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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법정에 서다 -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
성낙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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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5)

 

제 반론(4)에 대한 답변(‘성낙주 선생님께 드립니다’)을 진작에 읽었습니다만, 반론이 아주 많이 늦어졌습니다. 붙잡고 있던 일도 있었지만, 이 진흙탕 싸움을 우려하시는 분들이 있어 주저한 탓입니다.

지금도 귀하와의 이 험악한 공방이 이 혼탁한 세상에 숨 쉬는 값이다’, 하고 접어 두고 싶은 맘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하의 여전한 음해성 주장을 곱씹으면서 침묵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

반복되는 말이지만 귀하는 남의 것을 가로채고서 시치미를 떼었다는 비판을 앞세운 다음, ‘근거없이 기존학계를 공격했다는 혐의를 저한테 씌웠습니다.

거기에 대해 저는 굳이 밝힐 의무가 없는 내용까지 공개하면서, 비록 어투는 격하지만 나름으로는 성의껏 해명했습니다. 저자로서 다른 독자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는 판단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 질 수 없는 발언을 귀하 스스로 통제하시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또 한 번 저를 엉터리 글쟁이로 덧칠하셨습니다.

 

실체적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화려한 수사로만 남을 설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닮은 건지는 두 책을 나란히 읽어보고 독자들이 직접 판단할 일입니다.”

 

강희정 교수님의 저서와 제 책을 어떡하든 엮기 위해 나온 말인데,

저에게는 귀하의 이런 막무가내 식 어법이 특별히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습니다. 지난 수십 년 간 원형논쟁의 현장에서 징그럽도록보아온 매우 익숙한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학계를 쥐락펴락하는 분들은 버젓한 자료들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존재 자체를 모른 척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과장과 축소, 오독과 표절, 심지어 조작 등 온갖 비윤리적인 방식을 동원해 1960년대 복원공사의 의의와 성과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은,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전형적인 혹세무인이었지요.

저는 그분들이 제기한 어떤 논점도 회피하지 않았으며, 아주 미미한 논점에도 꼭 실체적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모든 논점을 증거에 입각해 해석을 가함으로써 그분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에 차 있는지 빠짐없이 밝혀낸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바로 앞의 인용문이 말해주듯 제 작업을 시종일관 부정일변도로 평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기존학계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장난을 쳤는지, 또 저와 귀하 중에서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있는 그대로 규명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논점인 전실 전각(목조 전각)과 관련해 제가 제시한 핵심 증거 두 가지를 놓고 확인하겠습니다.

 

첫 번째 증거를 보겠습니다.

다 알듯이 석굴암 연구의 대가라는 분들은 전실 공간에 전각을 덮어 결로가 발생하는 등 석굴암이 위기에 빠졌다고 1960년대 공사 책임자인 황수영을 몰아세웠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다 젖혀두더라고, 현재 동국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 목조편액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주장이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모함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사진 1>) 거기에는 유실된 전각을 1891년에 울산병사 조순상의 주도로 중창한 사실이 상세하고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량식에서 부른 노동요까지 실려 있습니다. 전실 전각의 타당성 여부를 가릴, 문자 그대로 천금에 값하는 물증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이 결정적 물증을 어떻게 했습니까.

속이나 한 듯 상동문이라는 게 있긴 한데, ‘()구조에 관한 것뿐 목()구조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고들 정반대로 왜곡했습니다. 비판하는 제 낯이 뜨거울 정도인데, 눈앞에 뻔히 있는 데도 별 볼 일 없는, 시답잖은 것쯤으로 깎아내린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가공된 언사들을 혹자는 토씨만 바꾸어 베끼고, 혹자는 아예 외면해온 게 물경 반세기입니다.

이 부끄러운 사태의 전말은 이 책(pp.294298)에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귀하는 이것에 대해 반 마디의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불리한 자료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신 겁니다.

 

 <사진 1>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1891) 목조편액(이 책 p.295)

 

두 번째 증거는 더 기가 막힙니다.

남천우, 유홍준 교수 등은 전각 건립이 독재자 박정희의 뜻이었다면서 황수영을 곡학아세의 어용학자(御用學者)로 묘사했습니다. 전실 전각이 황수영과 박정희의 합작품이라는 논리인데, 이 역시 철저하게 가공돤 허구입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전각 신축을 포함해 1960년대 공사의 대강은 자유당 정권에서의 조사를 거쳐 민주당 정권 아래서 확정된 사안입니다.

 

 

<사진 2> 석굴암석굴의 현황과 보수대책()(문교부, 단기 4294. 2) 표지(이 책 p.233)

 

여기에도 부동의 물증이 있습니다. 석굴암석굴의 현황과 보수대책()이라는 제목의 누런 가리방본 책자가 그것입니다.(<사진 2>) 5.16.군사정변 석 달 전인 19612월에 당시 주무부처인 문교부에서 발간한 것인데, 전각 신축 등의 결정이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 남김없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의 실물 원본은 지난해 624일 기자간담회에서 공개한 바 있습니다.(http://news1.kr/articles/?1740672.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6/25/0200000000AKR20140625143800005.HTML?input=1179m.)

 

그러니까 5.16.정변이 일어나기 전, 또 황수영이 공사 책임자가 되기 전에 결정된 사항을 덮어씌웠던 것입니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의 현대판 사화라고 부름직한데, 후학(後學)이라는 이들이 속절없이 훼손되어가던 석굴암을 살려낸 선학(先學)을 민족 최고의 유산을 만고의 역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어디 석굴암만의 일입니까. 그분들은 황수영과 관계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지요. 예를 들어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임을 최초로 고증한 황수영과 신라오악조사단의 활동을 두고도 대국민사기극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저는 석굴암 원형논쟁을 순수한 학술논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학계의 패권주의 세력이 벌인 추한 전쟁, 학문을 빙자한 집단적 이지메라는 게 저의 추정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한 사람의 학자를 무리 지어 달려들어 그토록 오랫동안 유린한 까닭이 당최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 저는 논점마다 근거를 제시했고, 주류학자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귀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과 배경, 혹은 이 실체적 증거들을 건성으로라도 언급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대가라는 분들이 앞세운 증거라는 것들을 단 한 건이라도 검증한 적이 있으신지요?

