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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5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경미 옮김 / 책세상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77)
옛날에, 학교 다니던 시절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띈 이 책을 서가 앞에 쭈그려 앉아 단숨에 읽었던 생각이 난다. 그때 맑스는 물론이고 엥겔스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에! 아니, 이게 정말 사실이야?” 나의 인생 책 하나 고르라면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을 꼽는다.
인류학과 여성학의 연구결과 원시수렵채집 사회에서도 남자가 사냥해온 것보다 여자들이 채집해온 음식이 인류 생존에 큰 공헌을 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진화에서도 암컷의 성선택이 중요함이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지만 20여 년 전만해도 나처럼 공교육만 받은 인간에게, 인류가 문명을 시작하기 위해 최초로 식민지로 삼은 것이 ‘여성’인류였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고도 놀라운 사실의 발견이었다. 아빠가 바깥일하고 엄마가 집안일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남녀의 몫이었으니까. 생각해보니 그땐 인류학도, 진화론도 몰랐다. 우리가 알던 가족이 재산을 자신의 확실한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제도였다니! 그리고 그 ‘가족’의 형태 또한 생산 수단과 소유의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니! ‘가족’은 처음부터 사회의 기초이고 자연발생적 사회 단위라고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이었다. 좋은 책은 상식을 부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엥겔스의 이 저작이 기억이 난다.
엥겔스의 날카로운 첫 키스 이후 20여 년 만에 읽은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은 잊었던 ‘전망’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그렇게 가슴 뛰었던 책이었지만 여태껏 참 이상한 ‘정상가족’에 대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었고, 결혼만 하면 자발적으로 좋은 며느리 되려고 노력했고, 남자들의 ‘추행’은 남자라서 그런거라고 참아와야 했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 무르익었어야 했을까? 2016년 강남역에서 살해된 젊은 여성의 희생으로 더 이상 가만 있지 않겠다는 목소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주 강력하고, 당황스런 백래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은하선의 대학강의가 취소되고, 만화가와 성우가 페미니스트인지 뒷조사를 당하고, 청원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청원하는 이 과격한 반응들. <82년생 김지영>같이 온건한 다큐 소설을 가지고 난리 법석을 떤다. 늘 해왔던 대로, 빨갱이 공격하듯, 페미니스트를 공격할 거란 생각이 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심 자기가 괜찮은 진보적 남성이라 여기는 자들 중에도 “요즘 여자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희들에게 잘해주잖아.”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폭력이 아니고서는 저들에게 이해시킬 말이 없다. 뭔가 쿵!하는 감정적 충격을 받지 않고서는 지금의 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할 남자들은 없다고 본다. 미러링은 그들의 언어를 똑같이 되돌려 줌으로써 그들을 폭력적으로 깨우치는 계몽(!)의 언어가 맞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폭력밖에 너희들이 알아듣는 말이 없기 때문에 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던 말 그대로다.
엥겔스의 말대로 모건의 <고대사회>는 그때도 지금도 그 혁혁한 연구결과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제대로된 번역서조차 없다) 인류학이야말로 맑스와 엥겔스가 추구하던 유물론적 역사연구였다. 엥겔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이로쿼이 족의 친족체계를 연구한 모건의 <고대사회>를 바탕으로 가족의 역사적 형태가 생산수단의 소유에 따라 변화함을 밝히고 결국 국가도 그 사적 소유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기구임을 주장한다. 엥겔스와 맑스의 과학적인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폭망한다. 그 후 공산사회는 어떤 모습은 어떨지를 가족의 형태로 전망해 본다. 물론 엥겔스의 역사발전의 법칙이라든지, 생물학적 남녀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 등은 그들의 시대적 한계라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맑스, 엥겔스를 비판해왔고 그 비판을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모건이, 그리고 엥겔스가 이 책에서 지적한 핵심, 그리고 지금 여성주의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를 딛고 새로운 전망을 위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사적 소유’의 대물림이 아닐까? 그러니가 페미니즘은 여성 권리 신장 운동이 아니다. 사적 소유로 이뤄낸 이 문명과의 싸움이다. 정희진의 말대로 “인식론”이다.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공부를 많이 하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역사학에서 인류학으로 넓혀야 하고 생물학에서 진화학으로 넓혀야 한다.
사적 소유는 집단의 이익이 반대된다. 사적 소유 덕분에 우리 가족이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 큰 환상이다. 실질적으로 ‘우리 가족만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안 된다. 모건이 연구한 이로쿼이 부족의 시스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엥겔스가 18세기 일부일처제 사회를 연구한 결과이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실증할 수 있는 현상이다. 내가 벌어 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내 노후까지 책임져야 하는 사회는 노예사회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관념이고 실제는 계급사회임을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돈으로 보육을 사고, 노인 돌봄을 사려고 하는데 그게 그 사람의 노동에 대한 적정한 대가인가? 어떻게 그 적정선을 아는가? 우리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최저임금을 주고 남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악착을 떨어댄다. 중산층의 가사 노동을 줄이기 위해 동남아 여성들의 합법적인 가사도우미 취업을 허용해야 한다는 기사도 봤다. 어떻게 저런 천박한 인식으로 기자질을 할 수 있는지 그게 더 놀라웠다.
우린 어떻게 갑질을 근절하고, 비정규직을 일소하고, 최저임금을 올릴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사적 소유’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 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사적 소유란 타인의 사적 소유를 침해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노동이 상품화된 이 사회에서 누군가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권리 빼앗기기 싫어서 “아쉬우면 너도 시험봐서 들어와라.”이런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이 모든 갈등에 대한 근원적 사유 없이 누구 편든다는 것은 또다른 누군가를 착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일들은 법과 제도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삶에 대해 성찰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떤 부인이 맑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가 되면 누가 구두를 닦나요?” “당신이 닦으시오”
사적 소유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은 (어렵지만)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사적 소유 철폐가 예전에 소련이 하다가 실패했던 공동농장,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 부와 권력으로 남을 지배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자유, 평등, 우애의 공동체는 인간 개인의 자발적인 심성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랜 노예의식이 인간의 심성을 지배하고 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 스스로 페미니스트로서 가부장적 사적 소유 문명에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면 권리 찾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두 자기가 닦는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아마 이게 가장 어렵고, 익숙지 않은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