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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야행로 창비세계문학 17
시가 나오야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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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야행로』는 주인공 켄사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비록 1인칭으로 서술되지는 않지만, 이 소설의 대부분은 켄사꾸가 겪은 일들, 그의 행동과 감정을 묘사하는 데에 할애된다. 실제로 한 대목에서는 켄사꾸가 쓰는 소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 내용은 바로 『암야행로』의 첫 부분과 일치한다. 이렇게 보면 『암야행로』는 켄사꾸가 쓴 소설이면서 동시에 켄사꾸에 대한 소설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암야행로』에서는 아버지와의 불화 등 작가 시가 나오야의 자전적인 체험들이 분신인 켄사꾸를 통해 전개된다. 그렇다면 켄사꾸를 기준으로 생각하든, 시가 나오야를 기준으로 생각하든 이 작품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사실적으로 써 나가는 소설, 즉 사소설(私小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켄사꾸는 어린 시절부터 왠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자라고 타인에게서 늘 거리감을 느낀다. 이런 소외감은 성인이 된 후 청혼을 거절당하면서 더욱 커진다. 이 모든 일의 이면에는 켄사쿠의 출생의 비밀이 숨어 있음이 밝혀진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 이 사실을 알게 된 켄사꾸는 큰 충격에 빠지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는 데 성공하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는 듯 보인다. 하지만 첫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내와 사촌 오빠 사이에 부적절한 일이 일어났음이 드러난다.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인 켄사꾸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난폭해지고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산 속 절에서 지낸다. 마음을 다스린 켄사꾸는 무리하게 등산을 하다 돌아와 병에 걸려 눕고, 마지막에는 아내가 그를 찾아온다.

켄사꾸의 방황과 여행, 사색으로 가득한 이 소설은 다소 지루하다. 이렇듯 한 인물에 집중해 그 내면을 그리는 소설을 읽을 때에는 그 인물에 얼마나 이입하느냐에 따라 독서의 집중도가 달라진다. 소설가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글을 쓴다거나 책을 내고 활동하기보다는 아마 적당히 물려받은 듯 보이는 재산을 가지고 한량처럼 지내는 켄사꾸, 유곽의 게이샤들에게 여러 차례 이성적 관심을 느끼면서도 이런저런 사소한 계기로 금방 마음이 식어 버리곤 하는 변덕스러운 켄사꾸에게는 좀처럼 감정을 이입하기가 힘들다.(작품해설에 따르면 당대 일본 청년들이 이 캐릭터에게 크게 공감했다는데,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갈대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세세히 대목들에서는 작가가 굳이 왜 이토록 ‘사소한’ 것들까지 썼을까 싶기도 하다. 별것 아닌 일로 화가 났을 때 내 마음속에 일어났다 사그라지는 온갖 어린애 같은 감정들을 글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적어 놓는다면 그런 묘사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켄사꾸에게 어쩔 수 없이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암야행로』는 너무나도 사소한 마음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그리므로 ‘사실적’이며 여기에 이 소설의 매력이 있다.

시가 나오야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하는 켄사꾸의 마음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불쾌함이라는 감정이다. 켄사꾸는 불쾌함을 느낀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물론이고 때로는 가족들에게도,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그렇다. 이는 무엇보다도 켄사꾸가 불쾌한 관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햄릿의 우울함에는 그래도 출구가 있다. 그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한 길을 가며 비극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켄사꾸의 불쾌함을 해소할 방법은 없으며 그 자신이 이미 비극이다. 할아버지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그들을 원망할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렇다고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아버지를 탓할 수도 없다. 분출되지 못하고 억눌린 분노와 원망은 켄사꾸 안에 그대로 남아 그를 방해하고(그가 제대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 큰 불쾌감을 불러온다. 켄사꾸는 타지로 여행을 떠나 가까운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마음을 추스르려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되자 다시금 걷잡을 수 없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때 켄사꾸는 또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는 그전과는 달리 정말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완전히 변했다. 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초조한 마음이 들긴 해도, 마침내 인류가 지구와 함께 멸망해버린다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으리라는 기분이었다.”(459쪽)

 