귀하는 오직 근거가 없다고 저를 공격하셨을 뿐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또 강조해온 핵심 증거들은 용케도 피해가는 교묘한 글쓰기를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분들은 황수영을 매도하고, 귀하는 똑같은 수법으로 저를 깎아내리는 이중의 모략이 연출된 것입니다.

 

귀하는 또 이런 말씀도 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좀 더 확실한 근거를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근거는 자료만 나열한다고 성립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배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성립하는 것 아니겠습니까.……자료의 ''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의 '선택''해석'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해석도 할 줄 모르면서 자료나 잔뜩 쌓아놓고 자랑하는 속물(俗物), 자료를 ()’이 아닌 ()’으로 밀어붙이는 얼치기로 저를 치부하신 겁니다.

백보 양보해서 저는 구제불능의 속물이라고 칩시다. 하면, 원형논쟁과 관련해 저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주석을 달고 공개한 다른 연구자가 있습니까?

정확한 자료와 엄밀한 주석은 재야의 생존수칙입니다. 자료가 엉터리고, 주석이 엉망이라면 귀신도 모르게 수장되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요구합니다. 제가 어떤 자료를 어떻게 잘못 선택하고 잘못 해석했는지 적시해주십시오.

남사스런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여러 학회에서, 미술사와 관련해서는 그 흔한 석사과정조차 밟지 않은, 명백히 비전공자인 저에게 문호를 열었습니다. 논문도 발표하고, 토론도 하고, 심사도 합니다. 올 가을에는 국제학술회의에도 참가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근거도 없이 황당무계한 주장을 일삼아 왔다면, 관계자분들의 눈과 귀가 멀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더 이상 남의 노고를 헐뜯지 마십시오. 기본적인 자료조차 조사하지 않고, 식어빠진 자료를 두고두고 우려먹는 분들의 게으름이나 질타하십시오.

 

()

귀하의 첫 리뷰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생면부지의 귀하가 저를 향해 이토록 지독한 적의와 반감을 품게 된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 그 궁금증을 상당 부분 풀어주셨습니다.

 

선생님 논조에 따르면 미술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터무니없는 주장만 할 거라고 생각하니 관련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전공자도 아니면서 미술사학계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 자체가 참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속 학계의 민낯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 저의 죄목인 셈입니다.

물론 저는 미술사를 전공하는 분들모두를 싸잡아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원형논쟁을 앞에서 이끌어 진실을 호도해온 일부 대가라는 분들의 시시비비를 가렸을 뿐입니다. 그것도 그분들의 연구영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원형논쟁에 국한된 일입니다.

 

당연한 지적이지만, 그분들은 금단의 성역이 아닙니다. ‘극장의 우상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습니까. 기존의 권위에 안주하고 맹종하는 한 학문의 발전은 난망한 일입니다.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때 새로운 담론의 문이 열린다는 건 지성사의 법칙 아닙니까.

만약, 우리 학계의 메커니즘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그리하여 토함산의 현실에 눈감고 토목공사 자체가 불가한 황당한 주장들이 걸러졌다면, 저 같은 문외한이 주제넘게 나서는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없었을 것이고, 이 책도 당연히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이 책을 쓴 이유 중에는 소장연구자들이 하루 속히 권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 십 년째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음악만 틀어내고 있는 현재의 우리 석굴암학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법당의 지붕을 뜯어 내자거나 광창을 뚫어 놓자는, 또 샘물이 법당 밑으로 흘러가게 하자는 등 석굴암을 지상에서 영영 지워버리고도 남을 희론들이 천하의 탁견인 양 세상을 들썩이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귀하가 털어놓으셨으니, 이참에 저도 분명히 하겠습니다. 저는 이 책의 속표지 이면에 아예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석굴암을 사랑했으되 세상은 그의 정심(淨心)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동해의 소금안개와 토함산의 눈비, 진흙먼지로부터 석굴암을 구해냈지만, 세상은 그를 석굴암을 망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201121, 그가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황수영입니다. 이 책을 그의 영전에 바칩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을 쓴 목적 중에는 일군의 후학들에게 평생을 물어뜯기다가 유명을 달리한 불운한 선구자의 넋을 신원해드리려는 뜻도 있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하신다니, 여쭙겠습니다.

단 일순이라도 우리 미술사학의 개척자로서 그분의 학문, 그리고 그분의 잃어버린 삶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귀하의 어설픈 글이 혹시라도 구천을 떠도는 그분의 넋을 다시금 슬프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없으십니까.

지금의 학자들을 공격하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계속 저를 비판해 오셨는데, 바로 그분들이 선학의 등 뒤에 대고 온갖 조롱과 비난을 수십 년 동안이나 퍼부은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신 건 과연 공정한 일인가요.

 

  <사진 3> 표지 사진의 원본(박정훈)

 

이 책의 표지 사진을 보셨겠지요.(<사진 3>)  왜 석굴암 본존불의 정면 모습이 아닌, 하필 뒷모습 사진을 택했겠습니까. 부처님도 돌아앉을 정도의 추한 일들이 이 개명천지에 버젓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시비와 진위, 정사를 논파하는 공적인 분야입니다. 치기와 만용으로 하는 분야도 아니고, 자기만족이나 과시를 위한 분야도 아닙니다. 개인적 공명심이든, 혹은 소속집단에 대한 충성심이든 사()가 끼어들면 파사현정은 요원해집니다. 비뚤어진 자존심은 스스로를 해칠 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저에게는 현재 우리 학계의 몇몇 분들, 혹은 귀하의 자존심보다 그분의 명예가 더 무겁고 더 소중합니다. 그분의 명예가 옳게 회복될 때 공리공론에 빠진 오늘의 석굴암학이 실사구시의 정신을 되찾아 바로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밖에 이에 의하면부분, 강교수님 저술 관련 부분 등에서도 허망한 주장을 펼치셨으나 얽힌 일도 많고 분량도 너무 길어져 반론을 부득이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201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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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법정에 서다 -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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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4)

(저자 입장에서 자기 책의 서평란에 거친 글을 올리게 된 사정에 대해 다른 독자분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서평을 가장한 저열한 비방까지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은 반론(3)에 이어, 돌궐님제가 글로써 업을 쌓았습니다.”(이하 ”) 중의 2.부분에 관한 반론입니다.

