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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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여행을 다녀왔다. 지방 소도시의 변두리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공단 지대를 지나게 됐다. 피부색이 낯선 몇몇 외국인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아마도 동남아시아 또는 파키스탄이나 네팔 등지에서 돈을 벌려고 온 노동자들이리라. 버스는 공단 구석구석 정류장을 돌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태웠고 어느새 버스는 낯선 얼굴들과 언어들로 가득 찼다. 여행 온 낯선 지방에서 토착민이 아닌 이방인들과 마주치니 기분이 이상했다. 솔직히 불편했다. 왠지 이상한 체취와 향수 냄새, 생전 처음 듣는 외국어, 마치 버스를 점령한 듯 거리낌 없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 기사 아저씨를 제외하면 버스 안에 있는 한국 사람은 나와 동행 두 사람뿐. ‘혹시라도 저 사람들이 괜히 말이라도 던지거나 시비를 걸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평소 머릿속으로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익이 중요하지.’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한국 사회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지.’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들’과 마주했을 때는 편견이 발동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태도를 곱씹으며 가책을 느꼈다. 그때 떠올린 것이 얼마 전에 읽은 바오 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간 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접해 온 정보들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예비군 훈련의 안보 교육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안보에 취약하고 무심했던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적화 통일된 뼈아픈 사례’로 취급한다. 이때 당시 월남에 파병된 한국 군인들은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운 숭고한 용사’가 된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베트남 파병 후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고엽제 피해 등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겪는 퇴역 군인들의 얘기가 다루어지도 한다. 그 외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미지란 철저히 미국이라는 거울에 비쳐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빽빽한 밀림 속을 누비는 미군들과 그들을 기습하는 신출귀몰한 베트콩들을 그린다. 때로는 영웅적인 전투와 전공이, 때로는 비참한 패배와 전쟁의 참상이 제시된다. 1960~1970년대를 뒤흔든 대대적인 반전 운동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주제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베트남 전쟁이 ‘베트남에서’ 일어났음은 잘 알면서도 막상 그것이 ‘베트남인들이’ 겪은 전쟁임은 간과하곤 한다. 그들이 실제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는지, 전쟁에서 무엇을 느꼈으며 잃거나 얻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베트남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수밖에 없다. 『전쟁의 슬픔』은 베트남인이 직접 쓴 베트남 전쟁 소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소설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전쟁이 불러온 비극과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누군가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정신병자가 된 듯, 비가 쏟아지는 밀림의 전장을 유령처럼 배회한다. 누군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잃고 누군가는 전후의 무기력과 허탈에 빠져든다.


주인공 끼엔은 전쟁 때에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에게 전쟁은 비극 자체이자 끝없는 슬픔의 원천이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 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진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266쪽)

 

이렇듯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슬픔과 절망은 끼엔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고 작가가 된다. 글을 써 내려가면서 슬픈 기억을 떠올리고 되짚는다. 글쓰기에 몰두함으로써 전쟁 후 방향을 잃고 무기력해진 자신의 상황(여기에는 여자 친구 프엉과의 비극이 얽혀 있다.)을 잊을 수 있다. 글쓰기는 끼엔이 존재하는 이유, 사는 이유이다.


소설 밖으로 나와서 글쓰기의 의미를 달리 찾아볼 수도 있다. 책 앞에는 작가의 말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서 바오 닌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추억을 떠올린다. 한국에서 그가 만난 이들 중에는 다름 아닌, 베트남전 참전 문인들도 있다. 바오 닌은 과거에 서로 총을 겨누었을지도 모를 이 사람들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소설로 다시 탄생한 베트남전과 그 비극, 그리고 그것을 읽으며 과거를 떠올리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깊은 공감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소통의 장을 펼치는 일이다.


『전쟁의 슬픔』을 떠올린 나는 그날 버스 좌석에 앉아 생각했다. ‘저 외국인 노동자 중에 혹시라도 베트남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러자 앞서 엄습했던 불안감이 잦아들고 조금은 호기심과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저녁 메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지 서툰 한국말이 들려왔다. “목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버스가 시내에 들어서자 그들은 두서넛씩 정거장에 내려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동행과 함께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작은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에 앉아 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또 한 무리의 외국인들. 이번에는 흰 피부에 배낭을 멘 익숙한 이들이다. 아마 여행을 온 이들 같았다. 버스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편안했다. 서툰 영어로 응대하는 카페 직원들의 웃음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새삼 다시 느꼈다. 아직은 내가 이해해야 할 사람들이 많고 따라서 읽을 책도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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