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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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른다…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니다.” <도덕의 계보_니체>

<인형의 집>과 함께 떠오른 건 니체의 책. 아이러니하게도, 여성혐오가 강했다던 그의 책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건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가 아닌가 싶다. 남편의 그 변덕스런 결정 이전에 노라는 자신을 몰랐다. 하룻밤 새 그녀는 드디어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 아버지와 남편의 인형이었어! 법과 도덕이란 것, 아내와 어머니라는 성스런 의무는 도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씌운 것이냐?하는 근본적 질문들이 노라를 깨어나게 했다. 그날 밤 남편의 태도는 섬광처럼 모든걸 비춰주었다.

노라가 갑자기 변한 게 아니다. 빚에 대해서 남편은 절대 모르게 하기 위해 마음을 졸이며 스스로 가졌던 의문들이 그날 밤 폭발했을 뿐이다. 노라는 모든 가치와 윤리체계에 물음표를 붙이고 여지껏 예쁜 인형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을 버리고 스스로를 알기 위해 떠났다. 노라는 남편과 싸우고 홧김에 집 나간 부인이 아니다. 사치스럽게 살다가 빚을 지고 남편에게 발각돼 야반도주한 부인도 아니다. 8년이나 같이 산 남편이 낯설어서, 모르는 남자랑 같이 있을 수 없어서 나갔다. 자신이 낯설어졌는데 남편인들 옛날 남편이겠는가.

말로만 듣던 <인형의 집>을 읽고 보니 노라는 집을 나가야만 했다. 루쉰은 대오각성하고 집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했는데 여성의 각성과 함께 필요한 것이 경제력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없지만 돈 때문에 자유를 팔 수는 있다. 루쉰은 여성이 경제권을 갖기 위해 정말 끊임없이..동네 양아치가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줄기차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돈 한푼 없이 집을 나간 노라는 타락하거나 굶어죽었을 거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루쉰과 달리 나는 그녀가 일하며 버텼을 것 같다. <아내의 역사>에서 무수한 아내들은 그야말로 진흙에서 쿠키를 만들고 잡초 더미에서 스웨터를 떠내던 여성들 아닌가. 노라는 이미 빚을 갚으려고 필사 일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힘들어도 좋았던 쾌감을 맛봤다. 그건 스스로 돈을 벌며 남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노라는 그렇게 쉽게 타락하거나 죽을 여자는 아니다. 하다못해 가정교사라도, 유모라도 했을것이다.

“당신은 나를 이해한 적이 없어요. 토르발, 나는 부당한 일을 많이 당했어요. 먼저는 아버지에게서, 그 다음엔 당신에게서. 당신들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들은 나에 대해 애정을 갖는게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노라의 남편은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작금의 가부장적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보호해주고 남편이 사랑해주면 고마운 줄 알지 왜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하는가! 이 여자 제정신인가? 그러니 노라의 말을 철없는 애들 말로 취급하고 가르치려 든다. 아내와의 에로틱한 분위기 마저 저 좋을 대로 상상한다. 낮엔 정숙한 아내, 밤엔 요부를 원하는 가부장적 남성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러면서 그게 아내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적 아내들은 대게 이런 남편의 욕망을 맞춰주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노라도 그러했다. 일하고 쉴 때도 끊임없이 남편의 취향에 맞추려고 애썼다. 노라는 아픈 남편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 몰래 돈을 빌렸다. 그럼에도 남편은 노라가 자기 몰래 돈 빌린걸 알고는 “경박한 여자 때문에 망했다”며 비난하고 체면 때문에 헤어지지는 않지만 쇼윈도 부부처럼 살면서 애들에게 손도 대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노라를 몰아세우다가 순식간에 노라의 빚이 사라지게 되자 바로 너를 용서했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남편은 한번도 노라의 처지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 노라가 쇼핑을 하고 오면 장인 닮아 낭비벽이 있다고 잔소리하다가 그 낭비를 메꿀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꼈고, 자신을 안락하게 봉양하고 말 잘 듣는 아내 노라에 대해 만족스런 기분을 사랑이라 착각했을 뿐이다. 노라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아기 인형이었다가 남편에게 예쁜인형이 되려는 나.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노라는 자신을 알아봐야겠다고 집을 나갔다.