 

 

저는 귀하의 리뷰가 통상적인 서평의 범주를 벗어난 음해'임을 여러 차례 지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당한 비판이었다는 입장을 고수하시면서, 저의 패착 한 가지--“식민사관문제, 뒤에서 다루겠습니다--만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억지주장과 성립불가의 논리로 시종하셨습니다.

이를테면, 2.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에는

(1737년 임필대의 글에서) 고개를 넘어가니 작은 암자가 나온다. 정오에 석굴을 보기 시작했다. 목조건물의 형체를 갖추지 않은 것으로 돌을 쌓아 굴을 이루었다.”라고 써서 역시 암자에서 석굴까지 얼마간 거리가 있었으며 그가 양자를 별개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에 의하면 석굴암 앞에 오늘날과 같은 목조가구는 없었고 굴은 노출되었던 상태라고 생각한다. (139)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글에서 강 교수는 임필대의 글에 따르면 당시에 석굴이 노출되었던 상태라고 본 것이지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실이 계속 노출된 상태라고 단정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선 왜 제가 밑줄 친 이에 의하면을 빼고 인용하셨는지요? 앞뒤 문맥 빼고 편의대로 인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용 중에서도 원문의 본의를 왜곡하는 잘못된 인용 방식입니다.

 

제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켰다면서 친절한 훈계까지 주신 겁니다.

귀하의 글만을 접한 분들로서는 저를 불신할 수밖에 없는데,과연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귀하가 문제 삼은 문장은 이 책의 본문 p.288.에 단 주()입니다. p.399.의 주 11)번인데, 첨부한 <사진 1>에서 보듯 정확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석굴암 앞에 오늘날과 같은 목조가구는 없었고 굴은 노출된 상태라고 생각한다.”(강희정, 나라의 정화(精華), 조선의 표상(表象), 서강대출판부, 2012, p.139)  

  

 

 

 

                <사진 1> 석굴암, 법정에 서다(불광, 2014, p.399)

 

빼든 넣든 달라질 게 없거니와, 이 다섯 글자가 귀하가 구입한 책에만 빠져 있다는 말씀인지요? 이번에도 실수라고 발뺌하실지 모르나, 귀하의 서평이 모략이라는 저의 비판을 스스로 입증하신 셈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귀하는 강교수님의 연구 성과에 빚을 지고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고 줄곧 저를 공박하셨습니다. 심지어 ‘거두는 글에서 강교수님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 것을 두고도, 왜 앞머리에 싣지 않았느냐는 시비를 위한 시비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도 첫 문장부터 강교수님과 저의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전제 아래, 그분의 저서에 나오는 대목을 장황하게 나열한 후 다음처럼 결론지으셨습니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저는

두 분의 저서가 석굴암에 관한 일제시대의 식민사관을 다루고 있으며 이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까지도 유사하므로 둘 중에서 뒤에 출판된 선생님의 저서에서는 반드시 선행 연구를 언급하고 넘어가야 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께는 그렇게도 모욕적 발언이 되는 건가요? 선생님 연구의 독자성을 음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선행 연구를 인용한다고 해서 후행 연구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절한 안내에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간단한 질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말자고 해야, 다른 것이 되는지요? 식민사관을 청산하자는 책들은 모두 유사한 것인지요? 유치한 비유지만 이빨과 발톱이 있고 네 다리가 있으니 강아지와 고양이가 같다는 주장과, 귀하의 주장이 어떻게 다른지 저로서는 이해불가입니다.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첫째, 귀하가 뽑아낸 대목들은 발가락이 닮았다는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수백 쪽이 넘는, 시대가 절반쯤 겹치는 두 책에서 일부 같은 단어나 비슷한 진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전체로 확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궤변이자 왜곡입니다. 특히, 미술사를 전공하신다시니 여쭙겠습니다. 같은 불상이니까 석굴암 본존불, 도다이지(동대사) 대불, 라호르박물관의 싯다르타고행상이 유사하다고 판단하시는지요? 산치대탑이든 미륵사지석탑이든 불국사다보탑이든 지표에서 하늘로 솟았다고 모두 유사한 것인지요?

  

둘째, 양쪽의 본질적인 차이를 외면하셨습니다.

이 책의 큰 주제는 석굴암원형논쟁이고, 주요 비판대상은 이태녕, 남천우, 유홍준, 강우방, 신영훈, 최완수, 문명대 선생 등 우리 학계의 거대권력입니다. 그리고 2차 주제는 개방구조설, 광창설, 홍예석 철거설 등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동짓날의 동해일출신화입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과는 무관하게, 일제의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 신앙을 배경으로 탄생한 사실을 추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해방 70년이 되도록 저들이 만들어낸달콤한 햇살이야기에 취해 법당의 지붕을 뜯어내자는 망견에 빠진 바로 우리 모두가 이 책의 궁극적인 비판대상입니다.

그렇다면 강교수님의 저서는 원형논쟁을 중심에 놓고 주류학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강교수님은, ‘원형논쟁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주제--일본 학자들이 조선미술사를 구축하는 과정에 석굴암이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정착되는 경위--를 천착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석굴암 담론의 의제를 확장하신 것으로 제가 높이 평가하는 부분인데, 다만 앞의 전실전각 문제에서 보듯 아주 아주 일부나마 주류학계의 주장에 함께 하신 것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셋째, 귀하의 논리적 모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하는 첫 번째 리뷰에서 목조전실의, 목조전실에 의한, 목조전실을 위한 책"이라고 단정지으셨습니다. 이 책의 핵심 논점으로 전실 전각을 꼽으신 겁니다. 그런데 제가 정작 강교수님은 저와 달리 전실 전각을 부정하셨다고 이 글 앞머리의 주() 문장을 증거로 제시하자, 이번 2.에서는 강교수님의 저서에서 전실 전각은 매우 지엽적인 사항”,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하셨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논점이 강교수님의 저서에서는 별 게 못 된다는 주장을 펴신 겁니다. 그렇다면  양쪽이 다르다고 인정하시지는 못할 망정 끝끝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건 무슨 논리인지요? 문자 그대로 자가당착 아닌가요?

