄 것이다. 방황하는 사람들을 붙들고 인솔한 것은 ‘나’다. 그러니 당신은 꺼져!


 여기서 신의 세계와 인신의 세계가 충돌한다. 신의 세계는 인간이 갈망하듯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세상이 아니다. 표도르 같은 역겨운 존재도 있고 조시마 장로 같이 성스러운 사람도 있다. 호홀라꼬바 같은 여자도 있고 그루센까 같은 여자도 있다. 살해 용의자로 몰려서 대오 각성하는 경우도 있고, 자식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도 제 잘못을 모르는 남자도 있다. 신의 세상은 이렇다. 더럽고 추하고 모순적이고 무질서하고 제멋대로이다.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얻는 세계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뒤섞인 곳이다. 이반이 인정하지 못하고, 우리가 인정하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해야 한다. 이제서야 이 책의 만 앞에 적어둔 성경 구절이 이해가 간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죽어야 산다. 이런 모순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면 이반이 된다. 미쨔는 방탕한 생활 끝에 알았다. 자신의 진정한 죄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 마음 그 자체이며 자신은 유형을 가서 벌을 받으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됨을! 미쨔는 삶의 모순을 깨닫고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다. 미쨔가 유형지로 떠나든 미국으로 도망을 가든 그는 어디서든, 얼굴을 바꾸고 싶을 정도로 확 바뀐 새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대심문관의 열띤 자기 변론을 듣고 난 신은 그에게 키스하고 나간다. 역시나 한 수 위다. 그의 긴긴 변명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들어주기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긴 듯 입맞추고 나가는 신은 어린 자식이 눈 앞에서 잘못한 일에 대해 열렬히 변명을 늘어 놓을 때 그저 들어주는 부모 같다. 사소한 잘못에도 자식이 올바르게 크리라고 믿듯이 신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싸우랴? 지옥에 떨어뜨리랴? 이런 신은 신이 아니라 인신이다. 신의 침묵과 조용한 입맞춤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대심문관일 것 같다.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설교한다. 인간은 무한 영겁의 세계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단 한 번 부여된 존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묘하게 비튼 말이다. 그는 인간의 정의부터 다시 한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활동적인 사랑의 순간이 한 번, 단 한번만 부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지상의 삶이 부여되었고 그와 더불어 시간과 제한된 세월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에 겨운 존재는 소중한 선물을 거절하고 존중하지도 아끼지도 않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말았습니다.”(568) 



 대심문관의 매끈한 세계에서 노예가 되겠는가? 아니면 신이 너에게 퍼부은 사랑을 믿고 실천할 것인가? 누가 인간을 신뢰하고 있는가? 



 “인간 존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고고한 정신 세계는 어떤 승리감, 증오심과 더불어 완전히 거부되고 축출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자유를 선언하였고, 현대에 들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만, 그들의 자유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속과 자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욕구 충족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증대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교리이며 세인들은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구 확대는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부자에게는 고독과 정신적 자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질투와 살인을 낳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었으되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미처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하나로 합쳐지고, 이로써 거리를 줄여 나가고 허공을 통해 사상을 전달하는 형제적 관계를 형성해 나갈 거라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아아, 인류의 그 같은 결합을 믿지 마십시오. 자유를 욕구의 증대와 신속한 충족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왜곡할 뿐입니다… 자신에게서 과도하고 불필요한 욕구를 끊어 버리고, 이기적이며 자만심 넘치는 의지를 억제하며, 복종의 길에 채찍을 가해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서 정신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정신적 환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551~552)


