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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2 ㅣ 펭귄클래식 75
샬럿 브론테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전복적 러브 스토리 <제인에어>
마르세유의 바보의 천국에서 노예가 되어 현혹적인 행복에 싸여 한순간 흥분하다가 바로 다음 순간 쓰디쓴 후회와 치욕의 눈물을 흘리면서 숨막혀 하는 삶과,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건강한 영국의 중심부 지역 산모퉁이에 위치한 시골학교 선생이 되어 자유롭고 정직하게 사는 삶 중에서 과연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인지 자문해 본다. 그렇다. 이제야 나는 원칙과 법을 지키면서, 격정의 순간 내게 던져졌던 정신 나간 유혹을 경멸하고 박살냈던 내가 옳았다고 느낀다. <제인 에어 中>
제인 에어는 행복을 약속했던 로체스터 곁을 떠난다. 너무 극적이게도 그녀의 결혼식 날, 혼인서약을 하기 바로 전에, 그에게 아내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로체스터의 곁에 남고 싶은 마음과 떠나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갈등하던 제인은 독한 마음을 품고 떠난다. 마음은 다시 손필드 저택으로 달려가지만 몸은 마차에 오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다시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제인은 노예의 안락한 삶보다 힘들어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한 자신이 옳다고 느낀다. 옳다! 옳다마다!
<제인 에어>는 아주 특별한 여성 캐릭터 ‘제인’이 등장하는 본격 로맨스 소설이다. ‘본격’이라 말함은 우리가 기대하는 달달한 로맨스가 있다는 말이다. ‘특별한 여성 캐릭터’란 제인이 그 로맨스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남녀의 사랑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남녀이겠지만 그들의 권력은 동등하지 않다.
흔한 캔디 스토리에서 여성은 명랑한 마음씨와 아름다운 미모를 갖고(심하면 민폐 캐릭터로 등장) 남성은 부와 힘을 갖는다. 부와 지위가 있는 남성이 그렇지 못한 여성을 우연히(?) 만나 사랑하고 보호하고, 그런 그에게 그녀는 의지하고 그 덕에 자존감도 찾게 된다. 영화 <여인의 향기>가 딱 그런 스토리다. 대개 이런 이야기를 ‘로맨스’라고 알고 있다면 <제인 에어>에서 그 구도는 확 뒤집어진다.
제인은 고아였고, 고아원이나 마찬가지인 자선학교에서 배운 교양과 지식으로 가정교사 일을 구해 손필드 저택에서 로체스터를 만난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연애에서 핵심은 ‘대화’다. 로체스터는 제인을 대화가 통하는 여자라고 한다. 자신이 제인보다 나이도 더 많고 경험도 많이 했으므로 제인을 ‘가르치려’들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저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세상 구경을 더 많이 하셨다는 이유로 제게 명령할 권리는 없습니다….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권리는 선생님께서 그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거의 스무살이나 어린, 작고 못생긴 가정교사가 감히 주인님에게 나이와 경험의 권위를 내세우지 말라고 한다. 로체스터는 당황하지만 그 어린 여자에게 남에게는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젊은 시절과 지난날의 후회를 술술 털어놓고 제인은 그것을 들어준다.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는 그들은 친구가 된다. 부와 권력이 있는 남자에게 여성이 의존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어리고 가난하고, 미모도 없는 여성에게 로체스터가 끌린다. 샬럿 브론테는 제인을 당대에 보기 드문(지금도 보기 드문) 주체적인 여성캐릭터로 만들어냈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강단 있는 못생긴 여성.
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못생겼다는 평을 듣는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여긴다. 지금도 미모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므로 돌려깎고 벗겨내고 부풀리느라 목숨까지 잃을 정도인데 제인은 못생기고 왜소하다고 나온다. 부모도 없고, 재산도 없고, 미모도 없는 여성 제인이 로체스터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지성 덕분이었다. 샬럿 브론테는 여성의 미모와 남성의 권력이 교환되는 로맨스를 전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보석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안기려 하지만 제인은 그런 장식들을 모두 거부한다. 나는 당신의 인형이 아니에요!
제인은 자신의 힘으로 로체스터를 도울 수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샬럿 브론테는 여성이 교환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나누고 공감하고 대등한 사랑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이점, 샬럿의, 그리고 여성들의 바람이 아닐까 싶었다. 남성 작가들의 로맨스에도 못생기고 지적인 여성에게 끌리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지..더 읽어봐야겠다.<위험한 관계>에서 봤던 남성의 판타지를 생각해 보면, 로체스터가 미모의 잉그램양이 아니라 지적이고 못생긴 제인에게 끌리는 건 여성의 희망사항이 아닌가 싶다. -_-;(지적인 여자 좋지! 예쁘면 더 좋지! 뭐 이런게 아닐까..)
제인은 당대에도, 지금도 이상적으로 여기는 ‘아내 역할’을 거부한다. 선교사의 아내로 안성맞춤의 자질을 가졌다며 청혼하는 세인트 존을 단호히 거절한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녹아 들어 자신의 삶이 없어지는 생활은 견딜 수가 없다. 제인은 동반자 ‘아내’와 아내 ‘노예’를 정확히 구별했기 때문이다. 그걸 가려내는 능력은 로체스터에게 받은 존중과 사랑 덕분이었다. 존중하는 사랑인지 착취를 가장한 사랑인지 구별할 수 없다면 <제인 에어>를 일독하시길 바란다. 사랑을, 남성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사랑으로만 알면 안된다.그게 노예를 길들이는 방법이었다.(실상, 보호받는 여성도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랑에 눈 멀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같다면 전복적인 제인을 만나야 한다.
PS.<제인에어>는 영화보다 책이 훨씬 재미있다. 영화는 밋밋하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밀고 당기는 흥미 진진한 연애가 영화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친절하고, 잘생기고, 지적이고, 높은 이상을 가졌지만 폭력적인 세인트 존의 모습은 책이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모름지기 세인트 존 같은 남자를 구별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