그런가 하면, 귀하는 뻔한 일반론까지 끌어들였습니다. 2011년에 학술지(<미술사와 미술시각문화>)에 처음 발표된 것으로 소개하면서 석굴암을 예불공간이라는 취지의 강교수님의 글을 인용한 후 또 다시 저를 옭아매셨습니다.

 

이 부분은 그대로 선생님 저서로 옮겨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문장입니다. 선생님 역시 저서에서 석굴암의 예불과 참배 기능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듭 여쭙겠습니다

예불공간이라는 것이 무슨 특별하고도 대단한 학설이라도 되나요. 강교수님이  특별히 강조하신 이유와 배경은 십분 공감하지만그냥 상식아닌가요. 석굴암을 망친 원흉으로 내몰린 고 황수영 박사가 수십 수백 번도 더 강조했고, 1969년 남천우 교수와의 논쟁 때 문명대, 신영훈 선생도 누차 지적한 부분입니다. 저 역시 1998석굴암을 위한 변명-문화권력 유홍준의 지적타락(인물과 사상7)에서 그분들의 주장을 빌려 그 점을 상기하라고 주류학계에 요구한 적이 있었고요.

사정이 이렇다면, 강교수님이 그분들이나 저의 글을 훔친 것으로 봐야 하나요.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길어졌지만 방향을 바꿔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2009년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있었던 사진전 석굴암 백년의 빛에 오신 적이 있으신지요? 관람을 오셨다면, 지금과 같은 허무맹랑한 주장은 못하실 터인데, 석굴암 관련 단일 사진전으로는 최초이자 최대 규모였습니다. 경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성균관대 및 서울대박물관 등과 원로사진작가인 김한용, 안장헌 선생님과 박정훈 선생 등께서 유물과 작품을 출품해주셨고, 저는 20여 년간 수집해 온 천여 점의 각종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헌데사진전의 주제가 이 책과 대동소이합니다. 언론 보도를 검색하시거나 도록 석굴암 백년의 빛(동국대출판부)을 확인해 보십시오.

저는 사진전 성사를 위해 동국대출판부와 수년 동안 논의를 계속해 왔고, 2009년 봄에 전시기획사 및 불교중앙박물관과 계약을 완료했습니다.(계약서라도 공개할까요?) 요컨대 그때 사진전은 강교수님의 첫 논고가 나온 20077월 훨씬 전부터 준비해 온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사진전이 몇 달 만에 뚝딱 진행될 수 없다는 점은 귀하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설마 어느 날 우연히 논문 한 편을 접하고 불현듯 , 사진전을 열어야겠구나!’하고 그때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도록의 원고를 작성했다고는 생각지 않으시겠지요.

 

곁들여서 말씀드리면, 이 책은 원래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 포항MBC와 손잡고 만든 다큐멘터리 경술국치 백년, 석굴암 백년의 진실방영과 동시에 펴낼 계획이었습니다. 원고지 1200매 분량인데, 당시 출판사로 보낸 원본 파일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주제가 원형논쟁이고, 1960년대 복원공사에 대한 재평가가 중심이슈이므로, 196471일 준공 50주년에 맞추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늦추었고, 지난해인 201471일 직전에 출간한 것입니다.

(그때 원고는 제 블로그에 20101226일부터 분재를 시작해 2011223일에 마무리 지었다고 앞의 반론에서 밝힌 바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식민사관이라는 단어 문제에 대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저는 반론(1)’에서 강교수님의 저서에, “일출신화이니 햇살담론, 혹은 아마테라스 오미가미, 그리고 식민사관 같은 어휘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습니다.”고 썼습니다.

이에 귀하는 그중에서 식민사관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문장들을 열거하면서, “제게 책을 제대로 안 읽고 왜곡을 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왜곡하고 있는 분은 오히려 선생님 아닌가요?”라고 뼈아픈 반문을 주셨습니다.

아울러 발췌해서 읽은 게 아니냐는 핀잔도 주셨는데, 맞는 지적입니다. 구입 당시에는 읽었지만, 반론을 쓰면서는 색인도 확인 않고 나올 법한 대목만을 훑어보고 서둘러 결론을 내렸으니 무슨 변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만큼 이 부분은 저 자신에게도 모욕이자 오점입니다. 저를 위해서도 귀하를 위해서도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 될 패착이었습니다. 제 반론의 진정성을 해치고 귀하에게는 반박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여기까지의 제 논지까지 부인하시지는 않기 바랍니다.

아무튼 앞으로는 더 살피고, 더 정확을 기해 허술하지 않은 반론이 되도록 거울로 삼겠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학문연구에서 텍스트, 혹은 사물 간의 유사성을 밝히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차이점이나 차별성, 혹은 독창성이나 독자성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분별해내는 일입니다. 어느 쪽이든 소홀히 하면 학문은 변화도 발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앞의 반론들에서도 밝혔듯이, 본인과 강교수님의 작업은 일부 시대가 겹치긴 하지만 나름의 지향점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제며 내용이 판이한, 석굴암 담론의 지형도 속에서 상보관계에 있는 작업들이라고 해야 객관적 사실에 부합한 평가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터럭 하나만 같아도 전체가 같다는 식의 주장은 저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일 뿐 아니라 학문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접근입니다.누가 됐든 남의 노고에 경의는 표하지 뭇할 망정 함부로 죽이지는 마십시요. 한쪽 눈을 감고 남을 포폄하는 것은 글쓰기의 가장 큰 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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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법정에 서다 -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
성낙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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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3)

 

돌궐님의 <제가 글로써 업을 쌓았습니다>(마이페이퍼. 1/6)의 존재를 뒤늦게 알았습니다. 일찍 발견했다면, 반론(2)’(1/11)의 내용이 많이 달라졌을 터인데, 혼선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각설하고, 귀하가 붙인 번호에 따라 차례로 제 생각을 정리하겠습니다. 분량 문제가 있어 ‘1.’ 부분에 대해서만 먼저 올리겠습니다.