“토르발, 나는 내가 지난 팔 년 동안 여기서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산 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그리고 나는 아이 셋을 낳았죠. 아, 그 생각을 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을 갈가리 찢고 부술 수 있을것 같아요.”

남편의 합당함에만 맞춰 자신을 그림자처럼 여기고 살았으나 이제 그녀는 자신의 부당함을 발견했고 자기 존재의 합당함을 찾으려고 애쓴다.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남자랑 살며 애까지 낳았으니…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노라는 극심한 자기 혐오에서 시작해 그 자신을 다시 발견해 나갈 것이다. 절대 타락하지 않으리라.

모든 것에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 그러나 물음표를 붙이기가 어렵다. 원래 그런 줄 알기 때문에. 노라처럼 인생의 시련 앞에 서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련이 닥쳐도 시련을 해석할 줄 모른다. 그건 철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철학은 사건을 해석하고 변형하는 힘이다. 그 힘을 기르지 않으면 그저 아는대로,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그채로.. 팔자타령이나 하다가 끝난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의 취향을 맞추려는 수많은 가부장적 아내들은 그것이 제 의무라 생각한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어쩔 수 없지만 남들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못 말릴 참견이다. (너나 그렇게 사시라!)

인생의 구렁텅이가 무덤이 되지 않고 구렁에서 발견한 의외의 탈출구가 되게 하려면 동정과 위로가 아니라 물음표를 생성시켜야 할 것 같다. 왜 이런 위기 상황이 온 것일까 물어야 한다. 위로와 힐링이 참 위로와 힐링이 안 되는 건 근본적 문제는 덮어두고 자꾸 연고만 발라대기 때문이다. 도려내야 할 것은 도려내야 한다.

<인형의 집>은 여성문제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정체성과 자기 인식에 대한 소설이다. 자기 자신이 가부장적 남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남성이 정말 자기 어머니를 비롯한 여성들의 삶에 공감하고 그 시스템을 바꾸려고 노력하게 될까? 자신이 누리는 특권이 특권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평등’을 이룰까? 남성 스스로도 노라처럼 자신에게 낯설어져야 한다. 페미니즘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주체들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철학이다.

아버지가 엄마를 죽였을 때, 이 폭력의 근원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출산율이 낮아지는 건 결혼을 안해서가 아니라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문제가 아닐까 고민해야 한다. 고민하지 않으면 다 돈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유치원이 삥땅을 치고, 애들을 학대하는 게 감시와 처벌로 해결될까? 박복한 여성의 고통은 단지 재수없이 나쁜 놈을 만나서 생긴 일인가?

지금 안락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고 생각하면 우리는 기적적으로 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노라의 남편처럼된다. 노라의 말대로 남녀가 기적적으로 변할 때 새로운 가정의 윤리가 생겨날 것 이다. 진정 가부장적 가정의 파탄을 염원한다. 노라가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 걸었던 새 길은 아직 열리지 못했다.

입센은 <인형의 집> 자필원고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비극에 대한 메모> “정신적인 법률이 두 가지 존재하고, 양심이 두가지 존재한다. 남성 안에 한 가지가 있고, 아주 다른 한 가지가 여성 안에 있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여성은 실제적인 삶에서 마치 이들이 여성이 아니고 남성인듯이 남성의 법으로 판단을 받는다.” 입센이 말한 오늘은 바로 오늘이다. 아직도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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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2 펭귄클래식 75
샬럿 브론테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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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적 러브 스토리 <제인에어>


마르세유의 바보의 천국에서 노예가 되어 현혹적인 행복에 싸여 한순간 흥분하다가 바로 다음 순간 쓰디쓴 후회와 치욕의 눈물을 흘리면서 숨막혀 하는 삶과,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건강한 영국의 중심부 지역 산모퉁이에 위치한 시골학교 선생이 되어 자유롭고 정직하게 사는 삶 중에서 과연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인지 자문해 본다. 그렇다. 이제야 나는 원칙과 법을 지키면서, 격정의 순간 내게 던져졌던 정신 나간 유혹을 경멸하고 박살냈던 내가 옳았다고 느낀다. <제인 에어 中>

