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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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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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공부 - 하루 한 편 삶을 바꾸는 고전 수업
장유승 지음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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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죽고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였으니, 바로 수치심입니다.˝ 집에 두고 하루하루 찬찬히 읽을 만한 글이 이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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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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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스토리텔링, 픽션 하면 떠올리는 소설, 영화 같은 매체를 넘어 놀이, 꿈, 게임, 광고, 역사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치며 이야기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한다. 여러 연구 결과들은 설득력을 더한다. 다만 진화, 본능, 생존 같은 <이야기틀>이 꼭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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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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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엔딩 크레딧은 이 영화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밝힌다. 그걸 보고 마침 생각이 나서, 작년에 출간되었을 때부터 관심을 두었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읽게 되었다. 엔딩 크레딧에는 막연히 츠바이크의 영향을 받았다고만 나오기 때문에 어떤 작품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는데, 바로 『초조한 마음』을 가리킴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액자 형식과 소설 첫 부분 화자의 서술, 몇몇 등장인물들의 구도 정도만을 차용했을 뿐, 두 작품의 내용과 주제는 크게 관계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전쟁이 드리운 야만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초조한 마음』은 주인공인 호프밀러 소위가 부유한 귀족 가문 딸이지만 하반신이 불구인 에디트, 그녀의 아버지 케케스팔바와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호프밀러는 불편한 몸 때문에 세상에서 격리되고 예민해진 에디트와 그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케케스팔바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는 지체 높은 가문과 교류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기양양해지기도 하며 보잘것없는 하급 장교인 자신이 누군가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는 데에 도취되어 황홀경에 빠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케케스팔바가 사실 유대인이며 출신이 비천하다는 것에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해하고, 에디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그녀와 얽혀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을까 걱정한다.

여기에서 호프밀러와 에디트의 담당 의사 콘도어가 대조를 이룬다. 과거 자신의 환자였던 눈 먼 여인을 치료하려다 실패하고 책임을 지기 위해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은 콘도어는 호프밀러의 연민은 진정한 연민이 아니라고 말한다.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236쪽)


앞서 액자를 이루는 서술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호프밀러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동일한 내용이 경구처럼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구절은 『초조한 마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한국어에는 '연민'이라고 하면 사전에 나와 있듯이 '불쌍함' '가련함' '동정'이 떠오른다. 하지만 연민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 'Mitleid'의 뜻은 '함께 고통스러워함' '고통을 나눔'에 가깝다. 이때 콘도어가 말하는 진정한 연민, 즉 그가 몸소 실천하는 자기희생적 연민이란 한국어 '연대'와 닮은 듯하다. 자신만의 감정에서 벗어나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헤아리는 심리적 단계에서 더 나아가 타인과 '고통을 함께'하고 심지어 타인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행동하는 실천적 단계까지 아우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연민에는 책임이 따르고 엄청난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콘도어의 입장에서 호프밀러의 연민은 위험천만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츠바이크는 이렇듯 콘도어의 입을 통해 상반되는 두 가지 연민을 제시하고, 그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호프밀러의 심리를 세세하게 그린다. 물론 호프밀러는 콘도어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호프밀러 개인의 이야기로, 한 가족의 몰락 이야기로만 볼 수는 없다. 액자 속 이야기의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시기와 맞물린다. 케케스팔바 가족의 비극으로 충격을 받은 후 호프밀러는 제정신이 아닌 채로 전쟁터로 나가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전쟁 영웅의 칭호까지 얻게 된다. 이때 어설핀 연민으로 인한 호프밀러의 '개인적인' 죄는 전쟁이 불러일으킨 '일반적인' 죄 속에 묻혀 버린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고 해도 그것이 세계대전을 겪은 군인과 평화로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미를 지닐 수는 없었다. 내 개인적인 죄는 이미 거대한 핏더미 속으로 섞여 들어가 일반적인 죄가 되어버린 것이다."(460쪽)


『초조한 마음』이 출간된 것은 1939년, 즉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이고, 소설의 액자 밖 이야기에서는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뒤숭숭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온다. 이제 중년이 된 호프밀러는 전쟁과 관련하여 화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개인이 조직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저 휩쓸려가는 것 이상의 것이 요구됩니다. 바로 개인의 용기이죠. 그러나 오늘날 같은 조직화, 기계화의 시대에는 이러한 개인의 용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는 전쟁에서 주로 집단적 용기만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대오 속에서 나오는 용기 말입니다. 이 용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요소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허영심, 경솔함, 심지어는 무료함에서까지.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 전선에서 가장 용감했다는 군인들을 개인적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만나보면 영웅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12~13쪽)