 

<‘논거 부족’? 등의 문제>

귀하는 시종 제가 공연히 기존학계를 공박했다는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이번 글에서도 어김없이 기존 학설에 대한 선생님의 불공정한 평가(축소·과장의 두 측면에서)가 그 어떠한 검증도 없이 독단적으로 개진되었다면서, “억측과 논리적 비약, 그리고 논거의 부족등을 강조하셨습니다. 단지 그 점에 항의하고 지적했을 뿐이라는 합리화의 말씀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들 하지요. 아무리 익명이라지만, 몇 페이지만 넘겨도 금방 진위가 드러날 발언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던지는 귀하의 용기가 부럽다고 해야 할까요.

첫 문장에서 불공정한 평가라고 단정하셨습니다.

공정성 문제라면 친소에 따라 잣대가 굴절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소설쟁이에다 비전공자인 저를 학계로 이끌어주신, 문자 그대로 은인이라 할 고 장충식 교수님까지 비판했습니다.(p.257) 석굴암을 샘물 위에 지었다는 낭설에 신비주의적인 해석을 가해 기정사실화하는 데 일조하신 때문입니다. 결초보은은 못할망정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 겁니다.

특히 논거가 부족하다시니 그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연말에 과분한 상 하나가 이 책에 주어졌습니다. 심사단은 석굴암 원형논쟁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세우면서 정확한 전거를 담아 문제점을 서술했다.”는 평을 내렸습니다. 이 책의 장점으로 무엇보다 근거자료의 충실을 꼽은 것입니다. 설마 심사위원들이 논거가 엉망이고 억측과 비약으로 가득 찬데도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이밖에 수십 군데 언론의 서평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사정이 이럴진대 유독 귀하만이 전거 부족 운운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책을 포함해 그동안 제가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순전히 비약과 억측으로 기존학계를 공박해 왔다면, 아마도 지금쯤 누추한 제 이름 석 자조차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방향을 바꿔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귀하가 저에게 씌운 혐의들은 주류학계한테 어울리지 않나요? 지난 수십 년간 원형논쟁을 이끌어온, 지금은 우리 문화학술계에 거대권력으로 군림 중인 소위 대가라는 분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분들이야말로, 불리한 자료는 감추고 증거능력이 의심스러운 자료들을 앞세워 비바람에 깎이고 폭설과 영하의 날씨에 얼어터지던 석굴암을 되살려낸 1960년대 복원공사의 성과를 부인해 왔지요. 자료 발굴에 힘쓰기는커녕 3년 묵은 노루뼈 우려먹는다는 말처럼 똑같은 자료를 재탕, 삼탕해 왔다고 해도 별반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멀쩡한 미술사학계의 선학 한 분이 학자로서의 생명이 끊기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학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제물로 삼았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정황이 계속된 겁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주류학계의 그런 독단적행태를 정면에서 다루었습니다. 달걀로 바위치기가 될지 모르지만,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먼 황당한 가설들로 인해 한껏 신비화된 석굴암을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역사와 현실 속으로 되찾아오기 위한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저는 그들의 논거와 논리를 치사할정도로 파헤쳤고, 거기에 합당한 자료와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신라 적부터 21세기 초까지의 사서, 지리지, 답사기, 지도, 산수화, 현판, 논문, 수필, 교과서, 신문기사, 사진, 통계, 도면, 도표, 입장권, 엽서, 관광 직인, 그래픽, 포스터, 다큐멘터리 등 종류를 불문한 자료가 망라되었습니다. 하다못해 신라향가부터 경주지역의 지명과 산명, 유적명 등까지 뒤졌으며, 초등학교 자연학습자료까지 실었습니다.(p.258) 물론 다수는 처음 소개되거나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것들입니다.

그만큼 이 책은 자료가 넘쳐서 탈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귀하의 눈에만 안 보인다니, ‘원형논쟁과 관련해 혹여 이 책의 절반만큼이라도 자료를 발굴하고 인용하고 낱낱이 주석을 붙인 저술이 또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리합니다. 귀하가 아무리 부정해도 이 책에 실린 자료들은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10년 뒤든 100년 뒤든 혹여 단 한 분의 독자라도 들춰본다면, 그때도 변함없이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까지의 50년 동안 우리 지식시장의 초라한 자화상을 증언할 것입니다.

 

<이른바 조작혹은 논점 일탈’? 문제>

귀하는, “정제된 표현을 쓰지 못한 점을 인정하면서 죄송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돌연 저의 문제 제기 방식이 조작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앞뒤의 문맥들은 생략한 채 선생님께서 불편하셨던 문장만 뽑아서 나열하신 것은 상당히 정치적이며 논점의 핵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조작입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것도 같지만, 초점 흐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쭙겠습니다. 반론을 작성하면서 동의할 수 없는 문단이나 대목을 예시하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이고, “조작이 되는지요? 그러지 않고 누군가의 글을 비판하거나 시비를 가릴 방법이 달리 있습니까?

발췌 자체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발췌된 부분이 핵심이냐, 지엽이냐의 여부입니다. 핵심은 젖혀놓은 채 지엽적인 부분만을 놓고 논박한다면 그때는 치졸한 왜곡 내지 조작의 혐의를 둘 수도 있겠지요.

물론 제가 예시한 부분들은,(뒤에 다시 나오지만) 핵심에 해당하는 것들의 일부입니다.

똑같은 맥락에서, 귀하는 또 이렇게도 반박하셨습니다.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던 주요 논점들은 그저 귀하의 주관적 판단이자 소신의 영역이므로, 저자로서 아쉽긴 해도 존중해 드릴 부분’(제안글)이라며 넘어가시고, 논점들과는 별 상관도 없는 표현의 문제들만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내용을 얘기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제 글의 어투를 문제 삼은 것이죠. 이것은 명백한 논점일탈입니다.”

 

본체는 놔두고 곁가지나 가지고 분란을 일으켰다는 취지입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을 단지 표현(어투)의 문제로 축소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를 별것 아닌 것에 소동을 부리는 소아적 인간으로 인상 지우셨습니다.