 원하는 대로 채우는 게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오히려 자신이 노예상태임을 자각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노예상태를 끊기 위해 부단히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게 자유다. 자유는 먼데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데 있고 사랑은 먼데 있지 않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파 한 뿌리 던져주는 데서 시작한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반이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가족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함께 마차에 타려고 했던 지주 막시모프를 밀어서 떨어뜨리는 장면이 있다. 이런 사소한 데서 이반이 인정머리 없는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인류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공상적 사랑이다. 자기 어린 시절이 불행했으면 자기 자식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반 앞에 나타난 초라한 신사는 제 자식들을 친척 아주머니 집에 보낸 것으로 나온다. 울고 있는 아귀에게 당장 달려가겠다는 미쨔와 대비된다. 소설의 주인공들과 다른 조건과 환경이지만 어쨌든 엉망진창인 지옥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인류를 사랑하지만 개인에 대해서는 적개심만 남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105)라고 묻는 호홀라꼬바 부인에게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105)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게 정답이다. 하지만 이반이 그랬고 우리가 그렇듯, 할 수 있는 일은 귀찮아서 하기 싫다. 안락에 빠진 노예상태가 이렇다. 지옥은 그 누구 때문이 아니라 귀찮아서 하지 않고,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하고, 너도 당해봐라! 하는 마음에서 하지 않는 내가 만든 지옥이다. 우리는 정말 자유롭기를 바라는가? 자유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그러나 그 길을 통과한 자만이 그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들 수 있다. 그 길을 가라고 도스토예프스키 별이 반짝인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중 열린책들 세계문학 30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 무질서하고 악한 세계


사실 인간의 ‘동물적인’ 잔혹성에 대해서는 간혹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동물들에게 너무나 천부당만부당하고 모욕적인 이야기겠지. 동물들은 결코 인간들처럼 그렇게 잔인할 수 없어, 기교적이고 예술적일 정도로 잔인할 수 없거든. 호랑이는 그저 물어뜯고 찢어 놓는 것밖에 못해. 호랑이한테 설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귀를 밤새도록 못으로 박아놓을 생각은 하지도 못할거야…나는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경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라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게 창조해 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418)


 이반의 말에 격하게 공감이 된다. 악마는 인간을 닮았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역사는 인간 잔인함의 기록이다. 이반의 말대로 먹이 사슬 관계의 동물들은 재미로 죽이지 않는다. 굶주림을 면하는 정도 외에는 배부르게 먹지도 않는다. 다종다양한 ‘맛’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반이 수집한 자료들도 놀랍게 잔인하지만 우리가 이반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그런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악에 대한 응보와 정당한 대가를 바란다. 이반도 무고하게 고통 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런데 이반은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인간이 신을 고안해 낸 거지. 그런데 기묘하고 놀라운 것은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이 인간처럼 야만스럽고 사악한 동물의 머리에서 떠올랐다는 거야. 그런 생각은 그만큼 성스럽고 감동적이며 현명한 것인 동시에 그만큼 인간에게 명예를 안겨 주기도 했지.”(411) 이반이 생각하기에 악마와 신은 모두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다. 야만스럽고 사악한 인간이 성스럽고 명예로운 자신의 모습을 추구하며 신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반도 인정한 것은 인간이 현재 제 모습보다 더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별로 공감하지 않아서 잔인한 짓을 가장 많이 한다. 세상은 온통 무질서하고 악하다. 이반은 신이 있다고 믿지만 너무나 비참한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밟고서 이루어진 세계라면 거부하겠다고, 신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필요한 것은 악에 대한 응징이다! 이반은 신이 응징하지 않는 악독한 자들을 벌주고 싶어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단죄하는 신이 되고 싶어한다. (人神)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신과 악마 모두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냈다면 왜 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잔인한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가? 신이 걸었던 명예로운 길보다 잔인한 악마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아닌가? 이반이 지은 “대심문관” 서사시를 보면 그는 사람들을 신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고되고 힘든 길이므로 우선, 악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 악마에 대한 인간의 ‘응징’은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강간의 자식인 스메르쟈꼬프가 강간범인 자기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가?