켄사꾸는 “무한한 인간의 욕망이 결국 어떤 의미에서 인간을 불행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라며 속세의 번뇌를 떨친 승려처럼 겸허한 태도를 드러낸다. 흡사 그의 아버지가 과거에 비슷한 일을 겪고도 분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처럼, 켄사꾸도 아내의 잘못을 포용하기로 결심한 것일까? 켄사꾸는 이제야 진정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스스로가 아버지, 즉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솔직하고 적나라한 감정의 분출이나 토로 없이, 그런 성찰로 과연 그가 예전처럼 아내를 대할 수 있을까? 그가 병에 걸린 것은 어쩌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그를 답답하게 하는 마음의 앙금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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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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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문명이다. 진보고 과학이며 화려함이자 안정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이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소설 『제국』은 바로 이런 제국과, 그 이단아라 할 수 있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20세기 초부터 2차 세계 대전까지, 이른바 제국주의가 융성했던 때가 이 소설의 배경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강대국들(후발 주자라 할 수 있는 미국, 일본을 일단 논외로 한다면)이 산업혁명과 과학 및 기술혁명, 자본주의의 발전을 토대로 전 세계 곳곳에 앞 다퉈 식민지를 개척, 통치하고 막대한 부와 권력을 구축하던 때다. 제국주의 열강의 역사에서는 가히 황금기라고 할 수 있지만 피식민 국가들, 약소국가들, 피지배 ‘원주민’들에게는 수탈과 착취로 점철된 어두운 시기이다. 제국주의 시대는 다른 한편으로는 열강들 사이, 침략국과 피침략국 사이 전쟁의 시기이기도 하며, 따라서 다양한 문화들이 만나고 충돌하고 융합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제국』의 주인공인 독일인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는 채식주의자이자 나체주의자이며 태양 숭배자이다. 그는 높은 나무 위에서 태양빛을 직접 받으며 자라나는 코코야자를 숭고하다고 생각하며, 급기야는 남태평양에 있는 독일 식민지인 카바콘 섬에 가서 코코야자만 먹으며 평생을 보내고자 한다. 얼핏 보기에 그는 괴짜이며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그저 정신 나간 망상이 아니다. 엥겔하르트는 무엇보다도 현대 문명의 진보 뒤에 숨은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라 나름대로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독기로 가득 찬, 천박하고 음산한, 재밋거리를 찾아 눈이 시뻘개졌으며 속에서부터 철저하게 썩어빠진, 아무 소용 없는 물건들을 그득하게 쌓아 올리는 데만 급급하며 동물을 학살하고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사회에 작별을 고하겠다. 그것도 아주 영원히.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작정이다.(111쪽)

 

그는 경제적, 물질적 화려함 이면에 있는 인간의 정신적 황폐를 발견하며, 보다 자연에 가깝고 인간다운 방식의 삶을 찾고자 한다. 동물 학살에 반대해 육식을 거부하고,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나 인종 차별을 거부하는 모습에서는 그의 윤리적 태도가 돋보이기도 한다. ‘야만적’ 문명의 질서, 즉 제국주의 질서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추구하려는 엥겔하르트의 시도는 “위대한 고립”(89쪽), 역설적으로 “가장 뛰어난 야만을 향한 첫 발걸음”(80쪽)이라 일컬어지기까지 한다.

엥겔하르트는 카바콘 섬에 가서 홀로 살기 시작하지만 그의 섬 생활은 애초에 그가 품었던 이상과는 괴리가 있다. 그는 물론 코코야자만 먹으며 자급자족으로 산다. 그렇지만 카바콘 섬을 사기 위해 막대한 빚을 내며 그 빚을 충당하기 위해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 코코야자 기름 사업을 한다. 제국과 문명을 거부하고 온 엥겔하르트 자신이 그 질서에 다시금 매이고 마는 것이다. 외부의 방해 또한 끊이지 않는다. 엥겔하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는 불화가 일어나기 일쑤고, 독일 제국 식민지청은 온갖 스캔들을 일으키는 엥겔하르트의 존재에 경계심과 거부감을 드러내며 급기야 그를 제거하려고까지 한다. 엥겔하르트는 1, 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영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 미군 등의 레이더망에 포착되며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가지 못한다. 지구 곳곳에 미치는 제국의 손길은 작은 섬 카바콘의 한 사람조차 가만히 놔두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엥겔하르트는 점차 야만화된다. 코코야자만 먹던 그는 어느 순간 손톱과 발톱을 먹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자기 손가락을 잘라 먹는다. ‘야만적인’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이 ‘가장 뛰어난 야만’을 추구했던 엥겔하르트에게서 뒤틀린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품었던 유토피아에 대한 신념이 실현되지 못할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좌절과 광기 그리고 반유대주의에 빠져들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엥겔하르트의 이러한 몰락은 제국의 몰락과 동시에 일어난다. 독일은 두 차례 전쟁에서 패하고 유럽 열강 중심의 세계 질서는 신흥 강대국 미국의 등장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전쟁, 착취, 반유대주의, 나치, 식민지 지배 등으로 점철된 야만적 제국의 시대가 끝나고 세계는 미국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질서 아래 놓인 듯 보인다. 소설 말미에 엥겔하르트가 도착하는 미군 기지는 청결하고 안락하며, 미국인들은 그에게 듣기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면 속옷과 손목시계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엥겔하르트는 수십 년 만에 고기를 먹는다. 이제야말로 야만적 제국주의의 시대가 끝나고 ‘진정한’ 문명의 시대가 온 것일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제국이다.”(297쪽)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제국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황제(Emperor)가 사라지고 제국(Imperium)이라는 명칭이 쓰이지 않을 뿐, 엥겔하르트를 맞이하는 것은 콜라와 핫도그,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세련된 미국식 자본주의 제국이다.

오늘날 우리는 엥겔하르트가 무릎을 꿇은 바로 그 제국이 세운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동시에 물질만능주의, 소비주의, 빈부 격차, 자본의 노동 착취 등 그것이 초래한 야만적 상황들을 목격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제국과 문명은 과거의 그것보다 막강한 힘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때때로 우리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대안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체제로부터 벗어나려 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우리는 결국 실패한 낭만주의자 엥겔하르트처럼 제국의 거대한 그물망에 포섭될 뿐이다. 소설 『제국』을 읽으며 우리 자신의 우울한 자화상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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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세트 - 전5권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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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볼라뇨. 무조건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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