이 역시 앞의 논법과 유사한 초점 흐리기의 일종입니다.

귀하의 리뷰는 서평(書評)입니다. 서평이라면 특정 책의 가치, 혹은 성패를 평가하는 글이겠지요. , 평가가 서평의 핵심이자 본질입니다. 그런데 제가 예로 든 대목들은 귀하가 진짜말하고자 하는 평가입니다.

한 가지만 다시 보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논거로 이처럼 단언을 한단 말인가. 남이 틀리면 자기는 다 맞은 건가? 남이 틀린 이유와 자기가 맞는 이유는 서로 다른 문제다. 아수라가 제자리에 없었다면 저자의 주장에 근본적인 문제가 생기므로 이렇게 우기는 것 같은데, 제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달라. 근거가 없으면 아무 말을 말자. 그게 지식인의 올바른 태도이다.”

 

이런 부분들이 어찌 단순한 표현이겠습니까. 이 주장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서평의 핵심인 평가 그대로입니다. 이것들을 단순한 표현이라고 우기신다면, 귀하는 서평을 쓴 게 아니라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핵심인 평가가 빠진 글을 서평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원론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이라는 것에서 이건 내용이고, 이건 표현이다, 하고 칼로 무 자르듯 나누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시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예외가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내용과 표현이 얼추 함께 가는 것 아닌가요?

정리하겠습니다. 제 반론들의 논점은 귀하의 리뷰에 나타난 평가(내용)의 타당성 여부입니다. 표현(어투)는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존중해 주겠다는 것(“주요 논점”)은 뭐냐, 하실 수도 있습니다. 노파심에서 그 문제도 명확히 해두고자 합니다.

다음은, 저의 <돌궐님께 드리는 제언>의 관련 부분입니다.

 

귀하는 첫 번째 글인 마이리뷰(8/9)에서 이 책의 내용 전반을 대체로 부정하셨습니다. 기존학계의 시각과 거의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의 논점들에 반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귀하의 주관적 판단이자 소신의 영역이므로, 저자로서 아쉽긴 해도 존중해 드릴 부분입니다.

 

여기서 이 책의 논점들이란 더도 덜도 아닌 주류학계의 통설들에 대한 저의 견해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개방구조설, 절곡설 등에 맞서 전실전각은 종교성전의 절대적인 요구이고, 전실은 지금처럼 신중 두 상을 펼쳐놓는 게 타당하다는 것 등이 이 책의 주된 논점들입니다.(동해일출신화가 일제의 달콤한 문화식민이데올로기의 변종이라는 것도 이 책의 중심 논점이나 귀하가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았으므로 생략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것들에 반대하는 것 자체는 귀하의 자유이므로 존중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뿐입니다. 침몰하는 배에 올라타겠다는 걸 남이 뭐라겠습니까. 다만, 반대하는 건 좋으나, 남의 것을 가로챘다느니 논거가 부족하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비방과 야유는 삼가라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제 반론들의 논점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책의 논점들과 제 반론들의 논점은 별개입니다.

저는 (A)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귀하는 (B)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논점이라는 단어를 뒤섞는 방식으로 제 반론의 초점을 흐리는, 귀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조작을 감행하신 겁니다. 따라서 논점일탈이라는 말은 귀하에게 돌려드립니다.

 

다음은 인터넷에 떠도는 <서평을 쓸 때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일>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서평의 본분인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책의 저자가 의도하는 바와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서평에서 책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인 인상이나 기호에 그쳐서는 안 되며, 그 평가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평가는 책의 분석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므로, 책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동일한 기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한 번쯤 돌아보실 대목이 없으신가요?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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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법정에 서다 -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
성낙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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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라는 이가 자기 책의 서평란에 ㅇ런 치졸한 글을 올리게 된 불가피한 사정에 대해 다른 독자분들의 해량을 바랍니다. 서평을 가장한 악의적인 모략을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제목 아래, ‘chakraba’를 누르시면 저자의 입장’, 두 번째 제언등에서 그 간의 경위을 아실 수 있습니다.)

 

돌궐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2) :

-강희정 교수의 논문 문제()-

 

 

누차 밝혔듯이, 저의 작업과 강교수의 작업은 각자 독자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으며, 따라서 저에게는 강교수의 작업을 거론할 어떤 윤리적 의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수십 년째 원형논쟁에 발목이 묶여 지지부진한 우리 학계의 정체된 풍토에서 나온 강교수의 작업을 신선한 시도로 여겨왔고,(강교수의 논문 발표 때 지정토론자로 참여해 그 점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음을 저자의 입장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거두는 글에서, 기존학계의 맹성을 촉구하는 뜻에서 강교수의 작업을 지난 50년간 나온 거의 유일한 성과로 특별하게소개했던 것입니다.

번거롭지만 이 란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다시 옮깁니다.

 

이 세 가지 관점(설명 생략)을 포함해 새로운 의제 설정에 나선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석굴암 담론은 한결 더 풍성한 계절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 한 예로서 덧붙여 특기할 것이 있다. 그동안 소장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 책의 주요 논제이기도 한 석굴암과 우리 근대사와의 관계를 추적해온 사실이다. 강희정의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서강대출판부, 2012)은 그러한 작업의 1단계 결실이라고 이를 만한데, 원형논쟁에서 몇 걸음 비켜나 석굴암을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 온 것이다.”(이 책, p.386)

 

하지만 돌궐님은 리뷰’(8/7)에 이어 댓글’(9/21)에서도, 저의 이 선의(善意)’마저 꼼수를 부린 것으로 거듭 몰아갔고, 심지어는 그 위치를 놓고도 트집을 잡았습니다.

 

강희정 선생의 연구와 성낙주 선생님의 연구가 <일제가 바라본 석굴암>이라는 거의 똑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는 석굴암, 법정에 서다서두 부분에서 강 선생의 글들은 기존의 주요 연구 성과로 반드시 언급되고 넘어갔어야 합니다. 책의 말미에서 잠깐 언급되고 말 정도의 논문이었다면 차라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분의 글들 사이의 영향 관계 여부와 관계가 없는, 학술적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입니다.”