만일 네가 나의 아내를 강간하면, 나는 네 자식의 살을 너에게 먹일 것이며, 나의 자식은 너의 살아남은 자식들 가운데 한 명의 손에 의하여 죽을 것이며, 그는 다시 나의 자식의 자식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 것이다. 또한 만일 너의 독수리가 나의 토끼를 잡아먹으면 네가 보호해주는 왕은 자신의 딸을 나의 제물로 바쳐야 하며 이는 곧 그의 아내가 남편을 죽일 것임을,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임을 의미한다”(오레스테이아)

 


 복수는 끝이 없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복수의 저주 속에서 용서가 복수보다 한 차원 높은 것임을 배웠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전사들이 적을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고 어깨만 치고 가는 행동이 왜 죽이는 용맹보다 더 훌륭한 용맹인지 오레스테아의 저주를 들으면 알게 된다. 복수는 끝이 나지 않는다. 복수는 죽음의 재생산이다. 누군가는 멈춰야 멈추는데 멈추는 자가 강자다. 원수도 사랑하는 자가 진정 강자이기 때문이다. 분노로 남의 심장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고 복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밀양”에서 보여주듯 사과와 용서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죄를 짓기 쉬운 존재임을 알았다. 악한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게 아니다. 이반도 그렇고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도 그렇듯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응징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지름길이라 여긴다. 사람들에게 해악만 끼치는 ‘이’ 같은 존재를 왜 인간이 단죄하면 안 되는가? 우리도 뉴스를 보면 그런 인간들을 정말 단죄하고 싶어진다. 이것이 선한 사람들도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 벌 속에 진정한 회개와 뉘우침, 사과, 그리고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있는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신론의 시대는 형벌에 대한 단죄는 있어도 진실된 참회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죄를 모르고, 감옥에 몇 년 갔다가 나오면 그걸로 다 되었다 여기고 피해자들은 삭일 수 없는 분노 속에 고통 받고 있다. 여기가 지옥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복수의 고리, 무책임 철면피 가해자 재생산과 헤어나올 수 없는 피해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신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의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 아닌 아니라 대가 없이 퍼붓는 사랑이다. 굶주린 사람에게 파 한 뿌리 던져줄 때 돌아오는 보답을 바라지 않듯, 죽일 놈을 살려주며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게 강자이며 이를 실천하려면 인간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게 먼저다. 믿음이 없으면 행해지지 않는다. 믿음에서 기적이 나오는 거지, 기적을 보고 믿는 게 아니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신을 거론하는 것은 이런 차원이다. 믿음이 먼저다. 아무렴. 그렇다. 비록 믿음이 인신(人神)을 자처하는 인간들에 의해 더럽혀졌을지라도 그 오물을 뛰어 넘어 인간을 새롭게 할 갱생할 믿음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하늘에 떠 있는 별이다. 그것 말고는 이 악하고 추한 세상에서 인간이 잃은 자유를 되찾고 더 높은 차원의 삶, 신인(神人)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가 없다. 인류 역사상 어렵고 드물지만 그런 경지에 오른 인간들이 있다. 


 우리(이반)의 이성으로는 신도 악마도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적인 현상인 것 같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신처럼 명예로운 길을 실천할 믿음이다. 이반은 이걸 놓쳤다. 이반의 신과 악마는 인간이 생각한, 인간이 감각하는, 인간적인 형상이다. 인간의 경험을 넘는 영역은 우리가 표현할 수 없다. 마치 물고기에게 육지의 생활을 아무리 말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말하지 못해 보여준 것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행적이다. 그러니 믿고 시작해야 한다. 믿지 않으면 눈 앞에서 죽은 자가 부활해도 믿지 않으리. 무신론의 맹점은 인간이 만든 신이라도, 그런 선이라도 안 믿는데 있다는 것, 신을 믿으며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무신론자다. 다들 분열증자들이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니 어떤 윤리도 불가능하다. 내가 너를 왜 용서하고, 왜 사랑해야 하는가? 무엇이든 허용된다. 목사가 신도의 옷을 벗기고 스님이 유흥주점에 간다. 인간은 이 추악한 세상에서 어디에서 길을 찾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