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극인가?
이 여자는 내 소유물이요, 동산이요, 집이요, 살림도구요, 전답이요, 창고요, 말이요, 소요, 당나귀요, 아무튼 내 것이란 말이요.
여자만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이렇게 편한 길이 있었다. 여자들은 참 좋은 가축이다. 내 자식도 낳아주고, 키워주고, 내가 원할 때 잘 수도 있고, 병들면 간호해주고, 내가 없어도 알아서 제 자식 거둬 먹이고, 설사 평생 내가 일 안하고 논다고 해도 걱정이 없다. 그야말로 슈퍼원더우먼. 이런 로또를 내 손안에 장악하지 않는 건 천하의 멍충이! 남성 인류는 승리했다. “역사”시대의 승리자는 남성이다. 인류 최초의 식민지는 여성이었다. 여성을 길들인 방법으로 신대륙을 길들였고 아프리카를 길들였다. 소유하면 다 내 꺼. 내 맘대로. 어딜 여자가 시건방지게……
이 작품이 무려, 셰익스피어의 “희극”이란다.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웃어야 하는가?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보며 웃고 즐거워할 수 있는 건 남편이거나 남편을 주인으로 임금으로 섬기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는 2등 인류 ‘여성’의 삶을 인정하는 노예 아내이다. (누군가는 또 그러겠지. 그렇게 숭고한 자기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을 짓밟지 말라고. 차라리 숭고한 나의 노예 어머니라고 해라. 그것이 차라리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정말 희극인가? 본래 연극 대본이었고 발레로도 만들어져 발레의 지루함을 잊게 한 효자 상품이 된 즐겁고 유쾌한 희극? 이런 비극이 희극이 된 사실이야 말로 희극이다. 활자로 확인한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말대로 여성이 어떻게 길들여졌는지를 보여주는 시대의 보고서였다.
“난 결혼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결혼을 한다면 세 발 의자를 빗 삼아 당신의 머리털을 빗겨 주고 얼굴에는 칠을 해서 바보 취급을 해줄테야.”라고 건방지게 말하고, 여러 구혼자들을 거느린 동생 비안카에게는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누구”냐고 당당하게 추궁하던 캐서리나가 아내도 얻고 돈도 벌어보자는 심산으로 찾아온 페트루치오에게 길들여져 마지막엔 가장 온순하고 순종적인 아내가 되어 남편의 내기를 이기게 해준다는 이 연극은 사실 소름 끼치는 공포물이다. 이런 공포물을 보고 웃는다는 게 그야말로 공포다. 이상하지 않은가? 페트루치오는 마치 개를 길들이는 것처럼 캐서리나를 길들인다. 그리고 “애정을 갖고 아내를 잡는 법” 이라며 그 방법을 다른 남성들에게 가르친다.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말은 여기서부터 나왔나보다.
캐서리나는 아버지와 남편의 계약에 의해 미치광이 같은 결혼식을 한다. 이 아버지란 사람도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딸을 팔아먹는지, 남편이 먼저 죽었을 때 딸에게 유산이 남는지를 확실하게 챙긴다. 결혼(=매매)의 과정을 거쳐 캐서리나는 아버지 주인에서 남편 주인으로 양도된 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편의 별장에 감금된다. 남편 페트루치오는 캐서리나를 굶기고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자기 명령에 복종하도록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린다. 애걸이라고는 안 해본 캐서리나가 먹을 걸 달라고 애원한다. 심지어 캐서리나의 판단력을 흐려버리기 위해 대낮에 뜬 태양을 달이라 하고 지나가는 노인에게 건장한 귀부인이라고 하며 그녀의 생각을 묻는다. 이건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하는 그 유명한 정신적 충격법 아닌가? 진나라를 훅~말아드신 환관 조고가 2세 황제인 호해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니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황제인 호해마저도 “그럼 말인가?” 하며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했다는 그 상황. 이제 나는 나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나를 지배하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자발적 백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심신 장악법. 이렇게 확실하게 캐서리나의 정신을 노예화한 후 페트루치오는 옷과 장신구 마저 캐서리나의 취향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입혀입혀 친정으로 귀환한다. 승리자가 되어서. 아내들에게 “그 험상궂은 이맛살은 좀 펴고 그렇게 매몰찬 눈매는 하지 마세요…사랑과 순종을 가지고 봉사해야 할 경우에 지배나 권력을 요구하는 것은 여자로서 어리석고 창피한 노릇이에요.”라고 말하는 길들여진 아내를 데리고.
『캘리번과 마녀』에는 패트루치오가 아내를 길들이던 잔악한 수법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역사” 시대의 개막 이후 남성에게 세계사적 패배를 당했던 여성들은 그나마 중세까지는 공유지에서 약초 재배를 하고, 농촌에서 남편과 함께 농토를 가질 수 있었고, 도시의 공방에서는 기술 직공으로 일하며 사회적 경제적 자립을 추구할 수 있었다. 임신의 지속과 중단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비법과 묘약)이 있었으나 공유지가 파괴되고 마녀 사냥이 지나간 후 16~17세기에 여성은 사회 생활의 모든 입지를 상실했다. 이렇게 자립의 바탕을 잃은 여성들은 남성에게 종속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여성들이 가졌던 사회적 자산은 모두 빼앗기고 마녀로 찍혀 화형당하거나 시건방진 여자(말괄량이)로 찍혀 입에 재갈을 물고 마을을 돌며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캐서리나가 별장에서 남편에게 당한 그 고문이 바로 실제 역사에서 마녀사냥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1593년쯤 이 작품이 씌어졌다고 생각하면 그땐 이미 마녀사냥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난 후였다. 이 세상에 한 발 디딜 땅도 없어진 여성들은 남성의 집으로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생존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두 번째 세계사적 패배 “마녀 사냥”의 소프트 버전이 『말괄량이 길들이기』였다. 이것 보라고. 남편은 아내에게 이 정도의 장악력을 발휘해야 하며 말괄량이들은 이렇게 길들여져야 한다고 남녀 모두 웃고 떠들며 그렇게 5백년이 넘게 이 작품은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대표 희극으로 공연되고 전파되어 온 것이다. 페르루치오가 아내를 길들이는 방법이 "독에는 독으로"였다. 이제 그 말을 되돌려 줄 때다. 그루밍에 장악된 말괄량이를 깨워 시건방진 눈빛으로 바라보라. "독에는 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