 

이야말로 귀하가 리뷰를 작성한 의도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인데, 돌궐님께 여쭙겠습니다.

무릇 글쓰기에서 제3자의 작업을 소개할 때 서부 부분반드시언급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서두에 쓰면 학술적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에 부합하고, “말미에 쓰면 어긋나는 것입니까?

정리합니다. 쓰든 안 쓰든, 앞에 쓰든 뒤에 쓰든, 그건 저자의 맘이며 저자의 재량입니다. 귀하가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며, 조롱하거나 비난할 사항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고 귀하의 눈에는, 강교수의 작업에 대한 위의 제 진술이 잠깐 언급되고만 정도로 보이십니까. 저로서는, 굳이 소개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극찬을 보낸 것입니다. 남의 선의(善意)’악의(惡意)’로 비틀지 마십시오. 귀하의 아집에 찬 비판이 혹여 강교수에게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이왕 학술적인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를 강조하셨으니 덧붙입니다.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귀하는 리뷰에서 2007년에 첫 논고가 나온 강교수의 작업을 “90년대 말부터라고 기술하여 저를 남이 오랫동안 애써 이룩한 성과를 가로챈 부도덕한 인물로 매도하였습니다.

여쭙겠습니다.

상대방의 명예에 치명적인, 3자의 연구 성과를 가로챘다는 도적적 파산선고를 내리면서 그 근거로 내세운 자료의 연대조차 확인하지 않은 것은 학술적인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를 지킨 것입니까.

귀하는, 연대 문제에 대한 저의 지적에 댓글’(9/21)에서 일단 실수라고 물러섰지만, 귀하 스스로 그토록 혁신적”, “획기적이라고 평가하고 인상 깊게 읽은 논문이 나온 시점을 착각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합니다. 귀하는 댓글에서 또한,

 

“1999년에 인물과 사상에 쓰신 강우방 관장은 석굴암의 현실을 직시하라라는 글에서 선생님께서는 이미 햇살 콤플렉스라는 낱말을 쓰셨기 때문에 석굴암의 햇살신화라는 관점은 이 때 시작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햇살 콤플렉스라는 낱말은 강우방 관장은……」(1999)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닙니다. 그 말은, 그 전해인 19985월 발간된 인물과 사상7권의 <석굴암을 위한 변명- 문화권략 유홍준의 지적 타락>에서, 우리 학계에 팽배한 석굴암 본존불과 관련된 동해일출신화가 과도한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햇살 콤플렉스의 산물이라고 최초로 사용한 것입니다.

(1998년 당시까지 저는 동해 일출 이야기를 낭만적인 상상력의 소산으로 보았지만, 이후 그것이 일제의 달콤한 문화식민사관의 변종종임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 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귀하도 잘 알 것입니다)

 

귀하의 글에 이런 경우가 한둘이 아닌데, 정리하겠습니다.

그동안 원형논쟁을 이끌어온 기존학계를 대변하는 건 귀하의 자유지만, 글을 쓸 때는, 특히 남을 비판할 때는 최소한 근거 자료의 연대만큼은 정확을 기해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학술적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를 지키는 첫걸음 아니겠습니까.

 

2015. 1. 11.

 

성낙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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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1-11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돌궐님 글을 읽다가 선생님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지금 두번째 다시 읽고 있습니다.) 학문적 판단은 제가 할 수준이 아니나 석굴암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을 느꼈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논쟁이 잘 진해되고 마무리되어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 가기를 바랍니다. 두분글에서조금 안타까와지는 모습이 보이네요 / 전실은 있었을 것 같고 광창은 없었을것 같은데 ˝햇살˝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동지라는게 계속 걸리네요.

성낙주 2015-01-1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끄럽습니다. 글을 올릴 때마다 주저하고 고민합니다. 어렵게 주신 고언의 말씀 새기고 또 새기겠습니다. 앞으로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자극적인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겠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 진흙탕 싸음으로 번지는 게 통례라, 논쟁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였다는 점만은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햇살` 문제에 관해서는 제 책에서 제기한 견해가 현재 제가 생각하는 전부입니다. 장차 더 좋은 자료가 있으면, 제 블러그에라도 공개하겠습니다.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성낙주 올림

돌궐 2015-01-1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께서 앞서 주셨던 글에 대한 제 의견은 너무 길어져서 따로 페이퍼로 작성했습니다.
http://blog.aladin.co.kr/dolkwol/7319984 (1월 6일에 올렸습니다)

이 글에 대한 제 의견은 따로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석굴암, 법정에 서다 -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
성낙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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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라는 이가 자기 책의 서평란에 거친 글을 올리게 된 불가피한 사정에 대해 다른 독자분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돌궐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1)

    -강희정 교수의 논문 문제()

 

 

귀하의 리뷰’(8/9)는 저에 대한 도덕적 파산선고로 시작됩니다.

 

글쓴이가 전개하는 주장의 기본 아이디어가 근래에 강희정이 발표한 몇몇 석굴암 재발견연구에 힘입고 있음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잠깐 소개할 뿐이다. 물론 이 경우도 강희정 연구의 내용과 이 책에 끼친 영향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2부 앞머리에서도 ‘90년대 말부터계속되어 온 강교수의 작업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같은 비판을 반복합니다. 요컨대 제가, 강교수가 아주 오래 전부터 공들여온 작업을 통째로 베껴먹고도 마지못해 뒷쪽에 요식적으로 밝혔다는 투입니다.

양쪽 작업을 모르는 이들은 그런 사정이 있었어? 하고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데, 결코 정당한 비판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1.

귀하의 비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일단 양측의 기본 아이디어가 같아야 합니다.

먼저 제 책을 관통하는 기본 아이디어, 지난 1세기 동안 우리를 매혹시킨 소위 햇살 담론’, 곧 동해의 아침 햇살이 본존불 이마의 백호를 비춘다는 등의 환상적인 이야기가 일본 고래의 태양숭배사상(아마테라스 오미가미 신앙)에서 비롯된 저들의 달콤한 문화식민사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학계의 주류가 이른바 원형논쟁과정에서 확대재생산해 석굴암의 실체적 진실을 오도해 왔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동지 일출 지점 문제, 부다가야 대탑 문제 등을 들고 나와 전실전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든가, 혹은 주실 돔 지붕 앞쪽에 광창이 있었다든가, 혹은 주실 입구 쌍석주 위의 홍예석을 철거하라는 등의 주장들이 대표적입니다.