 제인 에어는 행복을 약속했던 로체스터 곁을 떠난다. 너무 극적이게도 그녀의 결혼식 날, 혼인서약을 하기 바로 전에, 그에게 아내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로체스터의 곁에 남고 싶은 마음과 떠나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갈등하던 제인은 독한 마음을 품고 떠난다. 마음은 다시 손필드 저택으로 달려가지만 몸은 마차에 오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다시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제인은 노예의 안락한 삶보다 힘들어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한 자신이 옳다고 느낀다. 옳다! 옳다마다!

 <제인 에어>는 아주 특별한 여성 캐릭터 ‘제인’이 등장하는 본격 로맨스 소설이다. ‘본격’이라 말함은 우리가 기대하는 달달한 로맨스가 있다는 말이다. ‘특별한 여성 캐릭터’란 제인이 그 로맨스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남녀의 사랑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남녀이겠지만 그들의 권력은 동등하지 않다. 

 흔한 캔디 스토리에서 여성은 명랑한 마음씨와 아름다운 미모를 갖고(심하면 민폐 캐릭터로 등장) 남성은 부와 힘을 갖는다. 부와 지위가 있는 남성이 그렇지 못한 여성을 우연히(?) 만나 사랑하고 보호하고, 그런 그에게 그녀는 의지하고 그 덕에 자존감도 찾게 된다. 영화 <여인의 향기>가 딱 그런 스토리다. 대개 이런 이야기를 ‘로맨스’라고 알고 있다면 <제인 에어>에서 그 구도는 확 뒤집어진다.

 제인은 고아였고, 고아원이나 마찬가지인 자선학교에서 배운 교양과 지식으로 가정교사 일을 구해 손필드 저택에서 로체스터를 만난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연애에서 핵심은 ‘대화’다. 로체스터는 제인을 대화가 통하는 여자라고 한다. 자신이 제인보다 나이도 더 많고 경험도 많이 했으므로 제인을 ‘가르치려’들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저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세상 구경을 더 많이 하셨다는 이유로 제게 명령할 권리는 없습니다….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권리는 선생님께서 그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거의 스무살이나 어린, 작고 못생긴 가정교사가 감히 주인님에게 나이와 경험의 권위를 내세우지 말라고 한다. 로체스터는 당황하지만 그 어린 여자에게 남에게는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젊은 시절과 지난날의 후회를 술술 털어놓고 제인은 그것을 들어준다.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는 그들은 친구가 된다. 부와 권력이 있는 남자에게 여성이 의존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어리고 가난하고, 미모도 없는 여성에게 로체스터가 끌린다. 샬럿 브론테는 제인을 당대에 보기 드문(지금도 보기 드문) 주체적인 여성캐릭터로 만들어냈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강단 있는 못생긴 여성. 

 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못생겼다는 평을 듣는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여긴다. 지금도 미모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므로 돌려깎고 벗겨내고 부풀리느라 목숨까지 잃을 정도인데 제인은 못생기고 왜소하다고 나온다. 부모도 없고, 재산도 없고, 미모도 없는 여성 제인이 로체스터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지성 덕분이었다. 샬럿 브론테는 여성의 미모와 남성의 권력이 교환되는 로맨스를 전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보석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안기려 하지만 제인은 그런 장식들을 모두 거부한다. 나는 당신의 인형이 아니에요!

 제인은 자신의 힘으로 로체스터를 도울 수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샬럿 브론테는 여성이 교환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나누고 공감하고 대등한 사랑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이점, 샬럿의, 그리고 여성들의 바람이 아닐까 싶었다. 남성 작가들의 로맨스에도 못생기고 지적인 여성에게 끌리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지..더 읽어봐야겠다.<위험한 관계>에서 봤던 남성의 판타지를 생각해 보면, 로체스터가 미모의 잉그램양이 아니라 지적이고 못생긴 제인에게 끌리는 건 여성의 희망사항이 아닌가 싶다. -_-;(지적인 여자 좋지! 예쁘면 더 좋지! 뭐 이런게 아닐까..)

