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법정에 서다 -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서
성낙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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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라는 이가 자기 책의 서평란에 ㅇ런 치졸한 글을 올리게 된 불가피한 사정에 대해 다른 독자분들의 해량을 바랍니다. 서평을 가장한 악의적인 모략을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제목 아래, ‘chakraba’를 누르시면 저자의 입장’, 두 번째 제언등에서 그 간의 경위을 아실 수 있습니다.)

 

돌궐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2) :

-강희정 교수의 논문 문제()-

 

 

누차 밝혔듯이, 저의 작업과 강교수의 작업은 각자 독자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으며, 따라서 저에게는 강교수의 작업을 거론할 어떤 윤리적 의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수십 년째 원형논쟁에 발목이 묶여 지지부진한 우리 학계의 정체된 풍토에서 나온 강교수의 작업을 신선한 시도로 여겨왔고,(강교수의 논문 발표 때 지정토론자로 참여해 그 점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음을 저자의 입장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거두는 글에서, 기존학계의 맹성을 촉구하는 뜻에서 강교수의 작업을 지난 50년간 나온 거의 유일한 성과로 특별하게소개했던 것입니다.

번거롭지만 이 란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다시 옮깁니다.

 

이 세 가지 관점(설명 생략)을 포함해 새로운 의제 설정에 나선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석굴암 담론은 한결 더 풍성한 계절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 한 예로서 덧붙여 특기할 것이 있다. 그동안 소장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 책의 주요 논제이기도 한 석굴암과 우리 근대사와의 관계를 추적해온 사실이다. 강희정의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서강대출판부, 2012)은 그러한 작업의 1단계 결실이라고 이를 만한데, 원형논쟁에서 몇 걸음 비켜나 석굴암을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 온 것이다.”(이 책, p.386)

 

하지만 돌궐님은 리뷰’(8/7)에 이어 댓글’(9/21)에서도, 저의 이 선의(善意)’마저 꼼수를 부린 것으로 거듭 몰아갔고, 심지어는 그 위치를 놓고도 트집을 잡았습니다.

 

강희정 선생의 연구와 성낙주 선생님의 연구가 <일제가 바라본 석굴암>이라는 거의 똑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는 석굴암, 법정에 서다서두 부분에서 강 선생의 글들은 기존의 주요 연구 성과로 반드시 언급되고 넘어갔어야 합니다. 책의 말미에서 잠깐 언급되고 말 정도의 논문이었다면 차라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분의 글들 사이의 영향 관계 여부와 관계가 없는, 학술적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입니다.”

 

이야말로 귀하가 리뷰를 작성한 의도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인데, 돌궐님께 여쭙겠습니다.

무릇 글쓰기에서 제3자의 작업을 소개할 때 서부 부분반드시언급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서두에 쓰면 학술적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에 부합하고, “말미에 쓰면 어긋나는 것입니까?

정리합니다. 쓰든 안 쓰든, 앞에 쓰든 뒤에 쓰든, 그건 저자의 맘이며 저자의 재량입니다. 귀하가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며, 조롱하거나 비난할 사항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고 귀하의 눈에는, 강교수의 작업에 대한 위의 제 진술이 잠깐 언급되고만 정도로 보이십니까. 저로서는, 굳이 소개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극찬을 보낸 것입니다. 남의 선의(善意)’악의(惡意)’로 비틀지 마십시오. 귀하의 아집에 찬 비판이 혹여 강교수에게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이왕 학술적인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를 강조하셨으니 덧붙입니다.

중복되는 부분이지만, 귀하는 리뷰에서 2007년에 첫 논고가 나온 강교수의 작업을 “90년대 말부터라고 기술하여 저를 남이 오랫동안 애써 이룩한 성과를 가로챈 부도덕한 인물로 매도하였습니다.

여쭙겠습니다.

상대방의 명예에 치명적인, 3자의 연구 성과를 가로챘다는 도적적 파산선고를 내리면서 그 근거로 내세운 자료의 연대조차 확인하지 않은 것은 학술적인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를 지킨 것입니까.

귀하는, 연대 문제에 대한 저의 지적에 댓글’(9/21)에서 일단 실수라고 물러섰지만, 귀하 스스로 그토록 혁신적”, “획기적이라고 평가하고 인상 깊게 읽은 논문이 나온 시점을 착각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합니다. 귀하는 댓글에서 또한,

 

“1999년에 인물과 사상에 쓰신 강우방 관장은 석굴암의 현실을 직시하라라는 글에서 선생님께서는 이미 햇살 콤플렉스라는 낱말을 쓰셨기 때문에 석굴암의 햇살신화라는 관점은 이 때 시작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햇살 콤플렉스라는 낱말은 강우방 관장은……」(1999)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닙니다. 그 말은, 그 전해인 19985월 발간된 인물과 사상7권의 <석굴암을 위한 변명- 문화권략 유홍준의 지적 타락>에서, 우리 학계에 팽배한 석굴암 본존불과 관련된 동해일출신화가 과도한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햇살 콤플렉스의 산물이라고 최초로 사용한 것입니다.

(1998년 당시까지 저는 동해 일출 이야기를 낭만적인 상상력의 소산으로 보았지만, 이후 그것이 일제의 달콤한 문화식민사관의 변종종임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 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귀하도 잘 알 것입니다)

 

귀하의 글에 이런 경우가 한둘이 아닌데, 정리하겠습니다.

그동안 원형논쟁을 이끌어온 기존학계를 대변하는 건 귀하의 자유지만, 글을 쓸 때는, 특히 남을 비판할 때는 최소한 근거 자료의 연대만큼은 정확을 기해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학술적 글쓰기의 기본적인 절차를 지키는 첫걸음 아니겠습니까.

 

2015. 1. 11.

 

성낙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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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1-11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돌궐님 글을 읽다가 선생님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지금 두번째 다시 읽고 있습니다.) 학문적 판단은 제가 할 수준이 아니나 석굴암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을 느꼈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논쟁이 잘 진해되고 마무리되어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 가기를 바랍니다. 두분글에서조금 안타까와지는 모습이 보이네요 / 전실은 있었을 것 같고 광창은 없었을것 같은데 ˝햇살˝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동지라는게 계속 걸리네요.

성낙주 2015-01-1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끄럽습니다. 글을 올릴 때마다 주저하고 고민합니다. 어렵게 주신 고언의 말씀 새기고 또 새기겠습니다. 앞으로 사실관계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자극적인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겠습니다. 다만, 이런 경우 진흙탕 싸음으로 번지는 게 통례라, 논쟁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였다는 점만은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햇살` 문제에 관해서는 제 책에서 제기한 견해가 현재 제가 생각하는 전부입니다. 장차 더 좋은 자료가 있으면, 제 블러그에라도 공개하겠습니다.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성낙주 올림

돌궐 2015-01-1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께서 앞서 주셨던 글에 대한 제 의견은 너무 길어져서 따로 페이퍼로 작성했습니다.
http://blog.aladin.co.kr/dolkwol/7319984 (1월 6일에 올렸습니다)

이 글에 대한 제 의견은 따로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