저는 그런 주장들을 햇살담론에 매몰된 반종교적이며, 비학문적인 망견으로 비판했는데, 다음은 이 책의 1부와 2부 목차입니다.

 

1부 햇살 신화

1 동해의 아침 햇살

2 달을 품어 안은 산

3 햇살 신화의 탄생

4 기억의 집단화

5 인도 부다가야대탑의 주불

6 햇살 신화의 사생아, 광창

7 석굴암 건축의 꽃, 홍예석

8 석굴암은 석굴사원이다

 

2부 석굴암의 20세기

1 구한말의 석굴암

2 총독부의 개축공사

3 총독부 공사의 명암

4 박제된 고대유적

5 문화재관리국의 복원공사

6 원형논쟁의 점화

7 원형과 개방구조

8 원형논쟁과 학문윤리

9 오독의 예들

10 철거지상주의

11 희생양 메커니즘

 

반면, 강교수는 저와 비슷한 주장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 강교수는 근대에 접어들어 석굴암이 조선민족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출신화이니 햇살담론, 혹은 아마테라스 오미가미, 그리고 식민사관 같은 어휘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교수가 2007년 이래의 작업을 갈무리한 <나라의 표상, 조선의 정화>의 목차를 보면 확연한 일입니다.

 

1장 석굴암의 근대

 

2장 일제의 조선 고적조사와 석굴암의 '재발견'

1. 문명과 야만: 일제 조선 고적조사의 배경

2. 조선 고적조사와 조선미술사의 구축

3. 석굴암의 근대적 재발견

 

3장 석굴암, 나라의 정화(精華): 발견에서 복원으로, 복원에서 신화로

 

1. 석굴암과 조선 불교유적의 복원과 평가

2. 세키노의 조선미술사와 석굴암,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3. 조선 후기의 석굴암과 석굴사원으로서의 석굴암

4. 석굴사원 개념의 도입과 석굴암 '재발견'의 세계사적 의의

5. '석굴 패러다임'의 성립과 그 의미

 

4장 조선의 표상(表象): 석굴암의 공론화

1. 야나기 무네요시의 석굴암론: 석굴암 인식론의 기초

2. 1920년대의 석굴암론: 과거의 영광, 영화로운 유산

3. 1920년대의 석굴암론: 세계의 자랑, 민족의 영예

 

5장 다시 고대로 돌아가서: 의례도량으로서의 석굴암

 

정리하면, 학계를 넘어 일반에까지 학문적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햇살담론이 일제의 아마테라스 오미가미 신앙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저만의 독창적인 해석, 곧 누구한테도 빚을 지지 않은 온전히 저의 아이디어입니다.

 

2.

저의 이 책이 강교수의 작업에 빚을 지고 있다는 귀하의 주장을 확대하면, 두 사람의 논지 가운데 어느 정도는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발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의 핵심 제재는 문화재관리국의 1960년대 석굴암 복원공사입니다. 당시 공사에 대해 부실졸속공사라는 것이 주류학계의 입장이나, 저는 일제의 전리품으로 전락해 있던 석굴암을 비로소 종교성전의 정체성과 기능을 회복시킨,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대광정의 기록으로 재평가한 것입니다.

그 중심에 전실전각 문제가 있습니다. 주류학계는 원래부터 전각이 없었다는 쪽이나 저는 전각은 당연히 있었으며, 있어야 한다는 점을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마침 귀하는 리뷰의 첫 문장에서 이 책의 전체 주제를 다음처럼 규정했습니다.

 

목조전실의, 목조전실에 의한, 목조전실을 위한 책이라고 할까. 모든 논리는 목조전실의 정당성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강교수도 목조전실에 관해 저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가까운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강교수는 기존학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석굴암 앞에 오늘날과 같은 목조가구는 없었고 굴은 노출된 상태라고 생각한다.”(강희정, 나라의 정화(精華), 조선의 표상(表象), 서강대출판부, 2012, p.139)

 

소위 개방구조설에 지지를 표하신 셈인데, 이 문장은 이 책의 주()(p.399)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저와 강교수는, 원형논쟁의 가장 큰 쟁점인 전실전각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상반됩니다.

 

3.

저는 저자의 입장’(8/25)에서,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사적인 뒷이야기까지 소상하게 밝혀 귀하의 비판이 학계의 동향을 헤아리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거기에 붙인 댓글’(9/21)에서 저의 고유한 작업을 여전히 강교수에 옭아맸습니다.

 

선생님께서 강희정 교수님의 연구 주제와 내용이 선생님의 연구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점은 동의하기 힘듭니다. 다루는 내용과 표현, 방법에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석굴암에 반영된 식민사관을 연구하는 기본적 접근 방향은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 접근 방향은 다르지 않다?

일제 때의 석굴암을 다루면, 누가 무슨 내용을 어떻게 썼든 모두 기본적 접근 방향이 같은 것이고, '기본 아이디어'를 베낀 것입니까?

유치한 예를 들겠습니다. 6.25남북전쟁을 연구테마로 잡으면 내용이 아무리 판이해도 기본 아이디어도 같고, “기본적 접근 방향도 동일한 것입니까?

 

일차 결론을 맺겠습니다.

강교수와 저의 작업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며, 귀하가 저를 향해 던진 조롱조의 비판은 모략, 악의적인 음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귀하는 강교수의 논저도 제 책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혹 읽었다면 고의로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용도 다르고 논지가 다른 책들을 놓고 영향 운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이러한 지적이 부당하다면,

동의하기 힘들다.”, 혹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는 식의 막연한 추정으로 얼버무리지 말고 두 책에서 어떤 부분이 어떻게 같은지 구체적인 대목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명쾌하게 입증해주기 바랍니다.

 

2014. 11. 29.

 

성낙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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