 제인은 당대에도, 지금도 이상적으로 여기는 ‘아내 역할’을 거부한다. 선교사의 아내로 안성맞춤의 자질을 가졌다며 청혼하는 세인트 존을 단호히 거절한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녹아 들어 자신의 삶이 없어지는 생활은 견딜 수가 없다. 제인은 동반자 ‘아내’와 아내 ‘노예’를 정확히 구별했기 때문이다. 그걸 가려내는 능력은 로체스터에게 받은 존중과 사랑 덕분이었다. 존중하는 사랑인지 착취를 가장한 사랑인지 구별할 수 없다면 <제인 에어>를 일독하시길 바란다. 사랑을, 남성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사랑으로만 알면 안된다.그게 노예를 길들이는 방법이었다.(실상, 보호받는 여성도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랑에 눈 멀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같다면 전복적인 제인을 만나야 한다.


PS.<제인에어>는 영화보다 책이 훨씬 재미있다. 영화는 밋밋하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밀고 당기는 흥미 진진한 연애가 영화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친절하고, 잘생기고, 지적이고, 높은 이상을 가졌지만 폭력적인 세인트 존의 모습은 책이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모름지기 세인트 존 같은 남자를 구별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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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노예)의 역사


가부장제에서는 "아내"라는 가내 무임금 노예가 꼭 필요하다. 이 사실은 동서 고금을 통틀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책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 가내노예가 없으면 이 문명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소유의 시작은 아내였다. 인류 공통이다. 만국의 아내 처지는 똑같다. 가난한 아내(딸)의 처지란 살만하면 남은 밥 먹여 살림밑천으로 일부리다가 살만하지 않으면 남의 집에 팔아먹는다. 그집에 가서 억수로 고생한다. 정말 만국 공통이다. 

 

우리의 아내들도 "아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아내도 아내가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 우릐의 스윗 홈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와 꼭 닮아 있다. 저 아래서 누군가의 고혈을 빨아야 이윤이 남는다. 내가 최저가를 찾을 때 나는 누군가의 등골을  빼먹고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이 동양고전사상에서 대안을 찾는 이유를 알 것같다. 도가의 소박한 자급자족주의, 공자의 인仁사상을 문자그대로 적용하면 서로를 착취하는 메커니즘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남에게 하라고 권유하는게 아니라 그저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공자의 仁이다. 내가 하기 싫은 청소 설거지 아내에게 미루지 않고 스스로 하는 것, 자기 어머니 밥은 자기가 챙겨 드리는 것, 그러다 도움이 필요하면 정중히 요청하는 것, 무수한 노예들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서비스를 받느니 좀 더 힘들어도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 힘들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이런게 아니면 이 착취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방도가 없다.

 

낙원은 아무 일도 안하고 먹고 사는 곳이 아니라 그 낙원에 널려있는 먹을 만한 것들을 스스로 구해 먹는 세상이다. 누군가 놀고 먹는 사람이 있다면 어딘가에 그의 일을 대신할 노예가 있다.(지금 우리는 민주노예사회에 살고 있는게 아닌가?) 아내가 소유물이 된 이후로 그 처지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일을 많이 하는 여성은 임금을 적게 받고 일을 적게 하는 여성은 부유했고, 높은 계급이었고, 조금 자유로왔다. 아내의 역사는 계급과 빈부의 문제도 포함한다. 젠더 문제는 남녀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착취의 문제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남녀의 권리 투쟁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포함한다. 착취의 그늘에서 존재하지만 목소리 없던 존재들, 인식의 범위로 들어오지 않았던 자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한거다. 세상에 이보다 충격적인 한방이 또 있을까.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이 희생해야 하는 아내가 아닌 진정 동반자로서의 아내상을 새롭게 수립하는 것은 꼭 "가정'의 문제 만은 아닌, 이 거대한  착취 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유익한 책이었다. 그러니 제발.. 나는 아내를 존중한다..는 말로 위안을 삼지 말자. 여전히 매맞는 아내가, 여친이 있다. 남의 노동을, 서비스를 착취하는 구조속에서 그 누구도 떳떳할 수 없다.