호프밀러는 사실 케케스팔바 가족의 일 때문에 도피하는 심정으로 전장에 나갔을 뿐이므로 사람들이 자신을 '전쟁 영웅'이라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는 자기 상황을 감당할 만한 '개인적 용기'가 없었으므로 전쟁터의 '집단적 용기' 속으로 도피해 버린 것이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전쟁터로 향했다. 누군가는 애국주의적 열정으로, 누군가는 전쟁이 지긋지긋하고 고리타분한 현재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불러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혹은 누군가는 전공을 세워 훈장을 받고 영웅이 되려는 마음으로. 이런 허영심과 경솔함, 무료함의 대열에 호프밀러의 용기 없음, 즉 두려움도 끼어 있다. 그는 물론 에디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장애인이며 케케스팔바 가문이 본래 귀족이 아니라 돈벌이로 성공한 유대인 출신이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의 사회적 풍조가 장애인과 유대인을 멸시했으므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호프밀러에게는 에디트와 끝까지 함께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두 가지 연민으로 돌아가 보자. 호프밀러의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케케스팔바 가족의 몰락이라는 비극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의 살상이라는 또 다른 죄로 이어졌다. 이러한 나약한 마음은 무분별하고 집단적인 열정으로 돌변해 전쟁이라는 기계 장치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물론 『초조한 마음』은 2차 세계대전 전에 나온 소설이지만 이후 나치를 비롯한 전체주의 정권들이 장애인, 유대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탄압하고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호프밀러의 이야기는 개인적 에피소드로 그치지 않는다. 호프밀러가 콘도어가 말한 진정한 연민, 곧 '연대'의 길을 택했다면, 1910년대의 사회가 도피를 택하지 않고 진정 용기로 현실과 대면했다면, 더 이상의 비극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호프밀러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콘도어의 조언을 따르기보다는 도피를 택할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그 전에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인간적으로는' 호프밀러의 입장이 십분 이해가 됐다. 오히려 콘도어는 살아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도덕과 윤리를 뭉뚱그려 주조한, 뭔가 어색한 동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츠바이크 역시 이 점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에서는 비관적인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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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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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여행을 다녀왔다. 지방 소도시의 변두리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공단 지대를 지나게 됐다. 피부색이 낯선 몇몇 외국인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아마도 동남아시아 또는 파키스탄이나 네팔 등지에서 돈을 벌려고 온 노동자들이리라. 버스는 공단 구석구석 정류장을 돌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태웠고 어느새 버스는 낯선 얼굴들과 언어들로 가득 찼다. 여행 온 낯선 지방에서 토착민이 아닌 이방인들과 마주치니 기분이 이상했다. 솔직히 불편했다. 왠지 이상한 체취와 향수 냄새, 생전 처음 듣는 외국어, 마치 버스를 점령한 듯 거리낌 없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 기사 아저씨를 제외하면 버스 안에 있는 한국 사람은 나와 동행 두 사람뿐. ‘혹시라도 저 사람들이 괜히 말이라도 던지거나 시비를 걸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평소 머릿속으로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익이 중요하지.’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한국 사회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지.’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들’과 마주했을 때는 편견이 발동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태도를 곱씹으며 가책을 느꼈다. 그때 떠올린 것이 얼마 전에 읽은 바오 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간 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접해 온 정보들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예비군 훈련의 안보 교육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안보에 취약하고 무심했던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적화 통일된 뼈아픈 사례’로 취급한다. 이때 당시 월남에 파병된 한국 군인들은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운 숭고한 용사’가 된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베트남 파병 후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고엽제 피해 등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겪는 퇴역 군인들의 얘기가 다루어지도 한다. 그 외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미지란 철저히 미국이라는 거울에 비쳐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빽빽한 밀림 속을 누비는 미군들과 그들을 기습하는 신출귀몰한 베트콩들을 그린다. 때로는 영웅적인 전투와 전공이, 때로는 비참한 패배와 전쟁의 참상이 제시된다. 1960~1970년대를 뒤흔든 대대적인 반전 운동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주제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베트남 전쟁이 ‘베트남에서’ 일어났음은 잘 알면서도 막상 그것이 ‘베트남인들이’ 겪은 전쟁임은 간과하곤 한다. 그들이 실제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는지, 전쟁에서 무엇을 느꼈으며 잃거나 얻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베트남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수밖에 없다. 『전쟁의 슬픔』은 베트남인이 직접 쓴 베트남 전쟁 소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소설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전쟁이 불러온 비극과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누군가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정신병자가 된 듯, 비가 쏟아지는 밀림의 전장을 유령처럼 배회한다. 누군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잃고 누군가는 전후의 무기력과 허탈에 빠져든다.


주인공 끼엔은 전쟁 때에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에게 전쟁은 비극 자체이자 끝없는 슬픔의 원천이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 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진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266쪽)

 

이렇듯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슬픔과 절망은 끼엔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고 작가가 된다. 글을 써 내려가면서 슬픈 기억을 떠올리고 되짚는다. 글쓰기에 몰두함으로써 전쟁 후 방향을 잃고 무기력해진 자신의 상황(여기에는 여자 친구 프엉과의 비극이 얽혀 있다.)을 잊을 수 있다. 글쓰기는 끼엔이 존재하는 이유, 사는 이유이다.


소설 밖으로 나와서 글쓰기의 의미를 달리 찾아볼 수도 있다. 책 앞에는 작가의 말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서 바오 닌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추억을 떠올린다. 한국에서 그가 만난 이들 중에는 다름 아닌, 베트남전 참전 문인들도 있다. 바오 닌은 과거에 서로 총을 겨누었을지도 모를 이 사람들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소설로 다시 탄생한 베트남전과 그 비극, 그리고 그것을 읽으며 과거를 떠올리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깊은 공감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소통의 장을 펼치는 일이다.


『전쟁의 슬픔』을 떠올린 나는 그날 버스 좌석에 앉아 생각했다. ‘저 외국인 노동자 중에 혹시라도 베트남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러자 앞서 엄습했던 불안감이 잦아들고 조금은 호기심과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저녁 메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지 서툰 한국말이 들려왔다. “목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버스가 시내에 들어서자 그들은 두서넛씩 정거장에 내려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동행과 함께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작은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에 앉아 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또 한 무리의 외국인들. 이번에는 흰 피부에 배낭을 멘 익숙한 이들이다. 아마 여행을 온 이들 같았다. 버스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편안했다. 서툰 영어로 응대하는 카페 직원들의 웃음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새삼 다시 느꼈다. 아직은 내가 이해해야 할 사람들이 많고 따라서 읽을 책도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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