이 책이 절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아내의 역사>로 번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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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삶에 대한 근원적 해부


‘친부살해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리기에는 너무나 깊고 넓은 소설이었다. 지켜야 할 윤리를 잃고 표류하는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친부 살해라는 선정적인(?) ‘이야기’ 속에 근대인의 잃어버린 윤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친부 살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버지란 존재는 더럽고 불쾌하더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한 물리적 존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버지 표도르를 얼마나 혐오스럽게 묘사해놨는지 정말 제대로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다. 게다가 표도르는 애들을 버렸다! 낳기만 하고 버렸다. 심지어 스메르쟈꼬프는 강간의 결과물이다. 신이 있어도 인류가 비참함을 면치 못하는 것처럼, 아비가 있어도 자식을 버린다. 신도 부정하고 아비도 부정하고 싶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존재, 그들을 부정한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수 있을까?

큰 아들 드미트리는 돈과 여자문제로 아버지와 드잡이를 하고 죽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정말 용의자가 되어 재판을 받았고, 작은 아들 이반은 내심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고 무시하면서 죽기를 바라고, 셋째 아들 알료샤는 방관했고, 혼외 자식 스메르쟈꼬프는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를 죽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집안의 무질서한 삶을 인류의 윤리적 삶으로 확대한다. 표도르만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너무나 서로에 대해 잔인하지 않은가?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인간들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


“사실 인간의 ‘동물적인’ 잔혹성에 대해서는 간혹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동물들에게 너무나 천부당만부당하고 모욕적인 이야기겠지. 동물들은 결코 인간들처럼 그렇게 잔인할 수 없어, 기교적이고 예술적일 정도로 잔인할 수 없거든. 호랑이는 그저 물어뜯고 찢어 놓는 것밖에 못해. 호랑이한테 설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귀를 밤새도록 못으로 박아놓을 생각은 하지도 못할거야…나는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경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라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게 창조해 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418)


이반의 말에 격하게 공감이 된다. 악마는 인간을 닮았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역사는 인간 잔인함의 기록이다. 우리가 이반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인간의 잔인함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악에 대한 응보와 정당한 대가를 바란다. 이반도 무고하게 고통 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긴다. 비참한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밟고서 이루어진 세계라면 신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이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필요한 것은 악에 대한 응징이다! 그렇다면 강간의 자식인 스메르쟈꼬프가 강간범인 자기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아버지를 죽였는데 이반은 미치고 스메르쟈꼬프는 자살하고 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통해 인과응보가 이루어지는 질서정연한 세계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하는 것 같다. 인간이 내리는 형벌로 악인을 처단할 수 없다. 드미트리의 법정은 법복 귀족들의 법리 논쟁터일 뿐이지 죄지은 사람을 뉘우치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사실상 우리가 사는 곳은 인과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무질서하다. 부자가 가난한 이의 빵을 ‘정당하게’ 빼앗으니 응징할 수도 없다. 문제는, 이런 걸 해결할 지도자를 구한다면 우리 스스로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반이 지은 <대심문관>은 여러 번 곱씹어 읽어 보어야 한다. 대심문관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존중하지 않는다. 개돼지 취급을 한다. 만인을 행복하게 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었고, 밥만 먹여주고 욕구만 충족시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게 더 불쾌하지 않은가? 물론 인간은 빵 없이 살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심문관은 저열한 장사꾼이다.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해야 할 욕구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적이다. 자유를 바쳐라, 그리고 먹어라. 빵과 자유를 거래한 인신(人神).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에게 갖는 경외감을 사특한 기적과 거래한 인신(人神). 그는 인간의 노예근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하는 신은 믿지 않는 자에게 벌을 내리고, 믿는 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신은 인간을 상대로 거래하지 않는다. 인간을 노예로 삼은 대심문관의 현란한 변명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긴 듯 이마에 키스해주고 떠나는 신. 응보가 필요한 인간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무조건적 사랑이 신의 사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신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타인도 쉽게 죽일 수 있는 세상에서 더 나은 동물, 사람이 되려면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 정말 무능력하게 보이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게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신의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 할 수 있다고 먼저 “믿어야만” 행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믿지 않으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세상을 새롭게 개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스스로 심리적 측면에서 다른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기 전에는 형제애란 싹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선 “고립”의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도처에서 군림하고 있으며 아직 그 시기가 오지도 않았습니다. 왜냐면 지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자신만의 성취된 삶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삶의 완성 대신 단지 완전한 자살행위를 이끌어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아 실현의 성취 대신 완전한 고립에 빠지기 때문에 스스로를 감추며 자신이 가진 것을 숨기고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고 자신으로부터 사람들을 멀리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532-533)


조시마 장로는 고립을 끝내야 사람들이 새로워 질 수 있다고 한다. 『죄와 벌』에서도 뽀르삐리는 로쟈에게 삶으로 뛰어들라고 했다. 고립을 끝낸다는 것은 우리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는 형제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이반 같은 이성주의자들과 과학 신봉자들, 합리주의자들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은 주고 받는 계약 속에 사랑과 응보를 생각한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해결방안, 즉 ‘신을 향한 믿음 속에 선의 실천과 인간의 갱생’ 같은 얘기를 쓴 그를 정말 철 지난, 보수적인, 전근대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만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만인을 죽인다. 너를 죽이면 나도 죽는다는 생각을 깨우치지 않으면 이 비극이 끝날 수 있을까?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설교한다. 인간은 무한 영겁의 세계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단 한 번 부여된 존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묘하게 비틀어 사랑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믿을 수 없다. 장로는 인간의 정의부터 다시 한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활동적인 사랑의 순간이 한 번, 단 한번만 부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지상의 삶이 부여되었고 그와 더불어 시간과 제한된 세월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에 겨운 존재는 소중한 선물을 거절하고 존중하지도 아끼지도 않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말았습니다.”(568)  

내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 이것이 신을 믿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 어떤 윤리도 이익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황폐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묻는 사람들에게 조시마 장로는 인간이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임을 굳게 믿고 살라고 한다. 스스로를 믿으세요.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친부살해의 막장 드라마 속에 숨긴 너무나 감동적인 설교지만 여전히 내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호홀라꼬바 부인도 이렇게 물었다. “인류를 사랑하지만 개인에 대해서는 적개심만 남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105)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105)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게 정답이다. 하지만 이반이 그랬고 우리가 그렇듯, 할 수 있는 일은 하기 싫다. 안락에 빠진 노예상태가 이렇다. 누군가가 약속하는 행복의 나라로 가지 않고 이 힘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길이다. 그러므로 멀고도 험난하다. 그러나 그 길을 통과한 자만이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들 수 있다. 엉망 진창의 길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도스토예프스키 별이 반짝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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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브 공작 부인 밀레니엄 북스 91
라 파예트 지음, 김인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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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무와 마음의 평안이 당신의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욕망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뒤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야심과 연애가 얽힌 궁정 생활은 프랑스나 조선이나 중국이나, 전 세계 어디든 공통적인 현상 같다. 궁정에서만 이런 것은 아닐 터, 보통 남녀의 연애가 그저 연애일 수 없는 이유는 작게는 일신의 귀천과 집안의 흥망이 달렸고 크게는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춘향이가 신분을 뛰어 넘는 사랑을 했나? 춘향이는 연애로 신분이 상승했다. 춘향이 처지에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을 지킬 방도는 짝짓기밖에 없었다. 다른 수가 있었다면 그렇게 말도 안되게 변사또에게 저항하고, ‘절개’라 하는 신분에 맞지도 않는 윤리를 무기로 썼겠는가? 

춘향이가 스스로 귀하게 되는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했다면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마저 허무한 것임을 깨달았다. 1678년 발표된 소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런 연애 감정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절세 미남 미녀들이 등장하는 화려한 프랑스 궁정 생활은 순정만화로도 그려질 법한데 그렇지 않았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결론은 그 ‘순정’의 환상을 깨기 때문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연애와 야심과 권력이 얽힌 궁정의 연애 스토리를 경험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변덕스러움과 사랑이 호감으로만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결혼 계약이나 아버지의 권력 아래서만 사회적 자산을 가질 수 있는 여성은 어떤 처신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클레브 공작부인>은 시대를 앞선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돌봐주기를 애원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보는 여성. 클레브 공작부인.

백 여 년 쯤 후, 세상이 뒤집어져 왕과 왕비가 군중 앞에서 목이 잘려나갈 운명 같은 건 까맣게 몰랐을 호화, 찬란, 우아한 앙리 2세 시절, 왕궁을 가득 채운 건 연애사였다. 결혼은 형식, 내용은 연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나 할 것 없이 연애에 얽혀 있었는데 그것을 단지 “연애”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누가 누구와 결혼을 하고, 누구와 연애를 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적시한다. 누가 누구의 총애를 받고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서열. 클레브 공작부인이 처녀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끊임 없이 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먹고 생각하는 일이란 게 고작 출세욕과 아첨.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는 하고, 혹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뿐 편안함과 한가로움이란 없는 곳. 궁정이라는 곳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다가는 큰 코를 다치게 된단다. 도대체 무엇무엇답다라든가, 무엇무엇스럽다라는 것은 거짓이게 마련이니까


어머니는 마치 궁정 연애사에 휘말렸다 살아난 사람처럼, 딸에게 궁정 생활에 대한 동경을 ‘환상’이라고 가르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딸이 남자들에게 어떤 유혹을 받고 어떤 길로 빠져들지를 훤하게 아는 듯, 어머니는 딸을 감시한다. 그렇다고 청춘 남녀의 연애 감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생겨남과 동시에 권력관계에 얽혀 드는 것이 이 “순수한 연애감정”의 비극적 운명이지만(사실은 권력관계와 무관한 연애란 없지만 연애는 순수하다는 환상을 믿는 사람들에겐 비극적이겠다) 어머니가 아무리 부덕과 이성의 힘을 가르쳐도 서로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클레브 공작부인과 느무르 공작의 연애 감정은 막을 수가 없었다.

처음 클레브 공작과 결혼했을 때 그녀는 신분에 걸맞는 남편을 맞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클레브 공작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인 일종의 계약 같은 결혼을 했다. 그건 남편인 클레브 공작도 인정한다. 남편의 특권은 주어졌지만 아내의 마음속에 자기 자리가 생긴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내의 자리를 채우고 남편의 역할을 얻는 그런 형식적 결혼. 그런데 클레브 공작부인이 느무르 공작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여성 사람이 남성 사람에게 갖는 호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런 감정이 누구의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 게 아니란 것. 클레브 공작 부인은 그제서야 남편이 자기에게 바란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자신은 결혼한 몸.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지키려면 느무르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별장으로 도망치지만 오히려 틈만 나면 떠오르는 건 느무르의 얼굴!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타오르는 연정은 스스럼 없이 별장에 침투해서 그녀를 몰래 엿보게 하고,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할까봐 질투심에 불타오르게하고, 남에게 광고를 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떠들 수 있는 말은 모두 떠들어 자랑했다가 후회하게도 하며, 부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의심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도 하는 엄청난 감정이다. 사랑은 아주 강한 배타적 소유욕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갖고 싶은 엄청난 소유욕이 발동하는 것. 네 몸도, 네 감정도, 네 재산도 다 내꺼! (사실, 프로이트 식으로 설명한다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곧 자기애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 보존의 욕구가 강한 동물이니 자기애도 타인을 사랑하는 자기애도 배타적이고 독점적일수밖에 없는 것)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랑이 이런 강한 배타적 소유욕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길고 오래 가지도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허우적거리느라 알아채지 못하는데 클레브 공작부인은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 보는 듯,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들이 일렁인 길을 따라 성찰해 본다. “남편이 죽고 자유 부인이 되어 느무르 공작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소설이 끝났으면 살롱에서 귀부인들이 하던 잡담으로 끝났거나 순정만화로 각색 될 뻔했으나 클레브 공작부인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자유로운 몸이고 저도 그러한 몸이므로, 지금 우리들이 장래를 약속한다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리는 없겠지요. 그러나 남자들은 영원한 약속을 맺은 뒤에도, 계속 사랑의 정열을 이어가지는 못합니다. 모든 행복의 원천인 저 정열이 식어가는 것을 지켜 보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에다가 어떻게 내 몸을 갖다 놓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정열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저를 차지하는데 방해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지요.. 장애가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집착을 불러일으킨 셈입니다.

 클레브 공작 부인은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의 감정을 남편에게만 향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럴 수 없음을, 그리고 그 감정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고 그 변덕에 자신을 맡기지 않기로 결심한다. 사랑을 하면 이성도 마비돼 버리지 않는가? 그 뒷감당은 쓰고도 쓰다는 걸 부인은 알았다. 누구와 짝짓기를 할 것이냐를 집요하게 강요하고 요구하는 사회에서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간 클레브 공작부인. 이런 부인을 금욕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다. 만약 이 소설을 금욕주의의 교과서로 만들어 누군가에게 수도원에서 은둔하라고 강요한다면 욕먹을만하다. 그러나 소설 속 클레브 부인은 스스로 사랑의 감정에 대해 성찰하고 선택했다. 저마다 제 욕망을 따라 살다가 망신 당하고 때로는 가산을 탕진하고 일신의 보존도 이룰 수 없는 삶을 살다가 왜 그렇게 된 지도 모르고 죽는 사람들에 비하면 클레브 공작 부인은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고 달콤하고 짧은 행복보다 길고 평온한 행복의 길을 갔다. 

사랑도 일종의 표현 불가능한 감정이다. 어떤 사람이냐, 언제 만났느냐, 말 그대로 “케바케” 다르므로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주는 왕자와 결혼해서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공식만을 ‘사랑’의 정의로 미리 상정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클레브 공작부인의 마지막 선택이 불만스럽다. 느무르 공작이 절규하듯, “아니 도대체 왜? 나랑 결혼 안 한다는 거야? 내가 널 사랑하고 너도 날 사랑하고 남편도 죽었는데” 사랑을 갈구하는 느무르 공작이 안돼 보일 정도다. 그러나 공주가 공주와 나눈 우정은 사랑이 아닌가? 공주가 말을 사랑하면 애마인인가? 공주가 마차나 경주를 사랑하면 그저 덕후인가? 그건 사랑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클레브공작부인>의 미덕은 사랑을 정의하지 않고 그 감정이 마음의 평화와는 양립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고요함 보다 변덕스러운 격랑을 원하면 화려하고 우아한 궁정생활에 익숙해지고 남의 눈치를 보면서 나도 음모와 간계를 쓰면 된다. 그러나 “나는 원하지 않는다.” 모든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라도 나는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 클레브 부인. 도피일 수도 있고, 이기적인 자기애 일수도 있다. 그러나 17세기의 이 부인이 자신의 결정대로 원하지 않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 만으로 당대에 보기 드문 여인이라 생각한다. 

부인의 예상대로 느무르 공작은 처음 죽을 듯이 괴로워하다가 서서히 클레브 공작부인을 잊었다. 그 전에도 느무르 공작의 연애는 끊이지 않았고, 무려 영국 여왕의 호감도 받던 미남자 아니었던가. 클레브 공작부인은 한해의 반은 수도원에서, 반은 자택에서 지내며 가장 청정하고 성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공주가 왕자를 사랑해야만 사랑인 줄 아느냐? 공주는 스스로를 가장 사랑했다…라고 외치는 소설 <클레브 공작부인>이었다. 


*생소한 작품이었으나 의외의 반전을 가진 17세기 소설...명작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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